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 용기

한  성  주/미래대·문화테크노학과·2022 입학 

 

“미안하지만, 우리 직장과는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그건 완곡한 언어로 전한 해고 의사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괜찮은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럴듯한 말들이 머릿속을 부유했으나 정작 언어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이 좁은 직장이 내 세상의 전부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능력을 좀 더 자유롭게 내보일 수 있는 곳이 세상에 한 군데 정돈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내 발목을 휘감는 무력함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지현 씨.” 

“아, 저.”

“그동안 수고 많았어.”

팀장님이었던가, 아니면 옆자리 은아 씨였을까. 기계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으나 정작 그 말이 누구에게 향했는지는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다정하게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는 것만 조각난 기억이 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회사에 가져다 두었던 짐은 채 한 상자가 되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내 자리를 메꾸고 있는 이름표를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올 법한 사이즈의 종이상자에는 그간 내가 차곡차곡 쌓아둔 노력의 흔적을 눌러 담고, 동료들과 침묵의 작별 인사를 나눈 후 회사를 나섰다.

색색의 조명이 세상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헐겁게 맨 가방끈을 연신 고쳐 잡으며 어렵게 걸음을 떼었다.

그들의 재단이 나의 모든 걸 증명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자꾸만 힘이 빠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한 걸음마다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만 했고, 가로등 불이 빠진 어두운 골목길에 그저 멈춰 서고 싶다는 충동을 다독이며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힘을 내야만 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별 한 점 스쳐 지나지 않는 밤이었다.익숙하기에 안온한 어둠이 나를 반긴다. 겨울이 머무르는 밤의 길목은 몹시 싸늘했으나 그것이 꼭 매섭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오늘따라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기에 초라한 내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 그것만이 다행이라고 여기며 나는 끌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지독하게도 치열하게 살아오던 삶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엔 돈을 많이 모아서 갖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사고 싶었고, 그보다 조금 더 큰 이후에는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를 보러 훌쩍 떠나고 싶었고, 지금은 그저 내가 발 붙일 집 한 칸 마련하는 것만이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마저도 이제 당분간은 물 건너가게 생겼지만.

‘엄마’

주머니 속에서 낯선 진동음이 울린다. 휴대전화 화면에 뜨는 이름은 업무 전화가 아니라면 언제나 하나였다. 그러나 미안할 정도로 다정한 이 전화를 받지 않은지는 꽤 되었다. 이번에는 좀 다를까. 이번에는 받아볼까. 그런 마음들은 매번 미련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이번에도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은 맥없이 꺼진다. 불편한 부재중을 남긴 채 나는 재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 걸음마다 기나긴 숨이 흘러나왔다. 한 숨, 두 숨, 쌓여가는 고민과 방황만큼이나 무거운 숨이 자꾸만 빠져나간다. 나의 필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 내 삶의 목적. 내가 그토록 쫓고 싶어했던 꿈.나의 순수가 우주를 유영하는 별만큼이나 자유롭게 내달릴 무렵에채워 두었던 막연한 희망들이 이제와 원망스럽다는 건 추악한 내이기심일지도 몰랐다.

세상은 나를 두고 끊임없이 나이를 먹는다.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책임져야 할 게 너무나도 많은 서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에 떠밀려 주저앉기도 한 모양이었다. 착실하게 쌓이던 부재중은 어느 틈엔가 줄어들고, 끝내는 하나둘씩 떠나가고 만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저 길 잃은 좌절을 납득하고만 있었다. 내가 나를 미워하며 세상을 향해 오갈 데 없는 원망을 삼켜낸다 한들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을 한참 오르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가로등 아래에 못 보던 공중전화 부스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그렇게 진하지 않은 푸른색 부스는 곳곳에 칠이 벗겨진 흔적이 가득했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물건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지 않은 곳이 없다.

나는 홀린 듯 푸른 부스 앞으로 다가섰다.

정돈되지 않은 이 감정들을, 어디라도 좋으니 마음껏 하소연하고 싶었다.

부스 안에 발을 들여놓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일순 바깥세상의 소음이 가로막히며 기분 좋은 침묵이 부스 안에 감돌았다. 나는 기나긴 숨을 들이마시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숫자 버튼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또 한참을 고민만 한다. 떠오르는 얼굴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부정적인 감정은어두운 빛의 물감과도 같기 때문에. 내가 그들의 깨끗한 도화지 위에 얼룩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기에 결국 아무 말도하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굳게 닫힌 부스의 문밖에서는매서운 바람의 울부짖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어디든 좋으니 훌쩍 떠나버릴까.

그런 마음으로 부스를 나서려던 찰나였다.

수화기가 울었다. 요란한 착신음이 일정하게 귓전을 때린다. 나는 머뭇거리며 수화기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이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애초에 이 근처 주민들은 여기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일 터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공중전화를 쓴다고. 

그런 얄팍하고 편협한 편견 또한 없다고는 말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걸려 오고 있는 이 전화는 나를 위한 누군가의 부름일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망상을 했다.

나는 조심스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귀에 가까이 대자 얇은 전화선을 타고 누군가의 나긋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왔다.

"여보세요?"

지극히도 평범한 첫인사였다. 나는 무어라 대답하려 했으나 목 끝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북받쳐 오르는 기분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전화선 너머에서 나의 대답을 기다렸을 이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을 건넸다.

“오늘 제법 고단한 하루를 보내셨나 봐요.” 

“누구, 세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듯한 감각이 참으로 묘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건넨 별 뜻 없는 안부 인사가,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도닥여 주는 듯한 한 마디가 분에 넘치게 따뜻했다. 나는 저 따스함이 오롯이 내 것이었으면 하고 잠시바랐다. 차라리 대답하지 말아 주었으면. 나를 위해 전화를 건,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라고 대답해 주었으면.

그런 욕심이 자꾸만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전화선 너머의 상대는 잠시 고민하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누구인지, 그게 중요할까요?”

“무슨 소리예요?”

“이 수화기를 들어 준 사람,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 그런가요?”

“그럼요. 이만큼 용기내 주는 사람 그렇게 흔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것들은 다 제쳐 두고 잠깐 저랑 이야기나 나누지 않을래요. 상대는 그렇게 덧붙였다.

얼굴 없는 비밀 친구라도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이야기였다. 오늘 점심은 먹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최근 날씨가 밤 산책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이맘때엔 여행이 그렇게 가고 싶었다든지. 수화기 너머의 얼굴 없는 친구는 내 말에 맞장구도 쳐 주었다가, 경청하고 있다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가, 오갈 데 없는 고민을 털어 놓으면 사뭇 진중하게 고민도 해주었다.

이상하게, 울렁거리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았다. 불안, 후회. 그런 감정들이 끼어들 틈 없는 편안한 찰나였다.

내가 한참이나 말이 없으면 전화 너머의 상대는 편안한 침묵으로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러고도 내가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면 부드럽게 대화 주제를 돌려주기도 했다.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쨌거나 전화선 너머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시간이 퍽 개운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으니까.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느껴진 감정은 아쉬움 같은 것보다는 탄산의 끝맛이 상쾌하게 감돌다 날아가는 것처럼 한결 가벼운 감각이었다.

나는 물결치는 밤을 가르며 전화 부스를 나섰다.

묘한 다정함에 위로받은 밤이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그다지 거창한 다짐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변화한 거라 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뿐이었다. 발밑에 짙게 고인 물은 여전히 물살을 철렁거리며 내가 나약해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어두운 물에 잠기지 않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달리는 쪽이 편했다. 입사 지원서를 쓰고, 나를 소개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수많은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어딘가에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어차피 나를 아껴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를 증명하지 못하면 결국 모두가 떠나가는 건 당연한 수순일 테니까.

엄마도, 아빠도. 아직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곁에 있었던 것 같은 많은 친구들도. 사회라는 파도에 휩쓸리고 마모되어 결국은 하나둘 해풍의 짠내처럼 훅 밀려들었다가 금방 떠나버리고 말았으니까.

또 그렇게 마음만 남겨두고, 추억만 남겨두고. 나는 발목을 적신 채 아직도 여기 이 자리에서 있는데도.

수많은 폭풍에 휘말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동안, 푸른 부스는 침묵을 지키며 나를 기다렸다.

나를 무너뜨릴 듯 불어오던 비바람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언제든 내가 손을 내밀면 기꺼이 손을 맞잡아줄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새로운 면접을 보러 가던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늦가을을 보내며 나뭇잎을 쏟아 내리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누군가에게 해주고픈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뛰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여전히 멈춰 있는 이를 기다려주지 않고 끊임없이 달렸다. 봄을 맞이하던 벚꽃잎이 아름답게 낙하하여 또다시 기억만 남기고 떠나갔으며, 마냥 푸르던 나무들이 금세 햇빛에 그슬린 듯한 색을 입고서 길가에 낙엽을 소복소복 쌓았다.

그다음 좌절은 생각보다 빠르게, 생각보다 무겁게.

그리고. 생각보다 고요하게 찾아왔다.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서 견디지 못하고 사직서를 내던진 날이었다.

이유는 사소했는지도 모른다. 과장님이 나한테 화를 냈는지, 폭언을 했는지. 동료들이 나를 무시했는지.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를 빼앗겼는지. 기억은 마냥 흐릿했다. 그러나 그때를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아직도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무력해지곤 했다.

괜찮다는 말은 때때로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실패해도 괜찮고, 잠깐 쉬어가도 괜찮다. 괜찮은데, 그렇기에 아무것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분이란 건 제법 참담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럴 줄 알았다. 또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반복되는 실패에 대한 감상은 이뿐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때 재차 떠오른 건 낡아빠진 푸른 전화부스였다. 내가 손을 내밀면 기꺼이 잡아 줄 사람. 자세한 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면서 이상하리만치 다정했던 사람. 얼굴도 이름도모르면서 왜인지 자꾸만 내 편이 되어주던 사람.

그쪽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힘들다고 말하면 이번에도 수고했다며 다독여 줄 터였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끌어안아 주었다가 다시 또 일어나 달릴 수 있게 북돋아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안온함에 기대고 싶을수록 이상한 오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약하게 기대지 않고도 나를 증명하고 싶다는 욕심, 그런 오기 또는 오만. 그게 감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새벽 한 시를 기다려 또다시 푸른 전화 부스 앞에 섰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기다리면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마디도 답하지 못한다.

괜찮아, 고생했어. 그런 말이 귓가에서 몇 번인가 헛돌다 빠져나갔다.

“미안.”

고민 끝에 쥐어짜낸 대답은 겨우 이뿐이었다.

얼굴 없는 비밀 친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참으로 지독한 겨울의 초입이었다.

 

-

 

아등바등 모아 두었던 저금을 깨는 건 얼어붙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오랜 만에 부모님이나 뵈러 갈까. 연락이 끊긴 친구들한테 전화를 해볼까. 무수한 고민들은 해풍에 깎여 저 머나먼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밀려갔다. 지금까지 줄곧 못 했는데, 그깟 좌절 좀 겪었다고 사람이 변할까.

나는 불편하고 소중한 인연들에게 손을 뻗는 대신 바다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그다지 긴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운이 좋게도 마침 다음 날 새벽 첫 차에 남는 자리가 있었고, 나는 마침 일정이 없었기에. 충동적으로 추진한 후에는 소리 없이 짐을 꾸렸다.

작달막한 단칸방에도 새벽의 물빛은 언제나처럼 넘실넘실 흘러 들어온다. 다섯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단촐한 짐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채도 낮은 안개가 나를 감싸 안았다. 아직 

사람의 온도가 배지 않은 텅 빈 거리를 또박또박 걷고 있으려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 것도 같았다.

폐부가 저릴 만큼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그 계절의 향기가 난다.

얼음이 살며시 녹아든 싱그러운 땅의 향기. 푸른 생명들이 너른 잎을 펼쳐낸 그늘의 향기. 잘 마른 과실의 바스락거리는 향기와 어쩐지 눈구름 사이에 파묻혀 있는 기분을 선사하는 차가운 향기.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역 앞 난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열차가 들어온다 는 안내방송이 울리자 온기를 나누며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금세 제가 있을 곳을 찾아 흩어져 간다. 나는 승차권을 재차 확인한 다음, 천천히 열차에 발을 올렸다.

새벽 첫 차의 서늘한 온도는 각별한 것이었다. 아직 데워지지 않은 공기 탓에 손이 덜덜 떨려 왔으나, 그마저도 설레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처음 가 보는 기차 여행이었다.

차창 밖으로 바깥세상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설프게 붓질한 것 같은 붉은색이 군 청색 하늘을 조금씩 잡아먹으며 슬금슬금 뻗어나가고 있었다. 역을 지나쳐 갈 때마다 설레는 기 다림을 품은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도 꽤 즐거웠다. 이토록 이른 시간부터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것인지, 얼어붙은 손을 마주 잡으며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을 하고선 저마다의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막 세상으로의 독립을 시작한 듯 진한 아쉬움의 포옹을 나누는 아이와 가족들, 이런 기차 여행이 일상인 것만 같은 무덤덤한 여자. 그들의 사연을 모두 이야기로 그려 낸다면 백과사전 두께의 책 한 권은 거뜬히 나올 터였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어떤 제목을 가지고 있을까.

뭐든. 그게 어떤 내용이든,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할 사람이 얼 마든지 있는 이야기. 마법도 기적도 드라마틱한 도전도 없는 밋밋한 이야기. 어디서나 볼 수 있 기에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푸른 전화 부스의 얼굴 없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아주 조금은 특별했던가.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의미 없는 생각을 거듭한다.

그 누가 믿을까.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도 않는 길목에 세워진 공중전화 부스가 갑자기 나를 불 렀다고 하면. 나는 잠시 속도를 늦추었다가 또 금방 스쳐 지나가는 기차역을 바라보며 남몰래

웃음을 흘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누군가한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불러오는 얼굴은 보통 부모님이나 친구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을 터였다. 회사는 때려치웠으면서 무작정 저금 깨고 떠나왔어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들에게는 바다가 예쁘다는 말이, 점점 차오르는 새벽이 분에 넘치게 벅차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

차창 너머에는 슬그머니 동이 터 오고 있다. 새벽이 물러난 자리는 퍽 따사로웠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아주 잠시 접어두고, 나는 선반에 올려두었던 짐을 조심히 내렸다. 짐이라고 해 봐야 하루 이틀쯤 갈아입을 옷이나 세면도구 따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캐리어의 바퀴가 땅에 끌리면서 전해져 오는 진동은 제법 상쾌했다.

평소 같았다면 밤을 새워 여기저기 내가 몸담을 수 있을 만한 회사의 정보를 찾아보고 나를 포장하기 바빴을 시간에 이런 일탈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평일 오전의 거리는 한산했다. 걸음을 멈춰 서 있으면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영영 낮을 붙잡아두고 있는 세상. 영영 밤이 오지 않고, 영영 새벽이 밝아오지 않는 세상. 한때는 그런 세상이 정말로 오기를 바랐다.

맞지 않는 업무를 억지로 집어삼키듯 붙들고서 서서히 밝아오는 창밖을 볼 때면 늘, 달콤하고 씁쓸했던 이 새벽이 계속 떠나가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잠들기 전에는 항상 내일이 오지 않는 세상을 원했다.

발걸음은 정해진 곳 없이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떠돌았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난 꽃이 있으면 한참 머물러 구경도 하고, 예쁜 카페가 보이면 무작정 들어가 몸을 녹이기도 했다.

온열기의 훈기가 기분 좋게 몸을 덥혔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즐거우면 됐잖아.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암시라도 하듯 목구멍을 꽉 막은 생각을 두드려 넘겼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걷다가. 목적지도 없이 하염없이 걷기만 하던 내 발길을 문득 멈춰 세 운 건 부두에 정박해 있던 한 척의 보트였다.

이제 막 출항 준비를 하는 듯 보트 위에 선 청년은 사뭇 분주해 보였다. 나는 구두 신은 발로 무작정 그쪽을 향해 달음질했다. 몽돌 때문에 바닥이 고르지 않아 몇 번은 넘어질 뻔했다. 뛴 것도 없으면서 가쁜 숨으로 보트 앞에 서자 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보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왠지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기이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흔들거리는 호흡을 다듬으며 다짜고짜 청년에게 물었다.

선반에 올려두었던 짐을 조심히 내렸다. 짐이라고 해 봐야 하루 이틀쯤 갈아입을 옷이나 세면도구 따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캐리어의 바퀴가 땅에 끌리면서 전해져 오는 진동은 제법 상쾌했다.

평소 같았다면 밤을 새워 여기저기 내가 몸담을 수 있을 만한 회사의 정보를 찾아보고 나를 포장하기 바빴을 시간에 이런 일탈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평일 오전의 거리는 한산했다. 걸음을 멈춰 서 있으면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영영 낮을 붙잡아두고 있는 세상. 영영 밤이 오지 않고, 영영 새벽이 밝아오지 않는 세상. 한때는 그런 세상이 정말로 오기를 바랐다.

맞지 않는 업무를 억지로 집어삼키듯 붙들고서 서서히 밝아오는 창밖을 볼 때면 늘, 달콤하고 씁쓸했던 이 새벽이 계속 떠나가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잠들기 전에는 항상 내일이 오지 않는 세상을 원했다.

발걸음은 정해진 곳 없이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떠돌았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난 꽃이 있으면 한참 머물러 구경도 하고, 예쁜 카페가 보이면 무작정 들어가 몸을 녹이기도 했다.

온열기의 훈기가 기분 좋게 몸을 덥혔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은 그저 즐거우면 됐잖아.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암시라도 하듯 목구멍을 꽉 막은 생각을 두드려 넘겼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걷다가. 목적지도 없이 하염없이 걷기만 하던 내 발길을 문득 멈춰 세 운 건 부두에 정박해 있던 한 척의 보트였다.

이제 막 출항 준비를 하는 듯 보트 위에 선 청년은 사뭇 분주해 보였다. 나는 구두 신은 발로 무작정 그쪽을 향해 달음질했다. 몽돌 때문에 바닥이 고르지 않아 몇 번은 넘어질 뻔했다. 뛴 것도 없으면서 가쁜 숨으로 보트 앞에 서자 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보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왠지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기이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흔들거리는 호흡을 다듬으며 다짜고짜 청년에게 물었다.

“저도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예?”

“돈이라면 드릴게요. 하시는 일도 방해 안 할게요. 바다에 빠지면 그냥 두고 가셔도 돼요.”

청년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윽고 타도 좋다는 듯 내게 손짓했다. 생각보다 더 맥없는 허락이었다. 나는 가볍게목례를 해 감사를 표하고는 조심스럽게 배 위로발을 걸쳤다.

파도에 울렁거리고 있는 보트는 생각보다 사나웠다. 바닷물에 미끄러져 휘청거리자 청년은 단 단한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었다가, 표정을 찌푸리며 금세 놓았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이제 출항할 테니 구명조끼 정도는 입고 있으라며 바 다 향기가 가득 배어 나오는 주황색 조끼를 던져주었을 뿐이었다.

조끼의 벨트를 다 채우자 그는 조심스럽게 보트에 숨을 불어넣었다. 나는 뭐라도 손에 닿는 난간을 꼭 붙잡은 채 청년을 바라보았다. 진동 탓에 자꾸만 시야가 흔들렸다.

낡은 보트의 엔진은 제법 요란했다. 배의 구조를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모 터 같은 게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건 마치 오래된 기계 장치의 비명과도 같은 울림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진동에 온몸의 감각을 집중했다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얀 파도가 양옆으로 부서져 흩날리고 있었다.오늘 처음 본 그 청년에게서는 시원한 바람의 향기가 났다.

나는 소리 없이 감탄을 쏟아내며 주변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거친 바닷바람이 몹시 상쾌하다. 선체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마저도 즐거웠다. 청년은 이따금 흘끗거리며 내 기색을 살피는 듯했으나,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심장이 떨려 오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좀처럼 느낄 일 없는 전율이었다.

얼굴을 촉촉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닷물은 생각보다도 더 차갑고 시원했다.

청년은 한참을 더 나아간 후에야 속력을 느즈막히 낮추었다. 어딜 둘러봐도 푸른 땅뿐인, 그 야말로 망망대해였다. 수평선 위에 구름이 살며시 흘러드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파도가 너울거리며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청년은 나를 지나쳐 선창으로 향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다리를 퍼덕거리고 몸을 편안하게 누인다. 내가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자, 문득 시선을 의식했는지 불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왜요, 난 남 관광시켜 주는 덴 소질 없어요.” “저도 관광시켜 달라고 한 적 없는걸요.”

“이상한 사람이네, 진짜.”

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대도 마냥 좋았다. 드넓게 이어진 수평선을 보고 있자니 마음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그가 한 것처럼 편안하게 몸을 누였다. 멍한 표정이눈에 들어온다. 오늘 모처럼 꺼내 입은 좋은 코트는 아무래도 바닷물과 소금에 잔뜩 절여질 운명인 모양이었다.

눈을 감자 잘게 부서지는 햇살이 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 온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겨울의 한없이 차가운 색감을 모두 들이마시고 저 파도에 휩쓸려 얼어붙고 싶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파도가, 그 품에 영영 안기고 싶을 만큼 안온했다.

내 쪽을 바라보았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길 반복하던 청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법 볼 만하죠?”

“네. 바다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거, 거의 처음이에요.”

“겨울에는요, 물 위로 눈이 쏟아지는 풍경이 장관이거든요.”

“많이 보셨나 봐요.”

“질리도록 봤죠. 첫눈이 올 때마다.”

여기는 눈이 정말 많이 와서 말이에요. 청년은 그렇게 덧붙이고는 슬쩍 웃었다. 티 없이 맑았던 하늘에 저편에는 어느샌가 드문드문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햇빛을 살짝 가리고는, 저게 어쩌면 차가운 눈을 품은 구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보고 싶네요. 바다 위로 눈이 내리는 모습.”

“그쪽이 그렇게 하염없이 쳐다보던 푸른 바다의 색은 아닐 거예요.”

“그래도요.”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거친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나부꼈다. 겨울을 품은 바다는 제법 추웠 다. 코트 자락을 여미던 내가 몸을 웅크리자 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다시금 배에 시동을 걸 었다.

“감기 걸리기 전에 이만 돌아가죠.”

서서히 짙어지던 푸른 땅이 못내 그립고 아쉬웠다는 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충분히 전 해졌을 터였다.

청년은 기어코 사례금을 받지 않았다. 다만 제가 보트를 끌고 바다에 나갔다는 사실은 동네주민들에겐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만을 남겼다.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어쨌거나 바다에 나가는 게 그에게도 비밀스러운 일탈 비슷한 것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한적한 마을에 남았다. 첫눈이 오는 바다를 보고 싶다는 욕심 이었다. 하루 정도로 계획해 두었던 여행은 지지부진 늘어져 사흘째를 맞이했다. 눈꽃은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낯선 곳에 떠밀려 와 있다는 것이 나름 만족스러웠 다.

시골의 밤은 조용했다. 가로등이 이따금 깜박거렸고, 드문드문 이름 모를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빛이라곤 한 조각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데, 파도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철썩 거렸다.

새까맣게 칠해진 밤하늘에는 조각조각 별들이 떠올라 있었다.

우주와 나. 끝없는 공허 속에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감각. 그건 해안가의 밤이 선사하는 심술궂은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끝없는 허무였다.

이끌리듯 바닷가로 향했다. 깊은 어둠을 품은 파도가 간간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해무 너머의 어딘가엔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해줄 등대도 서 있을까. 나는 보일 리가 없는 어둠 너머를 바라보며 뭉툭한 돌 하나를 바닷물 속으로 가볍게 던져 넣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해 수면을 깨뜨린 돌이 소용돌이 속에 집어삼켜지듯 가라앉는다.

겨울철 밤하늘은 제법 아름다웠다. 얕은 지식으로나마 알아볼 법한 별자리들도 몇 점 늘어서 있었다. 몇 광년씩 떨어져 있는 별들도 빛을 뻗어 별자리라는 가족을 만드는데,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나. 이제 와 뒤늦게 떠오르는 건 내가 먼저 놓아버린 수많은 인연에 대한 얕은 후회였다.

소리 없이 밀려든 파도가 발목을 적셨다. 얼얼할 정도의 추위가 발끝을 타고 서늘하게 올라왔 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푹 젖어버린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었다. 그러고는 힘껏 비

틀 어 물을 짜냈다. 안온한 한기가 내려앉는다.

“…아.”

별들이 슬금슬금 자취를 감춘다 싶더니만. 문득 고개를 들자 얼음 조각들이 하나 둘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흰 눈만큼은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차가운 겨울의 파편들을 쥐었다가, 형체도 없이 녹아 스러지는 것들을 두 눈에 담았다.

물 위로 눈이 쏟아지는 풍경이 장관이거든요. 문득 이름 모를 청년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오른건, 분명 우연은 아닐 터였다. 한낮의 반짝 거리는 바다가 기억 속에서 출렁였다. 내가 예상한 것만큼 그리 아름다운 색은 아닐 거라는 청년의 말도 함께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자 문득 검고 깊은 바다가 보고싶어졌다. 꽁꽁 언 발을 끌고서 며칠 전 나를 데리고 훌쩍 떠났던 그 배를 찾아 달음질을 시작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지금 가면 그가 있을 것 같았다.

희미하고 따뜻한 색의 불빛이 해무 속에서 기적처럼 나타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고.

“시간 맞춰서 잘 오셨네요.”

“…저기.”

“이번엔 탑승료 받을 거예요. 빠져도 못 구해주니까 그건 감안하시고요.”

“아”

“한밤의 항해는 제법 위험하거든요.”

작은 태양처럼 불빛을 흩뿌리는 등불이 그곳에 있었다. 청년이 흔들거리는 불빛 사이로 밝게 웃었다. 나는 이번엔 제법 능숙한 몸짓으로 배 위에 올랐다. 차가운 눈송이들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다. 푹 젖은 신발과 꽁꽁 언 발을 본 청년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곧 마른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속 깊은 이야기는 묻지 않은 채였다. 출항은 순조로웠다. 한밤의 바다는 예상한 만큼 매서웠으나 청년은 흔들거리는 키를 붙잡으

면서도 내내 즐거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나는 배에 달린 백열전구 너머로 쏟아지는 진풍경을

바라보았다. 빛나지 않는 별들이 탁한 어둠 속으로 내려앉는 광경이 제법 웅장했다. 청년은 배의 속력을 늦추고는 내게 두터운 담요를 한 장 걸쳐 주었다. “멋지죠?”

“네, 제법.”

“…내년에도 보러 와요.”

“…….”

“우리 동네, 바다만 멋진 게 아니라. 눈이 쌓이면 육지도 나름대로 봐줄 만하거든요.”

“…….”

“눈에 햇빛이 통과하면 진짜 예쁜 푸른색이 비치는 거 알아요?”

“정말요?”

“에메랄드빛 바다를 품은 눈 동굴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죠?”

청년의 다정한 말에 문득 떠오른 건 푸른색의 공중전화 부스였다. 수신자가 없는, 이제 기다

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유독 쌀쌀했던 그 날의 추억도 기억도 전화선 너머에 남겨두고 와

버린 낡은 수화기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청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 한 잔을 건네주곤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

고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처음이었어요.”

“뭐가요?”

“다른 사람을 태우고 바다로 나가본 거요.”

고개를 들자 그림자가 드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의 눈동자에 밤하늘이 떠올라 있었다. 별 한 점 빛나지 않지만, 허무와 열망이 뒤섞여 무언가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는 담백하게 답했다. “처음치곤 능숙하던걸요.”

“사실은 엄청나게 긴장했거든요? 그쪽은 항해라곤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지, 여기서 사고라도 내면 다 내 책임이지. 제 딴엔 엄청난 결심이었다고요.”

“그런데 왜 태워줬어요?”

나는 코코아를 홀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 길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어둠과 빛이 뒤섞

인 밤을 가르고 올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그쪽이 먼저 손 내밀었으니까요.”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의 그 무모한 용기를 곱씹었다. 평소와 같은 나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 모든 결정들이 후회로 남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그렇게나 벅차오를 수가 없었다. 수신자 없이 울리던 전화를 받은 것도, 청년에게 배를 태워달라 부탁했던 것도. 뺨으로 송이송이 떨어지는 눈꽃이 얕은 한기를 남기고 녹아들었다. “금방이라도 물거품이 될 것 같은 표정이었거든요.”

“…….”

“사람들은 때때로 비이성적인 결정을 하잖아요.”

“그런가요.”

“나도 그랬던 걸로 쳐요.”

“…….”

“충동적인 낭만은 삶을 충만하게 만들곤 하죠.”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재차 키를 잡았다. 등불을 단 배는 검은 파도를 가르며 다시금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부두 가까이에 퍼져 있는 불빛들은 우리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것처럼 멀리서 빛을 보내왔다. 어둠과 해무가 가득 내려앉았던 부두에 희미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또 와요.”

청년이 웃었다. 처음 보는 따스한 웃음이었다. “추운 날엔, 좀 따뜻하게 입고.”

“저기.”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의 묘한 인연을 되새기면서.”

배가 미끄러지듯 부두에 정박했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괜찮다

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얼른 가 보라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충분히 만끽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해안가를 벗어나 정처 없이 걸었다. 늘 목적지 없이 살아가던 삶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그다지 없는 삶이었다. 그랬기에 그리 간절히 붙잡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본인이 이뤄 놓은 것 때문에 연명하고,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살아가는 법이니까. 걸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마음을 재촉하며 흐트러지는 숨을 간신히 다잡았다. 그간 어설프게 익혀 두었던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땐 거의 뛰다시피 발을 구르고 있었다. 목적지는 단 한 곳이었다. 골목 사이사이,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푸른 전화 부스. 축축하게 젖은 길은 망설임을 품을 때마다 서서히 얼어 갔다. 땅을 박찰 때마다 유쾌하지 않게 미끄러지는 감각과 함께 아릿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밤은 더욱 깊어 가고, 가로등이 빛을 내지 못하는 길목은 어두웠으나 그럼에도 무언가 차오르는 감각이 하염없이 좋았다. 내 안에 고여 흘러가지 못하고 있는 검은 바다는, 마치 얼룩덜룩한 색의 물감과도 같아서. 틀림없이 잘 될 거라는 정도로의 온화한 말로는 좀처럼 덮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겨서. 그래서 나는 이전에, 얼굴 없는 친구가 곧잘 말해주곤 했던 틀림없이 잘 될 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근거도 믿음도 없으면서 너무나도 쉽게 내뱉는 그 말이 너무나 싫었다. 잘 되지 못하면 그건 내 탓일 것만 같았고, 기약 없이 잘 될 거라는 믿음 하나로 애쓰며 살아가는 것도 싫었다. 허울뿐인 위로에 기대어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지금 당장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몇 마디가 당장 들이닥칠 내일을 더 나아지게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허울뿐인 몇 마디가 나누고 싶어서 하루를, 이틀을 더 이겨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느릿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가쁜 숨결 너머로 허연 입김이 흩어졌다. 착실하게 이어지던 통화 연결음은 어느 순간 끊어지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바닷속을 동경할 때가 있었어요.”

땅 위에서 내뱉는 숨이 너무나 무거웠던 순간이 있었거든요.

다정한 침묵이 흐른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화기 건너편의 사람은 내가 날것의 감정을 오롯이 토해내기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이것도 저것도 감당이 안 되는 무력함이 원망스러웠고, 때로는 나를 이끌고 내일로 나아가는 것조차 벅차서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아예 없었다고는 절대 말 못 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좌절이 분명 있었고, 이겨내기엔 내가 나약한

존재였으며, 내게 이겨낼 힘이 없다는 것조차 미웠던 순간도 꽤 많았어요.”

“그런데 그때, 처음 보는 전화 부스가 눈에 띄어서.”

나 혼자 끌어안기에는 너무나도 벅찼던 하루를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어서.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어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위해 고민해주고 귀 기울여준 게 못내 고마워서, 이야기를 하고 나니 조금은 홀가분해서. 그리고 내가 견디지 못 할 뻔한 이다음 하루가 궁금해서. 그래서 지지부진 겨울 여행을 올 때까지 버텼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 봄이 왔더래요. 그때 이것저것 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 점점 늘어나요.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기분이 어때요?”

“…….”

나는 문득 수화기를 내리고 부스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가는세상이 시야에 비친다. 낮이 되고, 해가 떠오르면 저 눈 틈으로 오색 찬란한 빛이 통과하며 아름다운 푸른색을 자아낼까. 그것이 또 궁금했다. “한없이. 한없이…….”

아름답다. 행복하다. 감동적이다. 그런 상투적인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감정이었기에 나는 말끝을 흐린 채 작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억해요. 다른 사람들이 따뜻하게 손을 잡아 줄 수 있었던 건, 그대가 먼저 손을 내밀고자

용기를 내 준 덕이라는 걸.”

“…….”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이름 모를 누군가가 담백한 감사를 전했다.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이 고여 있던 바다는 어느

틈에 자라난 강물을 타고 서서히 원래의 물결을 찾아간다. 나는 감사 인사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가시지 않는 여운을 한참 곱씹으며 전화 부스를 나섰다. 아플 정도로 따스했던 이 인연에 다음은 존재하지 않기를. 어디선가, 이런 각별한 이가 존재했다는 것만 기억 한 구석에 남겨두고 조금쯤 반짝거리는 기억으로 회상만 하게 되기를. 외로이 멀어지는 이들이 한 명도 없도록 모두 구하고자 하는 숭고한 그대들의 의지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한적한 길거리엔 깜박거리는 가로등 불빛만이 완연했다. 바닷가의 밤은 요란하고도 고요하다. 눈이 쌓이는 소리, 파도가 밀려들었다가 얄밉게 빠지는 소리. 나는 자연이 선사하는 온갖 수다에 귀를 기울이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내내 꺼져있던 화면에는 익숙한 부재중들이 몇 통 쌓여 있었다. 나는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본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그들을 허무하게 놓아버리는 일이 없도록.

“여보세요.”

“응, 엄마. 나 잘 지내지.”

새벽은 그렇게 또다시 흘러간다. 광명이 가득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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