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어른 아이 - 창원대신문

어른아이

박가영/불문학과 1학년

냉장고에서 플레인 요구르트를 꺼냈다. 하얀 플레인 요구르트를 떠먹을 때면 엄마가 아기에게 이유식을 떠먹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플레인 요구르트의 순수한 하얀색과 묽기는 아기의 이유식과 닮았다. 플레인 요구르트를 좋아하는 나는 어쩌면 아기가 되고싶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플레인 요구르트를 다 먹고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탈탈탈 갈색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언덕길을 소리내며 내려간다. 길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나무를 스칠 때마다 꽃잎이 아롱아롱 떨어졌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자전거 타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냉장고 안에 있던 플레인 요구르트 누가 먹었어?”

탕! 하고 냉장고가 거칠게 닫혔다. 선우가 부엌에서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화내고 있었다. 그깟 플레인 요구르트가 뭐라고 저 난리야. 나는 슬쩍 다 먹은 플레인 요구르트를 쓰레기 통에 버렸다. 운나쁘게도 그 모습을 선우가 봐버렸다.

“야, 이거 내 건데 네가 먹으면 어떻게 해?”

“마리 언니가 나 먹으라고 했거든?”

“내가 먼저 찜해 놨단 말이야.”

“웃기시네. 그런게 어딨어.”

“그런 거 여기 있거든?”

이렇게 유치하게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뜨리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다음엔 이름이라도 써놓던가.”

나갈채비를 하고 다시 거실로 나오니 선민은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선우가 쇼파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부채를 쥐고 힘없이 팔락거리며 물었다.

“어디가?”

“통장정리하러. 금방 올거야.”

나 갔다온다. 선우가 부채 든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선우랑 선민은 내가 사는 이 집의 주인인 마리 언니의 사촌으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한달간 그들과 같은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둘은 쌍둥이 형제라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똑같아서 외적으로 그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딱 한가지였다. 바로 안경이다. 시력이 나쁜건지 아니면 단순히 둘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경을 쓴 쪽이 선민이었다. 안경을 썼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선민은 선우보다 조금 더 똑똑해보이고 차분한 인상이 있었다. 뭐 그래봤자 결국 둘 다 똑같이 유치하긴 하지만. 쌍둥이가 이 집에 온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여자만 사는 집에 남자가 들어온다는 건 썩 달갑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샌들을 신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까 은행까지 걸어서 가야겠다.

“……아.”

그야말로 절망적인 기분으로 은행 나왔다. 손에는 막 통장정리르 마친 통장이 들려있었다. 내가 언제 돈을 이렇게 많이 써버린거지? 통장에 남은 돈은 80만원 정도였는데, 이번달 통신요금이랑 이것저것 돈이 나가고나면 남은 돈은 고작 50만원 정도. 그동안 친구들과 노느라 앞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흥청망청 돈을 써버린 결과였다. 2학기 학비를 내야하는데 이제 어쩌지. 학점도 엉망이라 장학금을 받을 것 같지도 않다. 휴학을 해야하나? 머릿속이 갑갑해졌다.

“이제 어쩌지.”

정말 돈을 아껴쓰고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두 개 정도 하면 학비는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희망적인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희망이 사라졌다.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도 지금 처한 이 상황에 대한 절망만이 가득했다. 이렇게 한고비 넘겨도 돈이 없는건 마찬가지야.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쏟아지는 햇살도 싱그러운 연두색 나뭇잎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절망의 끝이 있다면 그 끝까지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쌍둥이 형제가 막 집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둘은 동작 그대로 멈춰서서 멀뚱 멀뚱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꼭 할 말있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정작 입은 열지 않는다. 뭐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쌍둥이가 다가왔다.

“대체 뭘했길래 몇시간 사이에 애가 이렇게 됐지?”

선민의 말을 대충 흘러듣고 거실 쇼파에 털썩 앉았다.

“너 굉장히 피곤해보여.”

잠시 잠자는 게 좋겠어. 선우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피곤하다는 생각은 안들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통장 정리를 하고 난후로 급격히.

“우리 나갈테니까 한숨 푹 자. 영원히 잠들면 안돼.”

“숲속의 미녀처럼?”

나는 장난스레 웃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농담을 진지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미녀가 아니니까 그럴 일은 없어.”

“만약 영원히 잠들어도 깨워줄 오지랖 넓은 왕자는 없지, 응.”

선민이도 옆에서 진지하게 한마디 거들었다. 칫. 그들의 냉랭한 반응에 토라져서 말없이 베란다 쪽을 향해 누웠다. 선민이 방에 침대도 있는데 거실에서 잘거야? 하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들이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집안이 조용해졌다. 집 안은 전체적으로 따뜻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고 싶은데 당장 내일 아침까지 해야할 과제가 남아 있는 기분이어서 자꾸만 눈이 떠졌다. 갑갑하고 숨막힐 듯하다. 이제 그만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발바닥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높은 난간 위에 서 있는 발바닥의 촉감이었다. 나는 수십번도 넘게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상상했다. 두 발이 하늘에 붕 뜬 그 순간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

강한 돌풍이 불어와 팔다리가 종이조각처럼 흔들리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심장은 수분이 빠져나가 쪼그라든 사과같고 몸은 떨린다. 나무뿌리처럼 두 발을 단단히하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지금 서늘한 나의 두 발은 잔뜩 웅크리고 긴장하고 있었다.

“이봐, 일어나.”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흔들흔들 누군가 내 몸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스르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니 선민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죽은 줄 알고 놀랐잖아. 이 멍청아.”

그가 내 볼을 쭈욱 잡고 늘어뜨렸다. 아, 아파! 나는 그만 놓으라는 뜻으로 찰싹 그의 손을 쳤다. 착! 하고 찰진 소리가 났다.

“너 왜 이렇게 손이 매워?”

그가 빨갛게 물드는 손을 문질렀다. 순간 너무 세게 때렸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헛기침이 나왔다.

“그,그러게 왜 남의 볼을 잡고 그래.”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삐쭉 내밀더니,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이때까지 쭉 잔거야? 이 잠탱이! 하고 소리쳤다. 어느새 철없는 어린애처럼 구는 행동에는 익숙해졌다.

“자고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어?”

“모르겠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야 그게. 아무튼 밥 먹게 씻고 와.”

선민이 부엌으로 가버리고 나는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얼굴은 약간 부은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이제 쌍둥이의 존재는 완전히 익숙해져버려서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지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니 쌍둥이들은 이미 밥을 먹고 있었다. 선우가 부엌에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내가 밥 차렸으니까 설거지는 너네 둘이 해.’하고 말했다. 자지도 이미 만들어져있는 된장찌개를 데웠을 뿐이면서. 뭔가 억울했지만 그냥 잠자코 숟가락을 들었다.

“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뜬금없이 뭔 소리야.”

선우가 밥풀을 입에 붙이고 고개를 들었다.

“넌 그런 생각 안해? 엄청난 부자로 태어난다던가,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태어난다던가.”

“난 잘생겼는데.”

마지막 한숟가락을 입에 꿀꺽 삼킨 선우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표정하나 변화없는 그를 똥씹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옆에 앉은 선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약간을 찔렸는지 시선을 슬쩍 피했다.

“더 좋게 태어나고 싶다고 사람들 모두 그런 생각을 해. 그렇지만 이미 그렇게 태어난 건 바꿀 수가 없는거지.”

“역시 그런거겠지? 운명인건가.”

“그렇지만 그런걸로 한번 낙담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걸? 벼랑끝까지 떨어질거야. 어쩔 수 없다고 가만히 있으면 편하지만 답답하기만하고, 정작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어.”

그가 눈을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쌍둥이들이 돌아가면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운명은 받아들이되, 저항해야해. 끊임없이.

와, 내가 한 말이지만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야.

그 뭐더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

중용? 그래, 그거. 운명에도 중용이란게 있는거지.

부처도 그 비슷하게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어,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되는건가. 말 뜻은 알겠지만 뭔가 이상한데.

나도 몰라. 철학자가 아니니까. 아무튼 의미전달만 되면 되는거 아냐?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알겠지?

모르겠으면 말고. 어차피 백번 말으로 들어봤자 자기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도로타불이야. 나중에 돼서야 아 그때 그게 이 말이었구나. 하는거지 뭐. 들어만 둬.

도로타불? 그거 맞는 말이야?

몰라. 별 것 아닌 걸로 트집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책을 읽는 사람이나 그냥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다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는 걸까. 나는 연락할 사람은 없지만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을 주고받는 척, 문자함을 열어 지난 문자들을 다시 확인했다.

“민정아!”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박지민이었다. 지민이가 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종종 같은 학교갈 때 같은 버스를 타곤 했지만 지하철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며칠 뒤에 애들끼리 모이기로한 거 알지?”

“아, 문자 봤어. 다음주 일요일에 모인다며?”

“올거지?”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라 상대방도 기분이 좋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 고민중이야.”

“왜? 오랜만에 다들 모이는건데…….”

그녀의 아쉬워하는 말투에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송도 해수욕장 근처에 1박 2일로 민박집을 잡아서 모이기로 했다. 모두들 대학을 가고나서 뿔뿔이 흩어져버렸기 때문에 모두가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며칠전까지는 혼쾌히 가겠다고 했지만 1박 2일이면 적어도 5만원의 돈을 써야했다.

“너 안색이 어둡다. 무슨일 있어?”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있잖아, 나 휴학할까?”

나는 망설이다가 이제껏 한번도 한 적 없던 내 이야기를 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서 내가 처한 불행한 상황들에 대해서.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할지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너보다 불행한 사람도 많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본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진지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가 있지? 기분이 정말로 나빠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이런저런 위로와 격려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그런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역은 금정역, 금정역 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녀는 슬슬 가봐야 한다며 아쉽지만 다음에 만나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의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그녀가 다시한번 나에게 인사했다. 그제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들릴만큼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행복한건 아니잖아.”

일순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나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멈칫 하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지하철을 나갔다. 나는 나의 인생을 이야기 한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내 고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을까. 한순간 모든 것에 대해 후회가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실망했다.

거실에서 야옹. 하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 데려와버렸어.”

“너무 불쌍해서…….”

“키워도 될까?”

두 사람의 간절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쌍둥이의 말에 따르자면 오가는 길에서 버려진 고양이가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계속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죠? 하는 눈빛으로 마리 언니를 바라봤다.

“마리 누나는 네가 허락하면 키워도 된다고 했어.”

“네 허락만 있으면 돼.”

먹이도 잘 챙겨주고 용변도 우리가 다 치울거야. 불편한 거 없게 할테니까. 응? 제발.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털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내 허락에 쌍둥이는 신이나서 입이 귀에 걸렸다. 마리 언니는 단호한 말투로 쌍둥이들에게 말했다.

“고양이 수명은 생각보다 길어. 키우겠다고 한 이상 절대 버리면 안돼.”

“알았어!”

쌍둥이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지만 언니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언니는 내게 다가와서 걱정스레 물었다.

“키워도 정말 괜찮겠어? 털도 많이 날릴텐데.”

“저는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어두운데.”

“그냥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요.”

“방에 들어가서 좀 쉬도록 해.”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울적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민이 문자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자는 한통도 와있지 않았다. 답답해서 음악이라도 들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MP3를 켰다.

「어른아이」

이어폰으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문득 ‘어른아이’라는 단어가 지금 나에게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에 서있는 애매한 존재. 나는 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대체 뭐야. 어중간해. 어른에게 의지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자립하기엔 무능력하고. 모든 상황에 화가났다.

며칠 뒤 아르바이트 가는 버스 안에서 지민을 다시 만났다. 그녀가 카드를 찍고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척 했다. 그녀는 잠시 이쪽을 힐끔 힐끔 쳐다보는가 싶더니 쭈뼛쭈뼛 다가왔다.

“저기, 민정아. 또 만나네.”

나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응. 그러게.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빈 옆자리에 올려놓은 가방을 들어올리며 그녀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평소라면 그녀가 나에게 먼저 앉을테니 가방 좀 치워달라고 말했을 텐데. 지하철에서 만난 이후로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두 손을 만지작 거렸다. 이러다가 서로 아무말 없이 목적지까지 도착해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하철에서 있잖아. 나는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미안.”

이렇게 바로 사과할 줄은 몰라서 도리어 내가 당황해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그녀다웠다. 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동안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지하철에서 나오고나서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녀가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것이 느껴져서, 지금 내 감정이 어떻든 사과를 받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괜찮아. 나도 네가 나쁜 의도는 없었을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사과해줘서 고마워. 하고 덧붙이며 미소지으니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내가 내릴 정류장이 다와가서 나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기 직전 그녀는 원래 그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되찾은 것 같았다.

버스가 떠나가고 제일 먼저 지민이의 사과를 받아줘서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진심이었고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과를 받아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답답한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그녀에 대한 화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건가 싶었지만 천천히 걷다보니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알 수가 없었다.

후두둑 후두둑 쏟아지는 빗소리에 스르르 눈을 떴다. 방안은 아직 어둡고 고요했다. 창문에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어서 지금이 한밤중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다시 자리에 누우려다가 달그락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부엌에서 나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쌍둥이인가? 목이 마르기도해서 부엌으로 내려갔다. 거실 베란다에서 푸르스름한 불빛이 흘러나와 부엌을 비추었다. 익숙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가스레인지 앞에 있었다.

“언니, 언제 들어왔어요?”

그녀가 어깨를 움찔하며 뒤돌았다. 한 손에는 국자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호수의 반짝임처럼 고요하게 빛났다.

“11시쯤에. 혹시 나 때문에 깬거야?”

“아뇨. 아마 빗소리 때문에 깬 것 같아요.”

“콩국수 먹을건데 너도 먹을래?”

조금만 주세요. 나는 소리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식탁의자를 끌어서 앉았다. 그녀는 다시 냄비에 집중했다. 부엌으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턱을 괴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드럽고 상냥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이 침묵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 공간이 꽉 차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콩국수을 두 그릇 떠서 하나를 내 앞에 놓았다. 콩국수를 한젓가락 후루룩 먹었다.

“이거 언니가 한거예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당연하지. 외갓집에서 키운 콩으로 직접 만든거야.”

맛있네요. 하고 중얼거리며 콩국수를 계속 먹었다. 쌍둥이가 이 집에 들어오고 언니가 밤늦게까지 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둘만 있는 시간이 흔치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할 타이밍을 엿보며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언니. 뭐 물어봐도 되요?”“그래. 뭔데?”“고민같은건데. 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많아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 중에 하나만 물어본다면……. ‘친구’란 게 뭘까요?”

그녀의 곤란해하는 표정을 보고 아 질문을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을 해버렸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동안 마리 언니가 상냥하게 물어왔다.

“그 질문은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음, 친구라고 해도 결국 ‘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친구가 ‘타인’이라는 게 받아들이기 힘들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이 정확하다. 친구라는 것이 나와 타인 사이 중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인지를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정확히 아는 것. 내게 필요한 건 그것이었다.

“나도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지.”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이미 대답에 가까워져있었다.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깨달아가는 것만 남았다.

점심 때쯤이 되어서야 늦게 일어나서 휴대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한통 와 있었다. 지민이었다.

[모이는 거, 1박2일이 아니라 당일치기로 하기로 했어. 돈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을거야.]

나를 배려해 준 것이었다. 나는 얼른 고맙다는 말과 다음주 일요일에 보자는 답장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새벽에 잠깐 깼는데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일층으로 내려가니 식탁에 검은 붕지들이 올라가 있었다.

“이거 뭐예요, 언니?”

호기심에 검은 봉지를 열어보니 전부 소주였다. 다섯, 여섯……, 열　병이나?　기겁한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보니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마침 쌍둥이들이 소란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사람 다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소리질렀다.

“오늘 저녁에 삼겹살 파티하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우리 모두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노오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싱그러운 나뭇잎은 연두빛으로 빛났다. 우리들은 가까이 있는 바닷가까지 갔다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있을 삼겹살 파티 때문인가 두근 두근 설레여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옥상에 테이블을 올려놓고 간의용 의자를 조립했다. 한쪽에서 성질급한 쌍둥이가 벌써부터 고기를 굽는다고 난리를 피웠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익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왔다. 정말 배부르게 먹고 떠들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먹은 것 같았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들었다. 다 먹을 수는 있을까 싶었던 산더미처럼 많은 고기와 술은 절반 이상이 쌍둥이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쌍둥이들은 이미 만취상태 인 것 같았다. 나도 술에 취한건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누나, 노래 한곡 불러줘!”

선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숟가락을 마리 언니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언니가 얼떨결에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누나 노래 잘하잖아! 해줘, 해줘!”

선민이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재촉했다. 선우가 노래를 시작하라는 듯 박수를 쳤고 나도 그를 따라서 박수를 쳤다. 그녀가 노래부르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망설이는 얼굴로 우리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나 곧 시원스럽게 옷자락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이런 날 아니면 언제 하겠어.”

그녀가 숟가락을 두 손으로 쥐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모습을 우리는 숨죽여 지켜보았다. 이윽고 온 하늘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강하고 선명한 울림. 야옹. 어느새 고양이가 소리없이 다가와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올려다본 밤하늘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눈동자 안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새벽이 될 때까지 옥상에서 놀았다. 쌍둥이들은 너무 많이 취해서 거실에 쓰러지듯 널부러졌다. 이불을 덮어주곤 옥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상쾌한 새벽녘의 공기가 몸 속으로 들어왔다. 마리 언니는 나무 의자에 앉아 가만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정도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언니의 두 뺨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쌍둥이는?”

“거실에서 정신없이 자요. 많이 마실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자다가 이불에 토하면 어쩌지.”

“토해도 상관없어. 일어나면 자기 토는 자기가 치워야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맞은 편 의자에 앉아 그녀의 시선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닷가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과 바닷물이 천천히 밀려오는 것까지 보였다. 세상은 조용했고 아침이 곧 시작하려는 듯한 자그마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도 해 뜨는 것만 보고 자야겠다.”

조금 지나자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하늘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싶어서 신비로웠다. 지금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언니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까. 쌍둥이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

“왜?”

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졸려하는 목소리였지만 언니의 눈동자는 어느때보다도 선명하게 빛났다.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녀와 내가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 속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