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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창원대문학상 소설 당선-안녕, 언젠가
 

이영빈/인문대 철학과 1년


“5400원입니다.”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건넨 첫 마디였다.

노곤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내가 늘 하는 행동은 오늘 하루 쌓인 피곤을 떨치기 위해 술잔을 드는 것도 아니요, 남들처럼 애인에게 오늘 속상했던 일을 털어 놓으며 칭얼대는 것도 아닌, 직장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는 것. 사는 물건은 언제나 같다. 바나나 우유 하나, 갑자 칩 한 봉지, 그리고 고단한 하루에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줄 암 덩어리 하나. 이 무슨 조화냐며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만. 난 매일 매일 쌓여가는, 후에 ‘과거’가 되어버릴 오늘을 이 3가지로나마 위로한다. 내 직업은 바리스타. 하루에도 수백 잔이 넘는 커피를 만들어 많은 이들을 따뜻한 커피로 위로해주지만 애석하게도 정작 내 자신에겐 5400원 어치로 퉁치고 있는 것이다.

“에쎄 라이트 한 갑도 같이 계산 해주세요.”

“5400원입니다.”

말없이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매일 이 편의점에 와서 똑같은 물건만을 사 간지도 1년이 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똑같은 물건은 아니다. 그 동안 과자와 담배 종류가 몇 번 바뀌었다. 처음 담배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겉멋으로. 겉멋으로 피는 아이들의 99%가 그렇듯, 나 또한 가장 쎈 말보루 레드를 폈었다. 하지만 곧 내 몸으론 소화해낼 수 없음을 깨닫고 무엇을 필까 싶어 진열된 담배를 멍청히 쳐다보다 선택한 게 에쎄(ESSE)였다. 순전히 이름 때문이다. 에쎄는 존재, 실제를 뜻한다. 도대체 나란 인간의 정체성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럽던 나에게 이놈이 답을 줄 것만 같았다. 답을 주기는커녕, 내 건강을 좀 먹고 있긴 하지만. 무튼 매일 얼굴도장을 찍는 탓에 알바생과 꽤 친해졌었는데, 그 알바생과는 다른 사람이 내 물건을 봉지에 주섬주섬 담고 있다. 나보다 적어도 10cm는 작아 보이는 키에 앳된 얼굴, 서투른 바코드 질. 딱 봐도 신입이다. 그녀의 앳된 얼굴과 어울리게 등에 난 여드름보다 작은 것 같은 가슴에는 명찰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강햇살]. 햇살 중에서도 강한 햇살? 피식 웃음이 났다. 강한 햇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알바생은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제품을 사가는 사람이 이상하다 생각됐는지 나를 잠깐 쳐다보고는 신입인 티가 팍팍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사인해 주세요.”

나는 서명란에 내 이름 대신 ‘신입이야?’라는 물음을 적었다. 모니터를 통해 서명을 확인한 그녀는 적잖이 놀란 눈치다.

“네?”

“원래 하나가 일했었는데…… 관뒀어?”

“아…… 네, 하, 하나 언니 관뒀어요. 아는 사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여기 단골이라. 그럼 그 쪽……”

나는 이미 그녀의 이름을 몰래 봤음에도, 그녀가 보게끔 과장되게 그녀의 이름표를 확인하는 척 하며 말을 이어갔다.

“강햇살……씨가 이제부터 하나가 일했던 시간에 매일 나오는 건가?”

“네…… 평일 만요.”

“아, 알았어. 그럼.”

봉지를 들고 막 나서려는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저기요……!”

몸을 틀어 그녀를 쳐다봤다.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아마 내 표정에 ‘응?’이라 적혀있었으리라.

“빨대는 안 필요하세요?”

“아…….”

수줍게 내민 햇살이의 손에는 빨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나나 우유는 빨대로 먹어야 맛있어요.”

라는 멘트도 함께. 부끄러움이 많은지 꼭 남자에게 고백하는 것 마냥 어쩔 줄 몰라 한다. 덕분에 내가 지금 빨대를 받은 건지, 고백할 때 주는 장미꽃을 받은 건지 헷갈렸다.

“아…… 고마워.”

살짝 웃어주곤 편의점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강한 바람에 맞서 일회용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낑낑대는 바람에, 그녀가 붉은 홍조를 띄고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도 내가 그녀에게 ‘5400원입니다.’라는 말을 적어도 10번은 넘게 들었을 때였을 거다. 나는 퇴근 후 어김없이 같은 물건을 계산대에 놓곤 체크카드를 꺼내 바닥을 톡톡 찌르고 있었다.

“5400원입니다.”

이로써 11번 째 같은 말을 같은 시간에 듣게 된 건가. 카드를 건네주려고 할 때, 내 행동을 싹 자르는 말이 나에게 날아왔다.

“저기요.”

“어? 나?”

햇살이는 뭔가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눈치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마 어떤 말을 서두로 할 것이며 어떻게 이 상황을 전개해나갈지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수십 번은 더 검토되고 있을 거다.

“왜?”

“저…… 흠! 왜, 왜 자꾸 반말하세요?”

뭔가 굉장히 모진 말을 예상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뻔했다. 고작 저 말을 하려고 내게 같은 말을 10번이나 넘게 할 동안 망설이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나는 내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댔다. 놀란 그녀가 목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아마 입술박치기를 했을지도 모를 거리까지. 순전히 어리버리한 그녀를 놀리기 위함이었다.

“그 얼굴로…… 나보다 나이 많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뭐, 뭐라구요? 나이가 마, 많으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 뭐냐, 반말해도 되는 거예요?!”

애써 당당한 척 말을 뱉는 그녀. 하지만 애석하게도 개미보다 작은, 그것도 지진이 난 것처럼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 귀에 꽂혔다. 나는 계속 얼굴을 들이민 채 실실 웃으며 빈정댔다.

“우리 매일 보잖아? 설마 햇살이는 안면 인식 장애가 있는 건가? 그래서 매일 내 얼굴이 처음 보는 얼굴이야?”

“네?!”

“아님 말고. 매일 보는 얼굴이고 나이도 나보다 확실히 적으니까 반말하지. 그럼 존대하랴? 아, 아니면 아예 그냥 영어로 말해줄까? What's up?"

아연실색한 그녀다. 대꾸할 말이 없는지, 아니면 ‘이 인간이랑 더 상종했다간 내가 미쳐버리겠다.’는 속마음으로 혼자 분을 가라앉히고 있는 건지 씩씩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웃겨서 계속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혼자 웃었다. 햇살이는 그 꼴에 더 화가 났나 보다.

“웃겨요?!”

“아니.”

“그럼 왜 자꾸 사람 얼굴보고 웃어요? 기분 나쁘게.”

“어른한테 기어오르는 게 귀여워서 그런다. 왜? 불만 있냐?”

‘귀엽다’는 기습공격을 당한 그녀가 자기 이름에 걸 맞는 얼굴색을 띄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포커페이스다. 때문에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그녀가 웃겨서 혼자 하하하 웃었다. 오랜 흡연기간 탓에 내 웃음소리는 여대생들의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보단, 장기판에서 이긴 후 껄껄 거리는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에 더 가까웠다. 걸걸거리는 목소리로 웃고 있는데 갑자기 편의점 문이 열리며 남자 한 명이 뛰어 들어 왔다.

“햇살아! 미안. 오빠가 좀 늦었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벙쪄 있던 표정을 풀곤 반갑게 그 남자를 맞이했다.

“아, 현수오빠……. 아녜요. 아직 5분밖에 안 지났어요.”

보아하니 현수라는 작자는 야간 타임 알바인 것 같았다. 교대하는 시간이 오후 10시인가 보네. 딱 내 퇴근시간이군. 둘이 이러쿵저러쿵 나누는 대화를 들을 이유가 없던 나는 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새로 산 담배 곽을 열고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쓰으으읍- 백 날 천 날 시음하는 에스프레소보다 더 쓴 연기를 마시며 올려다 본 하늘. 온 거리를 뒤덮고 있는 전신줄 때문에 온전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전신줄 사이사이로 희미하게 별들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별을 가둔 감옥 같기도 했다. 옥황상제님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볼 때면 꼭 검은 실로 뜨개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리라. 혼자 담배를 물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등 뒤로 햇살이가 걸어왔다. 그녀는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날 도끼눈으로 한 번 쳐다보더니 제 갈 길을 갔다. 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얼마 안 가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다가왔는데, 딱 봐도 폰팔이였다. 이 지역은 폰팔이가 아주 끈질기고 극성이기로 유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쉽게 내치지 못하는 성격의 그녀는 폰팔이를 떨쳐내지 못해 몹시 곤란한 듯 했다. 나는 필터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예쁜 아가씨! 그러지 말고 가게에 들어와서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봐요. 네?”

“아…… 저 폰 바꾼 지 얼마 안 돼서요. 죄송합니다…….”

“에이, 누가 사라나? 그냥 구경만 해요, 구경만!”

그녀의 팔을 잡고 놓지 않는 폰팔이의 손을 낚아챘다. 내 등장에 그녀는 놀람과 안도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 아가씨가 필요 없다잖아.”

“아니, 당신은 누군데……”

그 남자는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년’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며 내게 잡힌 팔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휘핑크림 기계가 없는 우리 카페에서 매일 휘핑크림을 만들어 내던 내가 아닌가. 기계를 쓰지 않고 휘핑크림을 만들려면 크림을 미친 듯이 흔들어야 한다. 덕분에 나의 악력은 웬만한 악력기는 가뿐히 제압하는 수준이 되었다. 생각보다 팔이 쉽게 빠져나오지 않자 그 남자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나의 더러운 인상과 담배로 인해 걸걸해진 목소리도 그 남자의 기를 죽이는 데 한 몫 한 듯싶다.

“폰 안 살 거니까, 가라고.”

내가 손을 놓자 그는 혼자 씩씩대며 다른 미끼를 찾으러 갔다. 그가 멸치여서 망정이지, 덩치까지 컸으면 나도 건들지 못했을거다.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났다. 이 지역 폰팔이는 진짜 답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놈들이니. 이럴 때면 포커페이스인 내 자신에게 몹시도 감사하다. 나는 손을 툴툴 털고 그녀에게 브이자를 그렸다. 남자를 쫓아내곤 무표정으로 브이를 하는 내 꼴이 우스웠는지, 그녀는 얼굴에서 두려움을 거두고 웃음꽃을 피웠다. 예뻤다. 그 미소가.

“진짜 감사합니다!”

길거리인데도 그녀는 내게 90도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직업병인지, 원래 심성이 착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았지만 괜히 머쓱하기도 해서 난 손 사레를 쳤다.

“됐어. 별 일도 아닌데, 뭘. 가자.”

“네? 가다니…… 어딜?”

“지금 집 가는 길 아니야?”

“맞는데……”

“그래, 그러니까 가자고.”

“네?”

“아, 거 참. 젊은 아가씨가 귀가 먹었나. 이 골목길로 가려던 거 맞지? 나도 집이 이 쪽이니까 무서운 골목길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가자고.”

햇살이는 그제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활짝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알바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 퍽이나 무서웠나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아프지 않게 한 대 쥐어박았다. 왜 때리냐며 쏘아붙이지 않을 정도로 내 등장이 고마웠나?……. 난 과장되게 팔을 크게 휘저으며 앞장섰다. 그런 내 뒤를 햇살이가 종종 걸음으로 쫓아 왔다. 그렇게 말없이 5분 쯤 걸었을까. 햇살이가 문득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응?”

“몇 살이세요?”

“삼겹살.”

“………….”

또 도끼눈을 하고 쳐다본다. 원래 이런 눈은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어찌 햇살이가 하니까 그저 귀엽기만 하다. 내 감정에 혼란이 오는 순간이다. 또 오고 만 건가. 망할 놈의 감정…….

“농담이고, 26살이야.”

“아, 저는 22살이에요!”

“오!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네. 잘 부탁한다.”

“정말……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난 정색하면서 삐죽 나온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잡아 늘렸다.

“농담 아닌데.”

“………….”

진지한 내 표정과 말투에 도끼눈이었던 그녀의 눈이 이젠 안경알이 들어갈 만큼 커졌다. 사람 말을 이렇게 잘 믿어서야, 원. 농담도 잘 못하겠구먼. 뭐…… 사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난 표정을 풀고 그녀의 입술을 놓아줬다.

“표정 풀어. 농담이다, 임마. 아, 참! 내 이름은 정한설이다. 편하게 설이 언니라고 불러.”

“정한설……? 남자이름 같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

햇살이는 내 말을 듣곤 내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내가 봐도 난 여자의 모습이라기 보단 남자의 모습에 가까운 것 같다. 묘하게 잘 생긴 얼굴, 왁스로 삐죽삐죽 세워 멋을 낸 짧은 갈색 머리, 여자 치고는 조금 큰 키, 여자들이 흔히 입는 코트 대신 입고 있는 패딩, 그 안에 얼핏 보이는 보라색 체크셔츠, 그 밑엔 검은 색 스키니 진, 구두 대신 신겨 있는 아디다스 운동화. 남자 흉내를 내고 싶다거나, 내가 남자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 그런 족속은 아니다. 난 4남매의 막내라 부모님의 손길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했다. 부모님이 몹시 바빴기 때문에. 부모님의 무관심속에, 난 어릴 때부터 혼자 놀이터에 나가 또래 남자 아이들과 함께 흙장난을 하며 컸다. 초등학교 때도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눈 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바짝 묶은 머리와 동시에 치렁치렁 치마를 입고 오는 대신 최대한 준비에 손이 덜 가는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나풀나풀거리는 치마 계열 옷보단 그냥 다리 두 개만 넣으면 완성되는 바지를 더, 그리고 거치적거리는 긴 머리보단 감고 말리기 편한 짧은 머리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집안 환경이 지금과 달랐다고 해도 긴 머리를 말리는 대신 짧게 자르고 그 시간에 잠을 선택하겠다는 성격상, 내 옷차림이 지금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다. 햇살이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언니 처음 봤을 때 남자인 줄 알았어. 그래서 반할 뻔 했다고요. 매일 오기에 얼마나 좋았는데.”

“반했으면 반한 거지. 반할 뻔 한건 또 뭐야?”

“언니 말투 듣고 완전 확 깼어요. 신사다운 말투면 좀 좋아요?”

“난 여자라서 아쉽게도 신사가 아니랍니다, 아가씨.”

“그런 빈정거리는 말투 고칠 생각 없어요?”

“딱히. 이 말투 좋아하는 사람 은근히 많던걸. 여자 손님들이 끔뻑 넘어 가.”

“손님이요? 혹시…… 바 같은 거 운영하는……”

“레즈 바?”

“네?! 아…… 그게……”

내 외모를 보고 그쪽 계열인지 궁금해졌을 것이고, 손님들이란 말에 더욱 의구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날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반응이라 난 이제 시큰둥하기만 하다. 처음엔 나도 민망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허둥지둥 댔는데, 그런 꼴이 오히려 의심을 증폭시켰더랬다. 자고로 인간이란 종자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마련이니까. 단칼에 의심을 풀어주는 게 해답이라는 걸……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난 깨닫게 되었다.

“괜찮아.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 레즈 바 같은 거 운영 안 해. 그럴 돈도 없고.”

“그럼 손님은 뭐에요?”

“네가 일하는 편의점 맞은편에 별다방 하나 있지?”

“스타 벅스 말하는 거죠?”

“응. 난 거기서 일하는 바리스타야. 이래 뵈도 정직원이라고.”

그녀의 입술이 둥근 모양을 하며 오- 라는 소리를 냈다.

“다음에 한 번 놀러와. 특별히 빵도 대접해주지.”

“빵도 직접 만들어요?”

“아니, 난 커피만. 빵 만드는 놈은 여자 알바생인데, 내가 달라고 하면 줘.”

“그래도 되요?”

“사장은 그 때 없거든.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사장이 와.”

“그 알바생하고 친구에요?”

“아니. 그냥 직장 동료.”

“그런데 달라고 하면 줘요?”

“응. 그 알바생, 나한테 반했거든.”

“아, 그래요?……가 아니고…… 네?!”

지나가듯 하는 말에 그녀가 깜짝 놀란다. 그런 이야기를 뭐 그렇게 무심하게 하냐는 표정이었다.

“진짜에요?!”

“응. 왜?”

“그게 ‘왜?’라고 할 일이에요?”

그녀는 도리어 자기가 화가 난 듯 나를 다그쳤다. 그 알바생에게 감정이입이라도 한 모양이다.

“별 일 아니잖아? 그럼, 뭐, 고백 하나 받은 것 갖고 다큐멘터리라도 촬영하리? 그리고 내가 좋게 거절해서 이제 다 끝난 일이야.”

“다 끝났다면서 빵은 왜 준대요?”

“난 애초에 시작도 안 했으니까. 그 쪽은 아직 미련이 남았나보지. 내가 은근히 치명적이거든. 손님들한테 번호도 많이 따였어. 다 여자라는 게 흠이지만…….”

“여자한테 인기 많아서 좋겠네요.”

그녀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빈정거렸다.

“인기 없이 독수공방 하는 것보단 낫지.”

“참 속편하게 사네요.”

“응. 어차피 골 아프게 사나 진지하게 사나 멍청하게 사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 그럴 거면 속편하게 사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언니는 좀 골 아프게 살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요.”

“뭐? 나한테 골 아플 정도로 맞아 볼래?”

그녀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꽤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15분은 족히 걸어온 것 같은데, 도대체 그녀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버스를 타고 다니든가 안 하고. 왜 춥고 어두운 데 걸어 다니는 거야? 내가 같이 가자고 했으니 화를 낼 수도 없고. 젠장.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만 재촉할 뿐이다.

“아직 많이 남았어? 집이 꽤 머네.”

“이제 5분 쯤 가면 돼요.”

나와는 반대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추워 죽겠다. 여자는 추운 데 오래 있으면 안 되는데.”

“언니도 여자잖아요.”

“그래. 나한테 하는 말이야. 너 때문에 이렇게 추운 데 오래 있으니까 책임지라고.”

“더 이상 대꾸하다간 내가 바보가 되겠어요.”

“햇살이는 집까지 데려다 줄 남자친구도 없어?”

“………….”

순간 조용해졌다. 혹여 이별한 지 얼마 안 된 건가? 실수를 한 건가? 조바심에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감정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머쓱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그, 그러는 언니는요!”

“나? 뭐?”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발끈하기는. 쪼매난 게 밑에서 짹짹대고 있다.

“집까지 같이 가 줄 사람 없어요?”

“있는데.”

“네? 누구요?”

“너. 지금 같이 가고 있잖아.”

“네?! 저는 언니 애인이 아니잖아요!”

“집까지 같이 가 줄 사람 물었지, 애인 있냐고 물어봤어?”

“그, 그게 애인이죠!”

“집까지 같이 가주는 사람이면 애인이야? 그럼 햇살이 애인은 나겠네? 우리 오늘부터 1일인가, 그럼?”

“진짜 짓궂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확실히 말 빨이 딸리는 듯하다. 앞으로 매일 놀려먹어야지. 어느 오피스텔 앞에 다다르자, 드디어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내 손은 진즉에 얼어붙어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다.

“여기에요, 우리 집. 같이 와주셔서 고마워요, 한설언니.”

“아, 됐어. 나도 어차피 가는 길인걸.”

“내일 또 편의점에 5400원어치 사러 올 거죠?”

“아직 담배 반 갑도 못 폈는데. 네가 오라고 하니까 자기 전에 10개비 연속으로 피고 자야겠다.”

내 농담에 그녀가 키득 키득거리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준 후, 그녀가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걸 보곤 다시 발길을 돌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가듯 되돌아갔다.

“우리 집은 편의점에서 위쪽으로 가야 되는데…… 완전 반대 방향이구만! 괜한 오지랖이었어. 에잇!”

혼자 툴툴대며 나는 늦은 밤길을 담배를 친구삼아 홀로 걸어갔다. 많이 걸어 다리도 아프고 추운 겨울 날씨가 온 몸을 얼어붙게 했지만, 내 마음만은…… 햇살처럼 따뜻했다.

“언니, 다 왔어요.”

“어? 아, 그래.”

내가 햇살이를 집까지 바래다 준 게 이제 두 달 남짓 된 것 같다. 그 사이 우리는 퍽 친해져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대학을 휴학한 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던가, 독립심을 키우기 위해 휴학과 동시에 부모님의 도움으로 집을 구해 자취를 한다던가(부모님의 돈으로 집을 구한 게 독립인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신입생 때 동기와 과CC가 되었다가 남자친구의 군대 문제로 1년도 안 돼 이별을 했던 사실들 말이다. 그 뿐인가.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아 자주 연락을 했고, 주말엔 몇 번 만나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가 식사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난 그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땐 체구가 작고, 하는 짓도 귀여워 사랑스러웠었는데. 점점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내가 그녀를 동생처럼 아끼는 마음으로 대하는 건지, 사랑이라는 얄궂은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를 만난 적도 있고, 여자를 만난 적도 있다. 쉽게 말해 양성애자다. 애초에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냥 마음 가는 사람을 만나다보니 남들에게서 이상한 눈초리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더랬다. 그로 인해 여자 친구와 얼마 안 가 헤어지게 되었지만. 동성 애인을 사귀면 이성애인과 다르게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남을 수 있다. 오히려 그냥 친구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이해해주기도 하고. 때문에 나의 옛 여자 친구는 지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 있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났다. 그 때 난 햇살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정 헷갈리면, 직접 확인해봐.’…… ‘확인해봐’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난 오피스텔로 들어가려는 햇살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햇살아!”

“왜요?”

“나 너무 춥다. 너희 집에서 몸만 녹이고 가면 안 될까?”

“네?! 어…… 저희 집이 좀 더러운데…… 음……”

“뭐 어때! 같은 여자끼리. 나 너무 춥다고…….”

난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떠는 시늉을 했다. 햇살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곤 픽 웃더니, 내 손을 잡고 위로 당겼다. 덕분에 내 몸은 팔을 따라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알았으니까, 떼쓰지 말고 들어가요. 설마 이거 애교?”

“시끄러.”

애교라는 말에 괜스레 부끄러워진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그녀의 집을 향해 앞장섰다.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가 그녀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갔지만.

“여기에요. 들어와요.”

햇살이 집은 오피스텔 3층에 위치해 있었다. 혼자 살기에 약간은 넉넉한 편이었으나 둘이 살기엔 모자란 듯했다. 햇살이는 소파에 외투를 벗어 놨지만 난 추워서 그럴 수 없었다.

“으으, 춥다.”

“지금 막 보일러 켰으니까, 곧 따뜻해질 거……”

난 햇살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체구가 작은 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품에 넣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체구다. 지켜주고 싶을 만큼……. 햇살이는 내 행동에 놀란 듯 내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난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나 춥다고. 추울 땐 이렇게 붙어 있으면 금방 따뜻해져.”

내 말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는 햇살이. 난 피식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난 자리에 앉아 햇살이가 만들어 주는 커피를 맛보기 위해 기다렸다. 커피가 다 만들어지는 그 시간동안, 우리 둘 사이엔 미묘한 감정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고, 난 내 감정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맛있네.”

“진짜요? 오- 나 지금 바리스타한테 커피 칭찬 들은 거예요?”

“뻥이다.”

“………….”

구겨진 종이처럼 인상을 구기는 햇살이를 쳐다보며 킥킥거리다 다시 커피 잔을 입에 갖다 댔다. 추운 몸 안에 뜨거운 커피가 흘러가며 마치 신문배달부가 신문을 배달하듯, 곳곳에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언니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이제 알았냐?”

“가끔은…… 언니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그럼 내가 꼬셨을 텐데.”

‘남자였으면’이라는 말이 화살처럼 내 가슴에 박힌다. 느닷없이 5발의 화살을 맞은 꼴이 됐다. 난 씁쓸한 표정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는 척 말을 이어갔으나, 내 심장은 쿵쿵거리는 횟수를 조금 늘렸다.

“왜? 내가 남자친구였으면 좋겠어?”

“음…… 뭐…… 네…….”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어가는 햇살이. 이걸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나랑 사귈까?”

“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에 햇살이보다 내가 더 놀랐다.

“내가 남자친구였으면 좋겠다며?”

“그…… 그렇지만…… 언니는 여자잖아요!”

“여자면 뭐?”

“이,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뭐가 안 되는데?”

“음…… 그러니까……”

그녀의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그녀의 시뻘게진 얼굴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당황스러워서 그런 건지, 보일러를 켠 탓에 약간 더워져서 그런 건진 알 수 없었다.

“넌 날 좋아하고, 뭐…… 나도 너 좋아해. 그럼 된 거 아냐?”

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다시 껴안았다. 뒤통수에 눈이 달려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 토끼눈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겠지.

“사귀자.”

“………….”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들어 내 품을 감싸줬을 뿐이다. 내 말에 대한 긍정의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린 겹쳐진 품속에서 땀이 삐질삐질 날 때까지 난타를 방불케 할 만큼 쿵쾅대고 있는 가슴을 맞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 아니…….”

그녀의 얼굴을 보니 처음 만났던 그 때가 생각났다. 우리가 만남을 지속해 온 지도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3년 동안 우린, 서로의 존재를 몰랐을 때보다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렸을 뿐이다. 우리의 관계는 단지 그 뿐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 우린 함께하던 시간을 단절하기 위해 어느 카페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햇살이는 그 동안 대학에 다시 복학했고, 졸업하여 대기업은 아니지만 취직도 했다. 난 계속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적어도 이만 잔의 커피를 더 만들었으며, 개인 카페를 차릴 자금도 조금 모았다. 우리 둘 사이엔 여느 연인처럼 약간의 스킨십도 오갔었지. 3년이란 세월의 의미는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는 이유는 애정이 식었다기보다는, 마음이 몹시 지쳤기 때문이라고 난 믿는다.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리고 그런 칼날 같은 시선에 나름은 익숙했던 나였지만, 햇살이는 아니었다. 순두부같이 여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생채기가 났을까. 내게 내색 하지 않으려 혼자 마음고생 하느라 수척해진 얼굴을 볼 때면, 그런 시선을 보낸 이들의 눈을 다 찔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남 일에 관심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애초에 우리 관계가 이렇게 끝날 거라는 걸 둘 다 속으로 알고 있었을 거다. 우린 이별이란 종착역을 향해 느리게 가는 완행열차와도 같았으니까. 이번만큼은 핸들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핸들은 돌리기엔 너무나 뻑뻑한 것이어서……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음이 다치고 지치다 보니 자연스레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상대가 우연히 동성이었을 뿐이다. 우린 미친 사람도 아니고, 사탄도 아니다. 여자인 내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내 주위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던가, 가지고 있던 주식이 폭락한다던가 하는 재앙은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우리 엄마는 나 몰래 굿판까지 벌였다고 한다. 나, 참. 귀신이 씌인 게 아니란 말이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였으면 씌였지……. 동성애는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버린 사랑’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다.

“언니…….”

“응.”

“………….”

“………….”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건지 난 안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린 마음에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있는 거겠지. 사랑에 빠지는 건 쉬워도 끝내긴 어렵다. 그게 연인이라는 얄궂은 인연이다.

“다시…….”

“………….”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그래.”

‘끝’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놔두고 빙빙 돌려 말하는 그녀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그동안 고마웠어.”

“언니…….”

“넌 정말 좋은 여자야. 이제 떳떳한 사랑하길 바래. 그동안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휴……. 언니도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진심이야.”

“난 좋은 ‘사람’이지만…… 사람이기 전에 여자니까. 그동안 마음고생 시킨 거 정말 미안하다.”

“왜……!”

약간 화가 난 듯 한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말한다.

“끝까지…… 날 붙잡지 않아요? 왜……!”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걸까……. 힘없이 웃어주곤 커피 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만들었다면 이 커피보다 훨씬 더 맛있었을 텐데.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우린…… 이루어질 수 없어.”

“………….”

“난 설(雪)이고 넌 햇살이잖아. 같이 있다간 내가 녹아버릴 테니까…….”

꾹꾹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그녀를 보니 문득 내 초등학교 때 모습이 생각났다.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었는데. 무릎이 까져서 피도 났지만 남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참았었지. 그 때의 내 모습이 지금 그녀의 모습 같다.

“언니…….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요?”

“돈 드는 것만 아니면 뭐든 들어주지.”

“시간이 지나고, 내가 괜찮아 졌을 때…… 언니를 웃는 얼굴로 반길 수 있을 때…… 언젠간 그렇게 되겠죠? 그럼 그 때…… 한 번만 만나줘요.”

“……그래.”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무작정 발길 닿는 데로 걷다보니 어느새 공원 분수대까지 와 있었다. 편견에 눈이 먼 사람들의 입방아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게 내가 햇살이를 붙잡을 수 없었던 이유다. 내 옆에 있어봤자 상처만 받게 될 테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상처 받아 슬퍼하는 그녀를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화가 났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늦은 밤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던 적이 있었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녀의 말을 아직도 난 잊을 수 없다. ‘밤하늘의 별이 되고 싶어. 그럼 복잡한 생각 따위 다 잊고…… 그냥 밝게…… 밤하늘만 비추고 있으면 되잖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긴 했지만 깜깜하진 않았기에 별이 보이진 않았다. 아까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내가 녹아버릴 운명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내 몸이 녹아 없어질지언정, 함께 하는 시간동안은 너무도 따뜻했었노라고…….

분수대 근처 벤치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하는 순간, 여자 몸에 담배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아냐며 당장 끊으라고 밉지 않게 잔소리 해댔던 그녀 얼굴이 생각났다.

“젠장……. 이참에 금연이나 해보자.”

벤치 옆 쓰레기통에 담배 곽과 라이터를 쑤셔 넣었다. 혼자 우울하게 벤치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는 커플의 말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분수 너무 이쁘지 않아?”

“응. 너만큼 예쁘다.”

오그라드는 멘트를 날리곤 남자는 쑥스러운 듯 먼 곳을 쳐다봤다. 옆에 여자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분수라……. 내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마라’는 말이었다. 자연의 섭리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자연의 섭리를 대놓고 거스르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분수다. 자고로 물이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그런데 분수대는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 올려 건방지게 하늘을 향해 쏘아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면 동성애와 분수대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수를 보곤 하나같이 예쁘다며 칭찬하면서 동성애는 더럽다며 뒷소문을 만들어 낸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실소가 터진다. 그 세상 돌아가는 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내 모습에 더욱 어이없는 웃음이 난다. 햇살이가 그랬다. 왜 자신을 붙잡지 않느냐고. 그 말은, 붙잡았다면 나와 쭉 함께 했을 거라는 얘기라는 건가……. 붙잡아 주지 않았기에 너는 떠나야만 했나. 문득 땅으로 눈을 돌렸을 때 신발 끈이 풀려있는 게 보였다. 신발 끈을 묶기 위해 고개를 숙인 난……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은 것처럼 미친 듯이 눈물이 났다. 가지 말라는, 끝내 내가 전하지 못했던, 전해야만 했던 그 말을 했다면 그녀는 다시금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린 근처 식당에 들러 맛있는 식사를 했을 것이고, 우리 집에서 기나긴 밤을 사랑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과 5분 만에 바뀌어버린 우리들의 미래가 너무나 비참했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시선이 무서워 도망친 것은 애석하게도 내 자신이다. 멍청한 내 머리는 이제야 그걸 인식한 것인가…….

햇살이의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마지막 부탁. 그래,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부디 어색하지만은 않길. 그냥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길. 그때까진 햇살이가 만든 맛없는 커피가 퍽이나 그리울 것 같다.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부디 건강했으면 한다. 언젠가 만나게 될 미래의 그 날에, 서로의 최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나와 그녀 모두…… 안녕-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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