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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나를 걷는 시간

보슬보슬, 이른 봄비가 내리던 3월의 일요일 아침 나는 오랜만에 성당에 다녀왔다. 7년 동안 발길을 끊었던 그 곳에 갑자기 발을 들이게 된 이유는 ‘달라진 성당을 보고 싶다’라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전날 버스 안에서 본 성당의 모습이 7년 전의 내 기억과는 많이 달라졌던 것이다.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성당을 찾아준 나를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그 날의 교리는 함께 온 가족 중 부모가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 행위가 너무 종교적인 모습 같아 주춤거리기도 했다) 곧이어 시작된 교리의 주제는 ‘부모가 자녀에게 갖춰야 할 태도’였는데, 주로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교리가 끝나고, 기도와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너무 오랜만에 갔던지라 1시간 정도의 미사 시간이 점점 지루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기도의 놀라운 점이 나를 다시 집중하게 만들었다. 기도의 내용 중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단 한 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최근 큰 사건이 많았던 세계의 대도시를 위한 기도,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기도, 이제 막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을 위한 기도 등등…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내가 속한 곳이 아니라도 다른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7년 전까지 나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의무적으로 다닌 성당이었기에 신앙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종종 신앙심이 깊은 친구들과 사귀게 되면 주말에 같이 놀 수가 없었는데, 어린마음에 종교에 친구를 빼앗겼단 생각이 들어 종교에 대한 거부감까지 생겼다. (사실 아주 사소한 이유라 창피하지만, 그 나이에 주말에 친구와 노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지 않나! 그 외에도 많은 경험에 의해 생긴 거부감이니 비난은 삼가주길 바란다) 또한 종교인은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그들의 기도 내용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웠던 점은 내가 잘 몰랐다는 점이었다. 짧았지만 종교생활을 몇 년 동안 했던 내가 그들이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금도 몰랐다니 한마디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고, 그들이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에 대해서 들을 생각도 없었다. 바로 나의 이러한 태도가 종교인들에 대한 거부감과 오해를 더욱 증폭시켜온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태도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남의 입장을 배려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 자부했었지만 진정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가짐을 가지진 못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이라면 ‘이 글쓴이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으려 하겠지. 불 보듯 뻔한 스토리 아니겠어?’라며 혀를 찰 것이다. 그러나 성당을 다녀온 뒤에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배려심이 급작스럽게 증가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절대 아니다. 그저 나의 태도에 반성했다는 점에서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글로 옮겼을 뿐이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면 나는 자신에게 뿌듯한 글을 쓴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내가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도 상대방에 대한 호감보다 오해와 비호감을 먼저 쌓진 않았는지’,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언행으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한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하진 않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되돌아보자. 당신이 스스로를 뒤돌아봤을 때, 나와 같은 반성을 하고 있게 될지 몹시 궁금해진다.               

한소희/사회과학대·신문방송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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