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필요한 순간은

<나에게 필요한 순간은......>

비가 오면 나는 습한 흙냄새가 나는 좋았다. 창문을 톡톡 치는 빗소리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정겨웠다. 오늘따라 삐걱거리는 시소 소리는 더 경쾌하게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비가 오면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오면 놀이터로 향했다. 그 날은 유일하게 놀이터가 내 차지가 되는 날이었다.

놀이터로 향하는 골목길 중턱엔 '미래슈퍼'라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없는 거 빼곤 다 파는 그런 가게였던 것 같다. 미래슈퍼의 주인아줌마는 손님이 주문하는 건 뭐든지 다 팔았다. 손님이 술을 달라면 술을 줬고, 약을 달라면 약도 줬다. 미래슈퍼엔 내가 좋아하는 게 다 있었다. 사탕도 있었고, 빵도 있었으며, 장난감도 있었다. 그 신천지와 같은 곳이 나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좋았다. 미래슈퍼는 미래동에서 제일 장사가 잘 되는 가게였다. 그 가게를 두고 이웃아줌마들은 주인장의 장사수완이 가히 좋은 것도 아닌데. 장사가 그렇게 잘 되는 것은 주인장의 눈 밑에 난 커다란 애교점 때문이라고들 했다. 살이 오른 몸매에 썩 예쁜 얼굴도 아니지만, 과부라는 동정표를 이미 동네 남자들에게 얻은데다가, 말을 할 때면 볼 살이 실룩실룩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올라가지는 애교점이 동네 남자들의 마음을 홀린다는 것이었다. 아줌마들은 미래슈퍼 아줌마를 싫어하면서도 앞에서 욕하진 못했다. 그것도 다 과부라는 점을 불쌍히 여긴 탓이리라. 놀이터로 가는 길에 나는 미래슈퍼 앞에 멈춰 서서 주인아줌마가 나오길 기다렸다. 계속되는 장마 탓인지, 가게안도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비 묻은 과일을 닦아내고 있는 아줌마에게 나는 짐짓 슬픈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줌마, 오늘도 아빠가 안 들어오실 건가 봐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눈물이 날만큼 슬픈 일도 아니었다. 아빠가 안 들어오시면 맞을 일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기뻤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아줌마가 돌아보며 말했다.

"너 또 왔니? 옷엔 또 무슨 땟 국물을 이렇게 많이 묻혔대? 너, 이런 차림으로 자꾸 찾아오면 아줌마 장사 방해된다구 했어, 안했어?"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줌마, 저쪽에서 미래슈퍼 단골 아저씨들 오고 있던데, 가서 아줌마가 한 말 다 말해줘도 돼요?"

가재미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는 아줌마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두 손바닥을 모아 내밀었다. 이러면 아줌마는 익숙한 듯이 나에게 사탕을 얹어주었다. 이것은 나의 오래된, 사탕을 얻어내는 방법이었다. 약이 올라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줌마가 말했다.

"10살밖에 안된 게 왜 이렇게 약았대? 으이구, 얼마나 더 뜯어먹을꺼야? 커서 뭐가 되려는지......"

이렇게 말하는 아줌마의 얼굴에서, 애교점이 또 한 번 실룩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하긴,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 이젠 아무렇지 않을 만도 하다. 말이 그렇지 아줌마가 진짜로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감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미래슈퍼를 찾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웃 아줌마들이 말하던 눈 밑 애교점으로 남자들을 홀린다던 그것인가보다. 나도 아줌마에게 홀린 남자 중에 하나인 것 같으니 말이다.

"내가 성공하면 다 갚아드릴께요~, 아줌마!"하고 사탕을 물고 나오는 가벼운 발걸음은 이제 나를 놀이터 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녀석, 넉살은......"

잠시, 측은한 빛을 내던 아줌마의 눈빛은 이내 사라지고, 분주한 손은 다시 비 묻은 과일들로 향했다.

놀이터는 비가 와서인지 적막만이 가득했다. 우산을 적시는 빗소리만이 경쾌했다. 1시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미끄럼틀과 시소를 완전히 점령해버렸다. 회색빛 모래로 가득했던 바닥은 비가 내리자 검은 갈색빛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손에 들고 있던 모종삽으로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비가 온 덕분에 모래는 내 손이 빚는 대로 공 모양도 되었다가 사람의 얼굴이 되기도 했다. 모래성을 쌓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우선, 주변의 모래를 끌어 모아 정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제 거기에 나뭇가지로 창문도 그리고 문도 그려 넣으면 우리 집의 몸통이 만들어지는 셈이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우리 집의 지붕까지 막 완성했을 때, 미래슈퍼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주인아줌마의 목소리였다. 간드러지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자, 나는 단박에 그 노래가 심수봉 아줌마의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아빠가 술에 취하면 곧잘 부르시던 노래였다. 오늘로 3일째였다. '지 애미를 쏙 빼다 박았다'며 나에게 발길질을 해댔던 아빠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신음 소리를 내며 그날 밤에도 심수봉의 노래를 부르며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엔 김이 모락모락나는 밥상만이 나를 맞았었다. 한 번 나가면 일주일씩 집을 비웠으니, 앞으로 4일 밤만 자면 아빠는 다시 모습을 보일 터였다. 아빠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다만, 이웃 아줌마들이 미래슈퍼 앞에 모여서 하는 얘길 얼핏 들으니, "신이네 아버님", "불쌍한 양반", "야반도주", "찾으러 다녀"하는 소리만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모래로 만든 우리 집은 제법 근사했다. 꼭 전래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집 같았다. 기왓장을 얹은듯한 지붕하며, 창살무늬로 표현한 창문의 형태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스스로도 뿌듯함에 도취되어 있을 즈음, 어느덧 비는 그쳐있었다. 멀리서 흙탕물을 튀기며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래 슈퍼를 지난 듯한 발소리는 어느덧 놀이터에 다다라 있었다.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모종삽을 챙기고, 내가 만든 모래집이 스러지지 않게 잘 다져놓은 다음 돌아서려는 찰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더 일찍 자리를 떠났어야 했는데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울타리를 너무 정교하게 만드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 후회되었다. 마치 개미허리를 끊어놓고 싶어하는 듯한, 호기심에 가득차면서도 섬뜩한 다섯 눈빛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더러운 것을 보는듯한 눈빛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나는 '먼저 인사를 던질까 말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당장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여러 무리의 아이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엄숙한 상황을 띄워보고자 내 조막만한 심장이 용기를 내었다.

"아, 아, 안녕, 얘들아. 난 이제 갈꺼야."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러 시선들이 나를 거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은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아,, 재수없게 인사는 왜 해. 야, 조용히 하구 가던 길이나 가."

나의 어색한 인사는 언제나 이런 대답으로 돌아오곤 했다. 무리 중 가운데에 있던 호리호리한 키의 남자아이였다. 앙 다문 입과 길들여지지 않은듯한 눈매가 단호함을 연상시켰다. 그 아이가 입고 있는 잘 세탁된 흰 색 티셔츠는 내가 입고 있는 땟물 낀 옷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 그럼 안녕......"

아이들의 기세에 눌려 조그맣게 대답한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내 뒤로 아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쟤 몸에 이도 있다며, 진짜야?"

"애들이 그러는데, 손만 닿아도 막 옮고 그런대."

"아, 진짜 냄새나, 쟤는 엄마도 없나......"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쟤네 아빠는 맨날 술만 마시구, 엄마는 집을 나갔대."

"맞아, 우리 엄마도 그랬어. 저런 집 사람들이랑은 말두 하지 말래."

"진짜? 우리 엄만 불쌍하다던데......"

"야,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 말이 맞거든!"

"아니야, 우리 엄마 말이 맞아!"

별것 아니던 나에 대한 토론이 격렬해지고, 다툼으로 번질 기미가 보이자 예의 그 호리호리한 남자아이가 중재에 나섰다.

"아무튼, 쟤랑은 얘기두 안하는게 좋아. 쟤가 2학년 땐, 바보같이 교실에서 오줌을 쌌다구."

이 말 한마디는 나에 대한 토론에 종지부를 찍기에 충분했다. 나는 돌아서서 '너는 오줌 한 번 싸 본 적 없냐!'하는 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사실 오줌을 싼 것은 사실이지만, 내 잘못은 아니었다.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반 아이들이 괴롭히는 바람에 일어난, 나로서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던 것이다. 억울했다.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참고, 힐끔 뒤돌아서 보니, 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의 말에 수긍하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였고, 이제는 관심이 사라진 듯 자신들의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빨갛고 파란 종이 가면을 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가면라이더 놀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의 무거운 발걸음은 이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내 발목을 붙잡기라도 하듯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비가 그치자 미래슈퍼 아줌마는 빗물과 모래로 범벅이 된 문간을 물로 씻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빗질을 해대는지, 내가 지나가는 것도 못 본 모양이었다. 그 뒤로 미래슈퍼로 오는듯한 아줌마들의 무리가 보였다. 다들 장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분주하게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마치 활기를 얻은 닭들의 모습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수줍게 인사를 건넨 나를 본 아줌마들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마냥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어, 어 그래. 신이 아니니."

마지못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아줌마들의 시선은 이미 내 옷을 훑고 난 후 미래슈퍼를 향하고 있었다. 사실 놀이터에서 놀고 난 후라, 안 그래도 땟 국물이 낀 내 옷은 이미 노란색이라는 색깔의 미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옷을 갈아입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갈아입은 티가 날만큼 깨끗한 옷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줌마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난 후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5분쯤을 걷고 나니 우리 집이 나왔다. 미래동 42-1번지라고 적힌 우체통 옆에 '이만구'라는 이름이 적힌 문패가 붙어 있었다. 초록색 대문을 열자 누군가 보였다. 아빠인 줄 알았는데, 덩치가 더 작은 사람이 나타났다.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몇 번 본적은 없지만,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분명했다. 대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선생님도 나를 쳐다보았다.

"인제 오니? 한참 기다렸다."하고 말하는 선생님의 표정은 건조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듯한 힘없는 눈빛이었다. 다만 입고 있는 단정한 정장만이 자신이 사회에서 신임받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적어도 허우대는 그랬다. 이 동네엔 그렇게 정장을 차려입고 다닐 만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형식적인 인사 뒤에 나는 '이 사람이 여기에 왜 왔을까'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빤, 안계신데......"

"어, 그런것 같구나."

선생님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것을 생각하는 듯 했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오늘은 너를 보러왔단다."

하얗다 못해 허여멀건 오른쪽 손이 내 왼쪽 어깨 위에 올라왔다. 여자처럼 가는 손가락이었다. 여전히 담배를 입에 문채로 선생님은 나를 앞세워 집으로 들어왔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 늘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집을 보여주는 게 더욱 창피했다. 집은 오랫동안 여자의 손을 타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켜켜이 쌓인 먼지가 한눈에도 보였다. 장마로 인해 눅눅해진 방안은 습기가 차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고, 오랫동안 빨지 않은 옷가지들과 제때 치우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들은 한데 섞여 오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급하게 방안에 널부러져 있던 옷가지들을 한쪽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개가 아빠가 입던 옷이었다. (땀이 배인 아빠의 진회색 작업복은 언제 빤 것인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누런 때가 끼어있었다.) 아빠가 즐겨입던 남색의 반바지와 티셔츠 몇 장을 구석으로 몰아넣자 그럭저럭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도 선생님은 멍하니 서서 초점이 없는 두 눈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히려 선생님이 우리 집을 구석구석 훑어보며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면, 나는 내내 선생님의 표정을 살펴야 했을 것이다.

"저기, 선생님."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선생님은 꿈속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듯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에 앉으셨다. 우리 사이에는 밥상으로 쓰는,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가 놓여있었다. 가구래 봐야 별 것도 없었다. 내 뒤로 놓여있는 텔레비전과 그것을 지탱하는 서랍장, 10개의 손가락을 자랑하는 옷걸이가 전부였다. 잠깐 주위를 돌아보던 선생님의 시선이 내 눈과 마주쳤다. 마주보는 사람까지 무기력하게 만드는 공허한 눈이었다.

"나, 물 좀 줄겠니?"

"아, 네. 잠시만요."

씻어놓은 컵이 없었던 관계로 나는 급하게 싱크대 안에 놓여 설거지를 기다리던 컵 하나를 꺼내 물로 대충 헹구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어, 그래 고맙다."

물을 마시던 선생님의 표정이 잠시 찌푸려졌다. 아마 김치 냄새라도 났나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말로 표현하진 않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한쪽 손에 들고 들여다보며 내게 말했다.

"요즘 학교에 통 오지 않고 있지,,,,,, 왜 오지 않는 거니?"

종이에다 할 말을 적어 놓고 왔는지, 선생님의 시선은 줄곧 종이를 향해 있었다. 나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으니까요. 같이 놀 친구도 없구요."

선생님의 가는 손은 펜을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말했다.

"가장 최근에 학교에 온 게 언제였지?"

"운동회때요."

말을 할 때마다 자꾸만 길어진 내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 머리를 쓸어 올려도 소용이 없었다.

"3주 전이로구나."

몇 분간의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의 눈은 이제 3번이라고 적힌 부분에 멈춰있었다.

"아버지가 학교에 가라고 하진 않으셨니?"

"전혀요."

선생님의 얼굴표정은 흡사 성경책을 경건하게 읽어 내려가는 목사님의 얼굴 같았다. 나는 이제 궁금해졌다. 선생님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 종이엔 뭐가 적혀져있는지. 내 시선이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에 머무르자, 선생님은 내 눈빛을 발견하시고는,

"아,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구나."

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선생님이,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교육청 같은 곳에서 나와서 누가 학교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렴."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시선은 다시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괘종시계가 오후 여섯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울렸다. 땡땡땡하고 종이 채 다 울리기도 전에 선생님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오늘은 이만해야겠군."

우두커니 바라보는 나를 뒤로 하고 선생님은 뭐라고 중얼거리며 서둘러 신발을 신고 우리 집을 나섰다. 얼핏 들으니, '퇴근'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골목길로 나온 나는 선생님의 모습을 뒤쫓았지만, 어느새 선생님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별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의 빛을 받은 나의 얼굴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골목길의 가로등에도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둠이 찾아올 것이었다. 집집마다 거실에 불이 켜지고, 창문을 열어놓은 옆집에선 밥 짓는 냄새가 풍겨왔다. 오늘 저녁은 삼겹살인 모양이었다. 반갑지 않던 손님은 사라졌지만,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은 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문득 내 안의 외로움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항상 해질녘이면, 어둠과 함께 찾아오는 외로움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매일 밤마다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나는 이럴 때면 항상 옥상 위로 올라갔다. 시멘트가 발린 좁다란 계단을 오르자 나의 아지트가 나왔다. 옥상엔 노란색 물탱크 하나와 수북하게 쌓여있는 벽돌들, 어제 내린 빗물로 채워진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리 집의 옥상은 낮았지만, 떨어지는 해를 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상상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나의 모습을.

상상속의 나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이불 속에서 엄마는 나를 꼭 껴안아주고 있었다. 엄마가 나의 이마에 뽀뽀해주었다. 나는 엄마의 눈을 바라보다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면 엄마는 더욱 더 나를 꼭 안아주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아빠와 함께 있었다. 수증기가 자욱한 목욕탕에 우리가 있다. 아빠는 말없이 나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대신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다. 아침이면 "신아, 일어나. 학교가야지."하는 엄마의 나지막한 소리가 나를 깨우고, 눈도 덜 뜬 나를 앉혀, 엄마는 반찬을 얹은 숟가락을 내 입에 밀어 넣고 있다. 아빠는 흐뭇한 표정으로 엄마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에 간 나는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다. 상상 속의 나는 때 묻은 옷이 아닌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엄마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만 입혀주는 내가 가진 가장 예쁜 옷인듯 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친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친구들은 스스럼없이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얹기도 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며, 나의 눈을 마주보고 웃고 있다. 모두들 "신아"하고 나를 불러주었다.

내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 신아, 괜찮아질꺼야."

이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하늘의 별을 보고 주문을 외우면, 마법처럼 외로움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늘에는 어제 보았던 장구모양의 별자리가 빛나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가슴 속 깊이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시자,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던 탓에 내 배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옥상에서 내려가던 나는 마당으로 가는 계단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아니 큰 소리로 누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을에 잠들어있던 고요함을 깨우는 소리였다.

"소매치기야!"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 분명히 소매치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은 여자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소매치기야! 누구 없어요! 저 놈 좀 잡아요!"

소리는 미래슈퍼 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 집과 미래슈퍼는 일직선으로 연결된 도로가에 자리하고 있어 우리 집 옥상에서도 꽤 잘 보이는 편이었다. 불이 켜진 미래슈퍼의 앞에는 어떤 아줌마가 빈 장바구니를 들고 동동 뛰고 있었고, 주인아줌마의 모습도 보였다. 그 두 사람의 시선은 1m 앞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는 흰 색 마스크를 쓴 어떤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는 그 남자의 뒤로, 키가 작고 뚱뚱한 체구의 어떤 아저씨가 뱃살을 출렁이며 뛰어가고 있었다.

"거기 서."

뒤쫓던 아저씨는 1m도 채 뛰지 않았는데도, 헉헉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뒤쫓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한동안 전속력으로 질주하다 뒤쫓아 오는 아저씨가 자신을 잡지 못할 것처럼 보였는지 슬슬 약을 올려대고 있었다.

"거기 서."

하는 아저씨의 말에, 마스크를 쓴 남자는 갑자기 멈춰 서서 마스크를 빠르게 내렸다올리며 혓바닥을 내밀어 보이기도 하고, 손에 든 지갑을 흔들어 보이기도 하며 아저씨를 약 올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남자는 아저씨가 자신을 거의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후다닥 뛰어가기도 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아저씨는, 얼굴은 벌겋게 되었고, 헉헉하고 숨을 내쉬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간신히 마스크를 쓴 남자를 뒤쫓고만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이제 우리 집 앞으로 이어진 도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잘만하면 내가 있는 옥상 바로 밑까지도 지나갈 것 같았다.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키도 작고 힘도 세지 않은 내가 뭔가를 해 보겠다고 용기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뭔가 던질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나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 아주 많이 있었다. 집이 지어진 이래로 자리를 옮겨 본 적이 없는 듯 쌓여 있는 벽돌과 빗물이 고여 있는 양동이면 충분할 듯 했다. 나는 벽돌 한 장을 손에 쥐고 계획을 세웠다. 만약 마스크를 쓴 남자가 우리 집 옥상 밑에 서서 또 뒤쫓는 아저씨를 약 올리기 위해 멈춰 선다면, 벽돌을 던져 마스크를 쓴 남자가 기절하게 만든다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내가 이런 기똥찬 계획으로 흥분해 있는 동안, 어느새 쫓기는 자와 쫓는 자는 우리 집 가까이에 다다라있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살짝 눈만 내밀어 살펴보니, 역시 마스크를 쓴 남자는 이번에도 아저씨를 향해 혓바닥을 쏙 내밀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아저씨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뒤쫓고 있었다. 더 이상 뛸 힘이 바닥났는지, 아저씨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한 번,

"거기 서."

를 외쳤다. 설마 했던 내 예감은 적중했다. 다시 뛰기 시작하던 마스크를 쓴 남자가 내가 있는 옥상 바로 밑에서 멈춰선 것이었다. 내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대고 있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극도의 긴장상태로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벽돌을 꽉 쥐어보았다. 기회는 한 번 뿐이었다. 타이밍을 봐서 결정적인 순간에 벽돌을 던져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냈다. 빗물이 반쯤 찬 양동이의 뚜껑을 닫고 소리가 나지 않게 들어 올려 난간에 걸쳐두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지갑을 손에 든 채로 아저씨에게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이때다!' 나는 힘껏 양동이를 난간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그리고 재빨리 손에 벽돌을 한 아름 들고 던질 준비를 했다. 지갑을 들고 한창 흥분해 재미를 즐기던 남자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양동이를 맞고 "악"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남자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나는 그 남자를 향해 정신없이 벽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던진 벽돌은 정확하게 남자의 머리를 명중시켰다. 그 사이 뒤쫓고 있던 아저씨는 풀린 다리로 힘겹게 걸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의 몸 위로 쓰러졌다. 힘이 풀린 아저씨의 커다란 몸은 남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잡았다. 잡았어."

쓰러진 아저씨의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자기 자기 몸을 덮친 육중한 체중에 놀란 마스크의 남자는 눈을 떴으나, 별다른 반항도 못해보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곧 있자, 미래슈퍼의 아줌마들과 경찰아저씨들이 모습을 보였다. 굴러다니는 양동이 하나와 육중한 체중의 아저씨에게 깔려있는 마스크를 쓴 남자의 모습. 그 주위로 벽돌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병원으로 향했고, 아저씨는 사람이 몰려들자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 놈 덕분에 2kg은 빠지겠군."

이것이 아저씨가 일어나자마자 맨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져왔다. 아저씨는 숨어있던 나의 공로도 잊지 않고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용감한 아이로구나."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들은 칭찬의 말이었다. 내가 미소로 답하자 아저씨도 미소로 답해주었다. 지갑의 주인인 아줌마는 여전히 빈장바구니를 든 채로 나에게로 다가와 고맙다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경찰 아저씨들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대단한 일을 했구나."라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정말 따스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일주일 후, 나는 경찰서에 있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소매치기를 잡은 아저씨도 함께였다. 나는 새하얀 셔츠를 입고, 아빠의 손을 잡고 있었다. 3일 전에 아빠는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용감한 시민상을 받게 된다는 전화였다. 무서운 눈으로 항상 나를 노려보던 눈빛이 아닌, 자상한 눈빛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손엔 상패와 꽃다발이, 나의 다른 한쪽 손을 잡고 있던 아빠의 호주머니에는 포상금이 들어있었다. 우리 모두 웃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줌마들도 모두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용감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라는 한 아줌마의 말에, 아빠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집에 다다르자 아빠는 나에게 편지를 한 장 쥐어주었다.

"읽어보렴. 오늘은 너의 날이니까."

아빠가 쥐어준 편지 봉투엔 작고 부드러운 글씨체로 '사랑하는 우리 아들 신이에게'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엄마의 편지였다. 눈물을 참고 편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나에게 아빠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저, 신아. 아빠랑 목욕탕에나 같이 갈까?"

"응?"

하는 나의 물음에 아빠가 다시 말했다.

"아빠가 등 밀어 줄까?"

"응."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틀 후, 나는 놀이터에 있었다. 나는 때 묻지 않은 샛노란 병아리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놀이터에 나타나자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전의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보면 아이들이 놀랄 만도 했다. 아이들이 또 다시 나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쟤. 신이 맞아?"

"그러게, 왜 저렇게 깨끗해졌대?"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쟤네 엄마가 집에 돌아왔대. 아빠는 이제 술을 안 마신대."

"그래도 이가 그렇게 쉽게 없어지겠어?"

"맞아. 쟤 학교에서 쉬도 쌌다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쟤가 도둑도 잡았대."

"에이. 설마. 우리 엄만 쟤가 벽돌을 던졌다던데."

"아니야, 우리 엄마가 신이는 착한 애랬어."

"야, 우리 엄마 말이 맞거든!"

"아니야, 우리 엄마 말이 맞아!"

별것 아니던 나에 대한 토론이 격렬해지고, 급기야 나를 놀이에 끼워주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싸움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호리호리한 키의 남자아이가 중재에 나섰다.

"아무튼, 둘 다 말 맞거든. 쟤가 벽돌을 던져서 도둑도 잡았고. 경찰서에서 상도 받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