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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창원대문학상 수필 부문 가작 - 어린이미움시대
  • 창원대신문
  • 승인 2023.03.02 08:05
  • 호수 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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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미움시대

심아현 (국제관계학과 1학년)

 

유년의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대담한 아이였다. 놀이터에서 본 고등학생 언니가 먹는 아이스크림을 보고 대뜸 "언니, 나도 아이스크림 사 주면 안 돼요?"라고 한다든가, 요구르트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께 "딸기 맛이랑 포도 맛 둘 다 먹고 싶은데 하나 살 돈밖에 없어요."라고 한다든가, 지나가는 아저씨께 "아저씨, 다리가 아파서 그런데 업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했다는 점에서 나에게 붙은 수식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개 어린이들은 사리 분별이 어려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모른다. 나 또한 그게 잘못된 행동인지 몰랐으니까. 고동색 교복을 입은 언니는 초면에 만난 나를 슈퍼마켓에 데려가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일곱 살 때 만난 요구르트 아주머니께서는 한 가지 맛을 살 수 있는 돈을 받고 두 가지 맛 모두 건네주었다. 바빠 보이던 아저씨는 불편한 기색 없이 흔쾌히 나를 업어주시곤 전용 비행기를 자처하셨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어린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줄 알았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잘못됐다는 건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부모님과 자주 갔던 돈가스집에는 어린이 전용 메뉴가 있었다. 어린이가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잘린 한입 크기의 돈가스, 젓가락질이 어색한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 포크, 뜨겁지 않은 수프와 작은 요구르트까지. 그 당시 내가 사는 곳에는 '어린이 전용 메뉴', '어린이 놀이방' 등 어린이를 위한 가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단 한 번도 그 가게가 신기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시대는 내가 '어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요즈음 나는 느끼고 있다. ‘어린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시대가 되고 있다고. 쨍쨍한 여름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가족을 기억한다. 사정을 보아하니,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뜨거운 햇볕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렇지만 카페 대부분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었고, 자리가 있는 카페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토록 더운 여름 주말, 그들이 자리가 빈 카페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에는 간판 크게 쓰여 있는 '15살 이하 출입 금지'에 있다. 그 카페는 '노키즈존'이었고, 그로 인해 어린아이의 출입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속상하게도 이 거리에서 온 가족이 햇볕을 피할 방법은 아이가 좀 더 자라는 것이 유일했다. 나이를 먹는 게 정답이라니, 순식간에 오답이 된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모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입장이 제한되는 삶은 어떨까. 어릴 적 따스한 기억이 깃든 곳은 내가 살아온 시간과 달리 변해 있었다. 자연스레 드는 씁쓸하고 속상한 감정은 마음속에 고여갔다.

 

그 일은 나에게 ‘노키즈존’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알고 보니 내 주변에는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카페, 캠핑장, 미술관 등 장소도 다양했다. 여태껏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이유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다. 나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우연히 노키즈존 카페를 지나가다 유리창 너머 어른들을 마주쳤다. 저 사람들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노키즈존이 없는 세상에 살았을 거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미움이란, 정말 쉬운 거구나. 우리는 쉽게 어린이를 미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구나.

한국 최다 관광지인 제주에는 노키즈존이 무려 79군데에 달한다고 한다.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답답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가족여행에 가서도 차별받는다. 모처럼 떠나는 여행이 분명 설렜을 텐데. 나는 가늠조차 가지 않는 아이들의 상처에 가슴이 아려온다. 과연 우리가 그들에게 '차별 금지'를 논할 자격이 있을까? 이 시대 아이들에게 정의와 평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른이 아이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판단의 근거는 나의 유년 시절이다. 그 시절 고등학생 언니는 돈이 많아서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을까? 아주머니는 요구르트가 남아서 두 가지 맛 모두 준 것일까? 아저씨는 등을 내어줄 만큼 여유로웠고? 내 부탁이 황당했을 것이다. 예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절대 티 내지 않았다. 티를 내는 순간 어린 나는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했을 테니까.

 

2022년. 그토록 어렸던 내가 스무 살을 맞이했다. 어른이 된 새해 첫 날, 나는 지금까지 썼던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받았던 배려와 존중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물론 일기장에 고맙고 행복했다는 말이 지렁이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때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색이 바랜 그 일기장에는 내가 어린이로서 받을 수 있었던 사랑이 가득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다짐했다. 어른들이 내게 해 주었던 것처럼, 나도 어린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아이들에게 따뜻한 세상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건 욕심일까. 만약 욕심이라면, 적어도 아이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세상 속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아동을 미워하고 티를 내니까. 그 미움들이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자리 잡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어린이미움시대'는 지속된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이 좀 더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어린이를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먼 훗날 아이들이 이끄는 평등한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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