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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회 창원대문학상/소설 장려-그날 이후

그날 이후

 

감 경환/ 행정학과 2학년

 

1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방금 탄 믹스커피 한 잔도 비일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이컵은 이로 물어뜯었던지 여기저기 이빨자국이 나 있었고, 책상 위에는 악질 범죄자들의 신상정보가 적힌 각종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최 반장은 전날 밤에도 잠을 설쳤는지 눈을 문지르며 피곤을 달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강남경찰서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최 반장에게로 달려왔다. 달려온 사람은 부산스럽게 숨을 헐떡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최 반장님!! 유경태가 잡혔답니다. 지금 경찰청에 소환 되서 조사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 그런데 말입니다...”

근무하고 있던 경찰들은 멈칫하며 서 내에 울리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말을 꺼낸 사람은 평소 최 반장을 잘 따르는 이경환 순경이다. 최근 5명의 남자를 살해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범 유경태가 잡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말문이 막힌 것을 본 최 반장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무슨 일이야.”

최 반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놈이 제 발로 검찰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몇 달을 저희 경찰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수색을 했음에도 못 찾은 놈이 말입니다.”

유경태를 잡기 위해 서울 시내를 얼마나 이 잡듯 돌아다녔던가. 강 건너 강북경찰서에까지 지원요청을 해가며 놈을 수색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놈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지 못했던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놈은 검찰로 제 발로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상한 것은 왜 그놈이 직접 검찰로 찾아와서 자수를 했다는 것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지금까지 놈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남자 5명인데 마지막 5번째 남성이 살해되었다는 신고가 바로 어제 접수되었었다. 덕분에 어젯밤도 강남경찰서의 형사들은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놈을 잡기 위해 한바탕 난리를 친 모양이었다. 서 내에서 꽤나 입지가 컸기에 다른 형사들과 마찬가지로 피곤에 절어있었던 최 반장이었지만, 현재 검찰청에 유경태가 있다는 소식에 의자에 걸쳐 놓은 점퍼를 들고 급하게 서를 나섰다.

“일단 지금 검찰로 가서 확인해 보자. 지금쯤이면 놈이 취조 받고 있을 거야.”

“네 반장님, 지금 바로 차를 대기시켜놓겠습니다.”

이 순경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은 순간부터 검찰청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최 반장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그놈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인가. 애초에 계획된 살인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누명이 씌어 누명을 풀기 위해 찾아온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어느덧 검찰청 앞에 차는 도착해있었다. 역시나 연쇄살인범이 검찰에 제 발로 찾아왔다는 소식이 벌써 퍼진 모양이다. 검찰청 앞에는 기자들이 몰려 서있었다. 게 중에는 우리나라 3대 공중파 방송사는 물론이고 듣도 보도 못한 케이블 채널 방송사의 기자들도 제법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검찰청 입구에서 하나의 특종이라도 더 잡기 위해 태세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하이에나와도 같았고 최 반장과 이순경은 그런 기자들을 옆으로 밀어가며 검찰청 안으로 힘겹게 들어갈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강남경찰서의 최상준 경위입니다. 지금 유경태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까요.”

딱 봐도 인정미 하나 없어 보이는 검찰청의 한 직원은 최 반장을 위에서 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허름한 청바지, 색이 바라고 여기저기 흠집이 난 점퍼는 어느 누가 봐도 경멸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였다. 기분이 상한 최 반장은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우선 중요한건 유 경태를 보러 가는 것이기에 화를 참아야만 했다.

“죄송하지만, 관계자 이외에는 출입할 수 없으십니다. 아마 강남경찰서장님이 오셔도 마찬가지일걸요?”

역시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이해가 가는 것이 범인은 연쇄살인범이지 않은가. 만약에 있을 모든 상황을 대비하고 철저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물러설 최 반장이 아니었다. 그는 점퍼 속에 아내 몰래 비자금으로 숨겨둔 봉투를 꺼내들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이거 챙겨두십쇼. 바쁘실 텐데 몸보신이라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거 참, 이러면 안 되는 것 알면서 이러신다. 참... 일단 따라오십쇼.”

역시 한국에서는 돈으로 안 될 것이 없었다. 사실 경찰들 사이에서도 돈으로 작은 범죄를 눈감아주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최 반장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 직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얼마쯤 올라갔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복도 끝에는 문이 하나 보였는데, 그 앞에도 보초로 보이는 남자들이 서 있었다. 정말 무섭도록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는 검찰이었다. 새삼 최 반장의 마음속에서는 긴장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이제 잠시 후면 그토록 직접 잡고 싶었던 유경태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옆을 보자 이 순경은 이미 표정이 굳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기에 당연한 것이리라. 그렇게 말없이 엘리베이터로부터 복도로 걸어가던 세 남자는 드디어 취조실로 보이는 방문 앞에 도착했다. 검찰청 직원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최 반장과 이 순경은 잠시 후 다시 나온 그의 안내를 받으며 취조실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2

햇살이 밝게 내려쬐고 있는 어느 가을 오후, 희정은 자신 앞에 놓인 빵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내의 작은 복지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간식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고 하나 둘씩 아이들이 복지시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주로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은 지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거나 그와 비슷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여중생 또는 여고생들인데,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상담을 해주며 많은 노력을 해온 그녀였다. 사실 그녀 또한 어린 시절 똑같은 상처를 경험했기에 누구보다 그들을 잘 이해 할 수 있었다. 불현 듯 그녀는 과거를 회상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낡아 비틀어진 문짝, 깨어져 버린 창문, 그리고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허름한 창고에서 끔찍한 일을 겪고 만 것이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의 순결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었다. 꽤 시간이 지남에도 그때 그 상처는 밤마다 희정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그러다 문득 한 복지시설을 찾아 상담을 받을 수 있었고 상담사의 노력으로 희정은 점점 상처를 회복해 갈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계기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위해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현재 조그만 복지시설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희정의 그런 배경 때문이었을까, 처음에는 대인기피증을 호소하며 그녀를 멀리 하던 아이들도 희정을 점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희정의 노력에 더해 그녀의 밝은 성격도 한 몫 했으리라. 평소 남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는 그녀는 복지시설의 다른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언니, 오늘은 어떤 간식이에요?”

“오늘은 빵이란다 다정아. 너희 맛있는 빵 챙겨주려고 언니가 힘 좀 썼지!”

“역시 언니가 최고야. 언니 항상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다정아. 하나 더 챙겨줄 테니 나중에 할머니도 하나 갖다드려. 할머니 배고프시겠다.”

다정이는 할머니도 챙겨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는지 펄쩍 뛰며 좋아했다. 희정은 그런 다정이를 보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으로 상담을 해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다정이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이인데, 바로 옆집에 사는 아저씨에 의해 큰 상처를 받은 아이다. 항상 자신을 예뻐하던 옆집 아저씨의 감언이설로 아저씨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갑자기 방문을 잠그던 아저씨가 돌변해 다정이를 성폭행 해버렸던 일이 있었다. 그 후 복지시설에서 희정과 오랜 시간 상담을 하며 다시금 활기를 되찾은 아이다. 희정은 그런 다정이가 너무 안쓰러워 복지시설 선생님이 아닌 친언니같은 사람이 되어주려 노력했었고 그 노력이 열매를 잘 맺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이 이미 간식을 다 먹고 각자 교실에 모두 모여 있었다. 아이들이 어지럽히고 지나간 곳을 정리 하고난 후 희정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복지시설 내 휴게실에서 다른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의 대화 소리로 인해 신경이 쓰였던 희정은 무슨 일인가 싶어 휴게실로 가보기로 했다. 희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여선생님의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휴게실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텔레비전을 보며 다급한 어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유경태가 제 발로 검찰을 찾아와 자수를 했다고?”

“세상이 점점 미쳐가요. 사람을 5명이나 죽인 놈이 무슨 낯짝으로 자수를 해.. 그래도 이제 좀 안심하고 살 수 있겠어요.”

두 선생은 유경태 소식을 다루고 있는 뉴스속보를 보며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게실 내의 작은 바보상자 안에서는 유경태의 사진과 함께 밑으로는 ‘유경태 자수’라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희정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업무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두 여선생님의 대화소리가 시끄러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3

“한번 만 더 묻겠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

“지금 경태씨가 아무 말도 안하게 되면 결국 무기징역이나 사형밖에 방법이 없어요. 지금 범죄자의 인권이다 뭐니 해서 사형제도가 잠정 중지상태지만 당신은 5명이나 죽인 연쇄살인자입니다. 여차하면 당신으로 인해 사형제도가 다시 부활해 당신이 사형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동기로 살인을 저질렀습니까?”

“...”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취조실 안은 싸늘한 분위기로 맴돌고 있었다. 유경태는 손이 수갑에 묶인 채 땅만 보고 있었다. 유경태 앞의 노민규 검사는 이미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듯했지만 유경태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시체가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꿈쩍 않았다.

“좋습니다. 검찰청장님께 말씀드려서 빠른 시일 내에 법정 판결을 받도록 해드리지요. 그때 가서 후회하셔봤자 소용없을 겁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걸 다 끝냈으니 편안하게 쉬고 싶군요.”

뜻밖이었다. 유경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껏 봐왔던 살인자들의 대답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것이라고 최 반장은 생각했다. 그의 어투에서는 다른 범죄자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최 반장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아무런 죄책감이 없으신 분이군요. 그냥 이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으신 겁니까?”

“...”

“알겠습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이번 법정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검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후로 법정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는 건 아시죠?”

노 검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소 검찰청 내에서도 법정에서 절대 지지 않는 유능한 검사라는 명성을 가진 그는 많은 신입검사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만간 최연소 부장검사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성과가 좋은 그였다. 결국 유경태는 그렇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최 반장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유경태가 숨을 들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말이죠. 그냥 할 일을 다 했을 뿐이고 이 거지같은 세상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쉬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당했다. 5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했다. 이때껏 형사과에서 많은 범죄자들을 상대해온 최 반장 이지만, 저렇게 편안해 보이고 당당한 범죄자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죄책감이 전혀 없거니와, 오히려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는 언변은 취조실 내에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하여금 충격을 머금게 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유경태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슬픔이 가득 차 있고 세상을 경멸하며 살아온 것 같은 아픔이 배여 있는 표정이었다. 그의 범행에는 어떤 동기가 자리 잡혀 있을까.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최 반장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동기를 전혀 말하지 않는 유경태에게서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였고 앞으로의 수사가 꽤나 어렵게 진행 될 것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때였다. 유경태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단지 희생을 했을 뿐입니다. 저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했을 뿐입니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유경태는 다시 입을 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유경태의 말이 끝나고 이미 화가 날대로 나있었던 노 검사는 취조실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렇게 취조실 안은 침묵으로 휩싸이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유경태는 한 건장한 남자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끌려가는 와중에 보인 그의 표정은 매우 침울해 보였다. 최 반장은 유경태가 말한 ‘희생’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 반장의 뇌리에 하나의 확실한 촉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유경태의 살인은 단순 동기가 아닌 어떤 특별한 이유에서 귀착되었다는 것.

 

그날 저녁, 이경환 순경과 함께 서로 돌아온 최 반장은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까지 자리에 앉아 꼼짝 않고 있었다. 이미 다른 형사들은 퇴근을 했고 형사과 안은 조용한 침묵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지켜보고 있던 이 순경이 최 반장 옆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최 반장님, 이미 밤이 늦었습니다. 일단은 퇴근하시고 내일 다시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떠세요?”

이 순경이 말을 걸었음에도 최 반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취조실에서 봤던 유경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아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정적 안에서 최 반장이 말을 꺼냈다.

“이 순경, 먼저 퇴근해. 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천천히 퇴근할게.”

“혹시 아까 유경태가 말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시나보군요.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어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지.”

이 순경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항상 최 반장이 범죄자들을 대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자리만 지키던 그였는데, 다른 범죄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았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네. 그런 놈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 근데 이 순경, 자네가 보기에는 그놈이 어떤 동기로 살인을 저질렀을 것 같아? 그리고 마지막에 말했던 ‘희생’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음.. 전혀 감이 안 잡힙니다. 하필 노 검사가 자리를 뜬 후 어디론가 끌려가는 바람에 그놈에게서 더 이상의 말은 듣지도 못했으니 궁금증만 남기고 돌아오게 되어버렸네요.”

“내가 보기엔 분명히 뭔가 있어. 그놈의 살인동기가 이번 사건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해. 단순히 돈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살인은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군.”

“그렇습니까. 확실히 경험 많으신 최 반장님은 뭔가 다르십니다. 저는 도저히 감을 못 잡겠는데 벌써부터 그런 생각까지 하시군요.”

순경부터 시작해 형사과 반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라오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던가. 그 과정에서 많은 범죄자들을 대해왔고 그런 업무 성격상 일종의 촉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수사 쪽으로는 꽤나 성과를 보여 왔던 그였다.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사건도 그의 손을 거치면 웬만큼 해결되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번 사건은 그리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일단 그놈의 지인들을 조사해봐야겠어. 분명 뭔가 단서가 나올 거야. 이 순경, 지금부터 바로 유경태가 쓰던 핸드폰 통화 기록을 조사해봐.”

“알겠습니다, 반장님.”

그렇게 조사에 착수하던 두 형사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밤 열시가 되었을 무렵, 이 순경이 입을 열었다.

“반장님, 최근에 유경태와 연락을 취한 사람이 딱 한명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범죄자 놈과 연락을 하며 지냈다고는 상상이 안갈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노력 끝에 드디어 수사에 진전이 보이는 듯 했다. 최 반장은 이 순경이 말한 그 한 사람이 이번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직감했고 그 사람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검색했다. 잠시 후 최 반장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그녀의 것으로 짐작 가는 자세한 신상정보가 뜨기 시작했다.

 

4

유경태가 검찰에 자수한 이후 시간이 꽤 흘렀다. 가로수에서는 이미 낙엽이 모두 떨어졌고 겨울추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을 점점 동여매도록 만들었다. 뉴스에서는 오늘 첫 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와 함께 첫 소식은 여김 없이 유경태의 자수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공중파로 전해졌다. 희정은 아침 일찍 출근해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고 따뜻한 모닝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이희정씨 계십니까?”

사무실문이 열리고 난 후 문 옆에 서서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긴장한 희정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세요?”

“강남경찰서에서 온 최상준 경위라고 합니다. 잠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경찰이라는 소리에 겁을 먹은듯한 희정은 복지시설 휴게실로 최 반장을 안내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거죠?”

희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 반장은 행여나 희정이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을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유경태가 최근 자진하여 검찰로 온 소식은 들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유 경태에 관해서 조사를 하고 있던 중, 희정씨가 얼마 전까지 유 경태와 연락을 취했던 기록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유 경태와는 어떤 사이되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희정은 당황했다. 다짜고짜 경찰이 찾아 온 것에도 모자라 그 경찰이 어릴 적 친구였던 경태와의 사이를 묻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않던 희정은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경태와는 어릴 적부터 친구 사이였어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였는데, 그 아이는 항상 다른 친구들한테 괴롭힘을 받았었죠.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고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안 계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아버지도 막노동을 하시다 크게 다치셔서 돌아가셨었죠. 그런 경태가 불쌍해서 제가 자주 도와주었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 하면서 경태로부터 돌연 연락이 끊겨버렸어요. 결국 시간은 흘렀고 우린 어른이 되었는데 경태로부터 얼마 전에 연락이 한번 왔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희정이 말을 끊자 최 반장은 이상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며 희정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최 반장의 눈치를 살피던 희정은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잘 지내고 있냐고, 어릴 적에 자신을 도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뭐 그런 말만 몇 마디 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끊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경태와는 다시 연락이 끊어졌고 제게 연락을 취하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그 친구가 뉴스에서 살인범이라고 보도가 되서 많이 놀랐었어요. 하지만 복지시설에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쓸 겨를이 없었죠. 형사님께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더 이상은 저도 잘 모르는 일이에요...”

한참을 듣고 있던 최 반장은 골똘히 생각하다 희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유경태는 집안도 좋지 않고 어릴 적부터 괴롭힘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최 반장은 무언가 조금씩 감이 잡히는 듯 했다. 결국 유경태도 어릴 적부터 반사회적인 감정을 가진 괴물이 되어 소위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 하나. 희정이 말했듯이 유경태가 얼마 전 희정에게 연락을 취하고 얼마 안 있어 그러한 연쇄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인데,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 왜 희정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던 것인가. 갑자기 잘 지내냐는 말, 도와줘서 고마웠었다는 말 등 여전히 찝찝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까 유경태와 중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 연락이 끊어졌다고 하셨는데, 얼마전 연락이 온 것 말고는 이전에 한 번도 유경태와 연락을 했다거나 만났던 적이 없으신 겁니까?”

“네.. 한 번도 없어요.”

도무지 이상했다. 어떤 비밀이 있는데 계속 숨기는 것 같은 희정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분명 둘 사이에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혹시나 수사방향이 더 진전을 보이게 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최 반장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의 수확은 아니었기 때문에 경과를 좀 더 지켜보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희정에게 인사를 한 후 복지시설을 나섰다. 밖에서는 기상예보가 들어맞았는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눈발은 점점 굵어졌고 세상은 눈으로 인해 하얗게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본 최 반장은 희정이 건물 안쪽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검찰 취조실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유경태의 그것과 같이 침울해 보였다.

 

 

희정과의 만남을 마치고 최 반장은 오후가 돼서야 서로 돌아왔다. 서로 돌아온 최 반장은 피로를 달래기 위해 커피 한잔을 하고자 종이컵에 믹스커피 한 봉을 뜯어 집어넣고 있었다. 유경태 사건 이후 항상 잠을 설쳐왔던 그였기에 틈틈이 커피 한 잔을 먹으며 피로를 달래를 방법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였다. 더군다나 유경태가 검찰에 자수한 지 한 달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수사는 제자리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은 유경태 사건의 법정 공방전이 있는 날이었다. 부디 최악의 상황만은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최 반장은 생각했다. 바로 그때 어딘가를 갔다 왔는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던진 이 순경이 천천히 최 반장에게 다가왔다.

“반장님,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최 반장은 불안했다. 사람의 표정만 봐도 어떤 말이 나올까 짐작을 잘 하던 그였는데, 마침 이 순경의 표정이 굳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최 반장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법정에서 유경태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형 집행 날짜가 당장 모레로 잡혔답니다.”

아직 유경태 사건의 실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현 시점에 벌써 사형 집행이 내려지다니, 최 반장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최 반장을 보고 있던 이 순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유경태가 말입니다. 저희가 취조실에서 봤던 그날 이후로도 계속 아무 말을 안했다고 합니다. 결국 국선 변호사도 유경태를 변호해줄 수 있는 반론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고 그대로 노민규 검사가 승소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서울남부교도소로 이송되어 집행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듣고 있던 최 반장은 급하게 서를 나서기 시작했다. 이 순경에게 서에 남아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택시를 잡아 서울남부교도소로 이동했다. 택시 안에서 최 반장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밖에 쌓여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결코 아름답다고 느낄 여유가 없었다. 최 반장은 유경태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서울남부교도소에 도착한 최 반장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유경태와의 면회를 신청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파란 죄수복을 입은 유경태가 간수의 감시를 받으며 힘없이 면회실로 들어섰다. 투명한 아크릴판 너머로 보이는 유경태의 표정은 죽음에 달관한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오히려 검찰청 취조실에서 봤던 표정보다 지금이 더 편해보였다. 잠시 후 유경태가 의자에 앉자마자 최 반장은 바로 질문을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강남경찰서의 최상준 경위입니다. 하나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혹시 이희정씨를 아십니까?”

순간 유경태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다소 놀랐는지 눈을 부릅뜨며 최 반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제가 이희정씨를 만나봤는데, 두 분이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가 연락이 끊겼고 얼마 전에 경태씨가 희정씨에게 연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최 반장을 여전히 쳐다보기만 할 뿐, 유경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최 반장은 그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희정이는... 아무 잘못이 없소. 모두 내가 저지른 짓이니 그 친구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어떤 이유로 그 5명을 죽였는지 당신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이번 일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이니 그냥 조용히 끝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바람입니다.”

이 말을 남긴 채 유경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면회실 밖을 나갔다. 간수와 함께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모든 것을 단념한 듯 했고 최 반장은 그런 유경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최 반장은 더 이상 자신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교도소를 빠져 나온 그는 한숨을 쉬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독방으로 돌아온 경태는 자그마한 창살 사이로 눈이 내리는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싸늘한 분위기만이 경태가 있는 독방을 감싸고 있었다. 창살 사이로 겨우 보이는 눈은 세상을 잡아 먹을듯한 기세로 내리고 있었고 경태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고독에 잠겨 있었다. 이제 이 세상과도 이별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경태는 왼손에 꼭 쥔 숨겨두었던 엽서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되었는지 누렇게 변색된 엽서는 마치 경태의 마음과도 같았다. 엽서를 내려다보던 경태는 문득 한 사람이 생각이 났고 결국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러다 경태는 정신병자처럼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독방을 지키고 있던 간수는 경태의 이상한 행동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뭐야, 저 자식. 내일 사형을 당한다는 생각에 미친 건가.’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자정이 훌쩍 넘은 새벽이 찾아왔을 무렵, 울다 지친 경태는 힘겹게 달빛에 의존하며 숨겨두었던 펜을 들어 편지지 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법 눈이 내리는 서울 시내는 저녁이 되자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도 인해 소란스러웠다. 광화문 거리에서는 오케스트라의 퍼레이드가 진행 중이었고 연말을 마무리하기 위한 여러 가족과 연인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희정이 근무하는 복지시설에서도 조촐하게나마 트리를 준비하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여고생 아이들과 트리를 꾸미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질 때쯤, 스쿠터 한 대가 복지시설 앞에 멈춰 섰고 스쿠터 위의 한 남자는 희정의 이름을 불렀다.

“이희정씨! 편지 왔습니다.”

우편배달부로 보이는 남자는 희정에게 엽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엽서를 받아든 그녀는 누가 보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디서 누가 보냈는지 전혀 적혀있지 않았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희정은 아이들에게 트리를 마저 꾸미라고 말을 한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엽서를 이리 저리 살피던 그녀는 뒷면에 장문의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고 엽서에는 여기저기 눈물자국으로 보이는 얼룩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희정은 문득 엽서를 보낸 이가 경태라 직감했다. 희정은 당장 복지시설 휴게실로 향했고 문을 잠근 후 엽서를 읽기 시작했다.

‘희정아, 나야. 네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는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뉴스에서 내가 살인범이라고 나왔을 때 네가 얼마나 놀랐을 지는 상상이 간다. 그런데 내가 죽인 그 5명이 누구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거야. 난 항상 그 5명에게 복수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어. 어릴 적 날 항상 괴롭히던 그 5명이 네가 내 친구란 걸 알고 난 후부터 너에게 계속 찝쩍거렸단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너와 연락을 끊고 지내며 그놈들이 너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내 예상과는 반대로 중학생 때 그놈들이 너를 창고에 끌고 가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남겼더구나. 그놈들은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너를 겁탈했던 경험을 나에게 노골적으로 얘기했었어.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괴물이 생겼어. 유일하게 날 친구로 대해줬던 너에게 상처를 남긴 그놈들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너를 대신해 내가 복수를 하게 됐어. 미안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항상 고마웠던 널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니깐. 이제 더 이상은 너에게 상처를 줬던 놈들이 이 세상에서 너와 함께 숨 쉬고 있지 않으니깐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많이 비겁할지라도 너만 행복하다면 상관없어. 부디 잘 살아줘.’

편지를 읽은 후 자신을 위해 경태가 목숨 바쳤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 희정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경태가 왜 살인을 저지르기 전 자신에게 연락을 취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이유로 불현듯 남자 5명을 죽였는지. 최 반장이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에도 그러한 정황을 알리지 않았던 이유는 경태의 은밀하고 거룩한 희생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결국 엽서는 희정의 눈물로 조금씩 얼룩지어져가고 있었고 그녀는 주저앉은 채 오열했다. 하지만 복지시설 관내는 징글벨 캐럴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고,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인해 아무도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늘 높이 떠있는 희미한 달만이 창문 사이로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은 더 많은 눈송이를 밑으로 내려 보냈고 세상은 하얗게 뒤덮인 채 조용히 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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