제28회 창원대문학상 수필 부문 장려 - 낭만의 도시에서 길을 잃다

흔히들 사람들은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 한다. 그러나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나의 2달간 의 여정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학연수로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 그것도 프랑스에 가게 되다니. 어학연수 선발문을 본 이후로 나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매일이 크리스마스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설렜다. 그러나 막상 타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나는 원체 사람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라 다섯이 함께하는 여행은 내게 맞지 않았다. 신경 쓸 것도 많았다. 나에게 있어 타인의 감정이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예민하리만큼 눈치가 빨라서 우리 다섯 중 누구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신경 쓰여 앞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지 못했다. 모두가 감탄할 때 나는 감탄사조차 제대로 뱉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스무 살부터 꿈꿔왔던 나의 첫 에펠탑은 나의 이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여행이 안 맞는 사람인가. 해외여행은 인생의 터닝포인트라며 여행을 위해 돈을 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지만 그 당시 나의 답은 “전혀” 였다.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탓일까.

이어질 여정에 대한 기대, 행복과 만족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일정이 바쁠수록 늘 목적지만을 바라봤다. 한곳에 도착하면 곧바로 다음 미션을 수행하러 떠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눈치란 눈치는 다 보는 성격을 가졌으니 어디에 있어도 맘 편히있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나는 매번 눈앞에 놓인 것과 다른 것을 보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지금, 현재 앞에 놓인 것만을 보고 행복해하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늘 불안하고 조급해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나의 감정들을자주 놓치고 마는 사람이었다. 생각이 많다는 건단점이 될 수밖에 없나. 나도 단순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너무복잡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보다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고 타고난 나의 성정을 탓하기도 했다.온전히 이 여행을, 발 딛고 있는 이 도시를 느낄여유 따위가 나에겐 없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열차 밖 풍경처럼 모든 게 휙 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알았다. 진정한 여행은 마음속 여유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도처에 깔린 아름다움 조차 보지 못한다. 여유와 안정이 있어야 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 나에게는 그런 날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계획은 쇼핑이었다. 난 쇼핑엔 큰 흥미가 없어서 혼자 백화점을 빠져나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파리의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프랑스에서의 내 하루 평균 이동거리는 14km, 수면시간은 4시간이었다. 그 덕에 조금만 걸어도 온몸이 욱신거렸다.당시 발과 다리의 근육통은 뗄레야 뗄 수 없는나의 단짝 같은 존재였다. 영혼은 한국에 두고 온것 같은 눈은 덤이었다. 잠을 깨기 위해 스타벅스로 향했다. 2달 만에 홀로 갖는 시간은 어색하지만 달콤했다. 오랜 친구와 통화를 했다. 2달 만의 전화였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나의 상상과 달리 고된 일들이 많았다. 이 정도로 할 말이 많은줄은 몰랐는데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푸념이 밑도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들의 연속에서 그제야 한숨 돌리는 기분이었다.그리고 그 한 시간의 통화 덕에 나는 어지럽혀진 나의 복잡한 마음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무게가 덜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카페에서 나와 한참을 걷다 보니 큰 광장이 나왔다. 산책을 하는 곳인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여행에서 처음으로 느리게 보내보는 시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멈춰있는 나, 엽서 같은 파리의 풍경 속 나의 모습은 잘못 끼워 맞춰진 퍼즐 한 조각 같았다. 그렇게 한참 멍을 때리다 쇼핑을 끝낸 아이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심각한 길치라 지도를 봐도 이리저리 헤맬 때가 많은데, 이날은 신기하게도 헤매이며 가는 길이 오히려 즐거웠다. 발걸음도 한껏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날 본 파리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이때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웅장한 건축물과 높이가 정돈된 고풍스러운 집들, 예술이 가득한 거리와 저마다의 색이 담긴 상점들. 내가 꿈꿔왔던 파리가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잘못 맞춰진 퍼즐 조각 하나도, 캔버스 위에 쏟아진 얼룩조차도 작품이 되는 곳. 파리는 그런 곳이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눈앞의 풍경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길가에 내려앉은 다홍빛 노을, 울려 퍼지는 길거리 악사의 바이올린 소리, 루브르의 삼각피라미드는 내가 파리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것 같았다. 길을 잃어 한참을 돌아가는 길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그 풍경을 보고, 헤매이는 길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학에서의 마지막을 앞두고 어쩌면 가장 조급하고 어지러웠던 시기에 나는 프랑스로 떠났다. 힘든 점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꿈처럼 요원해 보이기도 한다. 도착지를 찍고 걸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더 많이, 더 자주 느껴야 한다. 어떤 길에선 어려움을, 어떤 길에선 즐거움을 느끼는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이루고 나를 성장시 킨다. 결국 그 헤매임이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속 여유를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방패가 되어준다. 나는 인생에 있어서도 길치라 삶의 모든 순간 자주 헤매이지만, 그 순간들은 모두 내게 나를 더 잘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타고난 성격은 사실 나의 가장 강한 무기가 되어준다는 것도. 나의 이 예민한 기질도 어느 곳에선 장점이 된다고 믿는다. 예민하다는 건 그만큼 섬세할 수 있단 뜻이니까.

나는 작은 것을 깊이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루브르의 모나리자 도, 장엄한 고전식 건축물도 아닌 피팅룸 앞에서 아내를 기다리던 아저씨와 동질감에 서로를 보며 웃었던 일, 지하철에서 날 빤히 쳐다본 꼬마아이와의 짧은 대화, 밤늦게 센 강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연인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은 파리의 낭만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결국 내가 어디에 있든 낭만은 내가 만들기 나름이라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곧 졸업이다. 앞으로 내 앞에 놓일 수많은 갈림길에서 나는 더욱 헤매고, 더 자주 길을 잃겠지 만, 이제 나는 안다. 그 모든 일들도 훗날 뒤돌아보면 모두 날 미소 짓게 하는 추억이 될 거라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나의 낭만이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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