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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회 창원대문학상 수필부문 장려 - 스무살, 나는 살구색 크레파스를 쥐었다
  • 창원대신문
  • 승인 2019.03.07 17:25
  • 호수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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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나는 살구색 크레파스를 쥐었다

 

김민정 / 경영대·경영학과 3학년

 

 

“이건 살색이 아니라 살구색이라고 해요.” 크레파스 하나를 집어 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던 미술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교실 안의 모든 아이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스케치를 하던 아이, 연필을 깎던 아이, 사물함 앞에 서 있던 아이. 그리고 영수도 그중 하나였다. 영수는 북한에서 전학 온 학생이었다. 전학이란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이가 우리 학교를 다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지역이라 함은 대개 같은 사투리를 사용하는 지역이었고 드물지만 서울에서 전학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철조망 국경지대를 넘어서 전학 온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반에서 구김살 없기로 소문난 아이 하나가 교무실에서 그것을 엿듣고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삽시간에 소문이 된 그 말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보다 5살이나 많다는 둥, 실제로 봤는데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둥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가기도 전에 담임선생님의 귀에 닿았다. 우리 반 전학생은 아니에요. 그래도 같은 학년 친구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 선생님은 침착한 목소리로 그날의 종례를 마쳤다.

 

가방끈을 끝까지 조여 매고 주먹 쥔 손을 흔들지도 않으면서 앞만 보고 걷던 뒷모습.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영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랬다.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운 단군할아버지의 혈통을 나눠가진 영수의 외양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영수라는 사실은 이름표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많은 아이들이 붐볐다. 수많은 아이들 중 영수 주변에는 폴리스 라인이라도 설치한 마냥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대신 눈짓으로 가리키거나 소곤거리며 영수의 존재를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다음 해 나는 영수와 같은 반이 되었다. 영수가 전학 온 몇 개월간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르는 아이들이 없었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는다거나 혼자 하교를 한다거나 하는 사소한 행동까지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아이들은 영수와 자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일에 무서우리만큼 몰두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영수의 친구는 되지 않았다. 영수는 늘 혼자였고, 친구 대신 많은 관람객을 두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고 모든 가십거리가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 거품은 자연스레 걷히기 마련이다. 영수의 경우도 다를 바가 없었다. 새 학년을 맞이한 교실 속 아이들은 새 친구를 사귀기에 분주했고 분위기는 들떠있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자신을 소개했고 뒤이어 영수를 불렀다. 전학 온 지 1년이 지난 영수는 여전히 전학생이었다. 짧게 자기소개를 한 그는 다시 자리로 앉았다. 영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들었지만 자기소개를 통해 더 알게 된 것은 북한에서 바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과 그곳에 적응하지 못해 이곳으로 전학을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영수는 우리 반이 되었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고 아무 데도 없었다. 교실 어딘가를 항상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챙겨주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반은 두어 달에 한 번씩 짝꿍을 바꿨다. 옆자리에 앉는 짝꿍을 바꾸는 일에 눈에 불을 켠 아이들은 많았다. 자리는 항상 제비뽑기로 정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나는 수없이 많은 짝꿍을 만났다. 나의 짝꿍들은 키가 크거나 인기가 많거나 그림을 잘 그리거나 북한에서 왔다. 그날 제비뽑기로 뽑은 나의 짝꿍은 영수였다. 나는 반에서 반장을 맡은 적도 있을 정도로 붙임성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짝꿍인 영수와 친구가 되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수의 짝꿍이자 반장이었던 나는 그와의 대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말들은 의식적으로 솎아내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영수도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학교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통일’이었다. 학기마다 통일 글짓기, 통일 포스터를 그렸다. 물론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는 통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민족의 소원과 염원이라는 글이 들어간 표어는 늘 우수상을 차지했다. 우리는 통일은 멀지 않았고 북한은 한민족이라고 배웠다. 선생님께서는 서울 사람들이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듯이 북한 말도 그와 같다고. 우리는 통일을 위해 북한 말을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배운 북한 말은 주로 단어였는데 가령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부른다는 것이었다. 영수도 그 수업을 들었고 담임선생님은 그를 앞에 두고 북한 말을 가르치는 스스로를 퍽 민망해했다. 그런 시간이 자주 있었다. 영수가 발표를 하는 날도 있었다. 말수 없던 전학생은 주로 북한에서 지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제 들어도 생경한 말투였지만 흰 종이에 한 글자씩 눌러쓰듯 말하던 그의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세웠다. 화자에 대한 존중보다는 그저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얼굴이 가득했다. 어느 날은 북에 두고 온 여동생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바투 깎은 손톱처럼 단정하고 짧은 머리를 감싸며 울었다. 그리고 나는 눈물 흘리는 영수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다. 조도 낮은 얼굴의 영수는 흰 종이를 아무렇게나 구겨버린 듯한 표정으로 엉엉 울었다.

 

이후에도 영수는 늘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은 교실에서 더부살이하듯 시간을 보냈다. 그의 눈물은 진종일 큰 화젯거리였으나 그 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실의 아이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뉘었다. 그에게 무례하거나 무관심한 척했다. 꽤나 영수와 친해졌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선을 넘었다. 영수는 목숨 걸고 3.8선을 넘어왔고 아이들은 그런 영수가 그어놓은 선을 제멋대로 넘나들었다. 누군가는 그를 앞에 두고 킥킥대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이 영수에게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통일 포스터를 그렸다.

 

“살색이 아니라 살구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 세계의 모든 친구들의 살색이 우리와 같지 않기 때문이에요. 피부가 조금 검거나 흰 친구들도 있으니까. 우리와 다른 거지 틀린 건 아니에요. 다르다고 해서 괴롭히면 안 돼요. 그래서 살색이 아니라 살구색이라고 해야 해요.” 아이들을 집중시킨 선생님은 앞으로 살구색이라고 불러야 하는 크레파스를 들고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하등 상관이 없었다. 나의 살은 살구색이었고, 살구색은 나의 살색이었으니까. 어떻게 불러도 그만이었고 살구를 실제로 본 적 없던 나는 그 색을 주로 살색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듬해에 피부가 살구색인 영수는 전학을 갔다. 반죽 좋고 구김살 없이 교무실을 드나들던 아이의 말에 따르면 영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전학을 갔다고 했다. 반 아이들은 그가 전학 간 이유에 대해서 짐작했으나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스무 살 겨울. 몇 년 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새내기라면 으레 그렇듯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귄다거나 첫 학과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누구는 이번 겨울 유럽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이야깃거리가 밑천을 드러낼 때 그중 하나가 영수 이야기를 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북한에서 온 아이. 아이들은 그 친구의 이름이 영수라고 했다. 성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분명 내 짝꿍 영수였다. 연이 다했는지 전학 간 영수를 만났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모두들 영수가 여동생을 만나 보통의 삶을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기억은 많은 것을 왜곡하고 영수에 대한 이야기는 부풀려졌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취업이나 성적 얘기를 하며 꽤 그럴싸한 어른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중 하나는 조별 과제 발표를 맡았다고 우쭐하며 말했다. 발표할 때 살구색 블라우스에 슬랙스를 입고 단화를 신었다고. 스스로가 제법 어른 같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살색 크레파스를 칠하던 그녀는 살구색 블라우스를 입고 발표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살구색과 살색을,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피부가 살구색인 영수를,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던 영수를, 우리와 다른 말씨를 쓰던 영수를, 이방인이 아닌 동급생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십 년이나 걸렸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영수를 머릿속으로 스케치했다. 흘리던 눈물을 부여잡던 어린 영수의 얼굴을 살구색 크레파스로 색칠하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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