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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자 없는 3.15 의거, 마산시민 전체가 만든 역사[역사카페]
당시 마산시민들과 민주당원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위행렬을 이루고 있는 장면 (사진자료 제공 : (사)3.15의거 기념사업회)
지난 호에 이어서 백한기(이하 백) 3·15의거 기념사업회 회장과 함께 한 이야기를 이곳 역사카페에서 계속 이어가겠다. 
 
 대부분의 집단 행사나 시위, 집화는 주동자가 존재한다. 3월 15일 마산에는 '주동자'가 있었을까? 백 회장은 기자의 물음에 "아니다"라는 말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때 가장 먼저 불만을 표출한 사람들이 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투표를 하러온 사람들이 '왜 내 주권을 빼앗겨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시위에 참가했어요. 당시 시대상도 반영이 되었죠 앞서(509호 참조) 이야기했듯, 빈부격차 때문에 울분을 참아오던 시민들도 점차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3·15의거에서 선동자나 주동자는 없어요. 만약 선동자나 주동자를 굳이 잡아내야 한다면, 마산 시민 전체를 잡아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게 아니라 마산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3·15의거는 당시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하나의 '역사'입니다"

 분노한 시민들은 마산 민주당사가 있는 오동동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야당, 우리 주권을 찾아 달라"고 요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마침 야당 참관인 자격으로 투표장소로 갔던 민주당 사람들이 여당의 방해공작으로 투표 참관을 못하게 되자 당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투표권을 받은 시민들이 오동동 길에 모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후 민주당원들은 선거 무효화 선언을 하게 되고, 시내 곳곳에 가두방송을 하기 시작한다. 3우러 15일 오전 10시 반. 시민들의 의거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무효화 선언 이후) 야당인사들이 남성동 파출소 쪽으로 걸어 나가자 많은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경찰이 동원되었는데, 야당 당원 5명이 연행되고, 시위대가 해산됩니다. 해산 과정에서 사람들이 '저녁에 개펴장인 마산시청 앞에 모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게 돼요" 이날 시위하던 사람들이 마산시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시 마산의 번화가였던 오동동 길과 남성동 파출소를 거쳐야만 했다. 시위 행렬이 남성동 파출소를 거칠 무렵 당국의 발포명령이 떨어지고,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경찰의 발포에 당황해 잠시 흩어졌던 시민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시위 행렬을 계속해 나갔다. 일부는 계속해서 시청 방향으로, 또 다른 일부는 시청 방향과는 정반대인 북마산 파출소로 향했다.

 북마산 파출소로 향한 시위 행렬은 파출소에 근무하던 경찰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파출소에 근무하던 인력들이 모두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시위대를 막기에 급급해지자 파출소는 텅 비어버렸다. 일부 시민들은 이 틈을 타서 파출소 안으로 둘어갔는데, 시민들의 파출소 진입 직후 경찰서가 불타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한 시민이 파출소에 들어가던 도중 난로가 발에 걸려 화재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경찰은 흥분한 시위대가 방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단정하고,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발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또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시청 방형으로 행렬을 계속해 나가던 사람들은 자산동(현 3.15의거탑 위치)에서 다시 대치를 하게 된다. "다른곳에서는 시민들을 향해 경찰들이 총을 쏘았는데 이상사게 여ㅑ기서는 총격이 전혀 없었어요" 총격이 없자 시위대는 마음 놓고 경찰을 밀어붙였고, 경찰은 힘없이 계속해서 시청쪽으로 밀려들어 갔다. 상황이 악화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일까? 경찰은 발포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살수작전, 경찬은 소방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퍼부었다. "총격이 없다가 소방차가 물을 뿌리니까 시위하던 시민들이 흥분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한 시민이 돌맹이를 던졌는데 그게 소방차를 몰던 운전자에게 날아가 버렸죠. (운전사가 돌을 맞아서)소방차가 방향ㅇ르 못 잡더니 남성전기(현 한국전력)앞에 있던 전신주를 들이받아 버렸죠" 운이 없었던 것일까? 소방차가 들이받은 전신주는 마산시내 전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전신주였다. 결국, 이 사고로 인해 마산은 어둠의 도시가 되어버렸더.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사정을 모르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시민들끼리 '여당이 사전선거도 모자라서 이제는 여당 당원들이 자기네 의원들을 불 꺼좋고 (몰래) 당선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었죠. 낮3에 있었던 일 때문에 열 받은 시민들이 이런 말까지 듣게 되자 더 발끈해서 마산시청 앞으로 몰려들게 되었어요."

 많은 인원들이 마산 시청 앞에 모이게 되자 경찰은 앞이 캄캄해졌다. 지압을 해서 해산을 시켜야 하는데 더 많은 인파가 몰리게 되자 경찰은 총과 최루탄을 막무가내로 쏘아대기 시작한다. 이곳이 3.15의거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무학초등학교 앞이다. "이때 경찰은 시민들에게 살상을 목적으로 발포를 했어요. 시민들의 바로 앞에서 배나 가슴을 집중적으로 사격했죠. 당시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남은 총탄자국은 결정적인 증거자료가 됩니다" 이곳에서 연행된 연행자도 1000여명에 육박했다. "경찰서에 사람들은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니까 마산시 소재의 각 파출소에 시민들을 분산 수용했어요. 그래도 안되는 사람들은 마산역에 구금을 했죠. 잡혀간 사람들은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고개만 들어도 경찰들의 곤봉이 사방에서 날아오고,경찰서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반죽음이 되어서 나왔죠."

 3.15의 해가 점점 저물어 갔다. 경찰은 재빠르게 상황을 수습해 갔다. "시위가 끝난 이후 마산은 '유령도시' 같았어요" 백 회장은 의거 직후 마산의 모습을 그렇게 회상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경찰서에 가두다가 풀어주는데, 국가가 3.15를 '공산당의 사주로 일어난 사건'으로 몰아붙이고 이 사람들을 공산당, 빨갱이로 몰아붙였어요. 이런 취급을 받으면 연좌제 때문에 사돈의 팔촌까지 취업도 못하는 비극이 벌어지게 돼요. 겁을 먹은 사람들은 숨어서 밖에 나오질 않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멀리 이사를 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날 시위하러 나갔다가 다친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발각될까봐 병원에도 못갔죠. 그러다가 사람들이 서로를 겁내게 되어버리고 사람들 간의 왕래도 급격하게 뜸해졌죠. 4월 11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떠들썩하던 도시가 유령도시처럼 정말 조용한 동네가 되어 버렸습니다"

- 다음 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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