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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순응주의자
  • 창원대신문
  • 승인 2023.04.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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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NS에서 많은 ‘좋아요’를 받는 게시물을 살펴보면 ‘특징’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콘텐츠의 종류는 인간 군상만큼이나 다양해서 직군과 세대, 성별과 지역까지도 가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겪었던 상황에 공감하면서 친구를 태그하고, 웃긴 댓글을 달면서 즐거움을 배로 늘려주기도 한다.

영상 게시물에는 실제로 어디선가 본 듯한 상황과 인물을 연출하는 연기자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콘텐츠 제작자의 분석 능력에 감탄하며 ‘인류학자’라는 별명을 붙여주거나 그의 연기 능력을 보고 ‘그 사람들을 삼킨 것 같다’라며 장난스럽게 칭찬하기도 한다.

필자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이것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게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집단의 특징을 꼬집어서 과장 재연 하는 개그는 예전부터 있었고, 보편적으로 겪는 상황의 재연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만들어 언제나 큰 재미를 제공한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약간의 편집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요즘은 좀 더 복잡하다. 높은 조회수와 ‘좋아요’를 위해 재연의 소재가 점점 자극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유형을 재연하는 것이 주목적인 만큼, 그 대상이 친숙하게 느껴지게끔 캐릭터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된다. 그전에는 대상을 지칭하는 의미만을 가졌던 단어나 이름이 그 특징을 공유하는 집단 전체를 지칭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집단이 취하는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만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간주해 이해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특징적인 집단을 주류 사회에서 배격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이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지칭하는 것 자체가 혐오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될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조금이라도 개성있거나 튀는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튀고 싶어하냐?’며 비아냥거리거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며 무언가 결핍된 사람처럼 간주하기 일쑤다. 한국 사회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이런 콘텐츠의 양산은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개그보다는 누군가의 개성을 조롱하고 질타하는 무기로 작용하기 쉽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차별적 미디어의 힘은 강력하다. 1915년 미국에서 강한 인종차별적인 색채를 가진 영화 <국가의 탄생>이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그에 따른 결과로, 흑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던 KKK단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으며 테러 행위를 자행하는 불씨를 지폈다.

이 글의 제목은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저작인 <순응주의자>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비춰볼 수도 있지만, 넓게 본다면 한국 사회의 모습이 언뜻 비치기도 한다. 주인공 마르첼로는 끊임없이 정상성을 벗어날 때 맞이할 사회의 질타가 두려워 정상성이라는 노선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노력은 마르첼로라는 인격의 파멸로 끝난다.

한국 사회가 계속해서 입체적인 개성을 정상성이라는 잣대로 찍어눌러 단편적으로 조롱한다면, 사회에서 배격당한 ‘순응주의자’들은 언젠가 치료 받지 못한 곪은 상처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진지하게 과한 순응주의자는 아닌지, 개인의 개성을 조롱하고 있는지 짚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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