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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창원대문학상 소설 가작-진눈깨비

송광원/공대 산업시스템공학과 1학년


거짓말쟁이. 이 단어만큼 나를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온 20년 중 10년 이상을 거짓말을 일상으로 해왔으니까.

거창한 거짓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불리한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기 위해. 진실과 거짓말을 섞어서 이야기하고 진실의 일부를 감추면서 이야기를 하고 거짓말을 진실처럼 보이게 이야기를 해왔다. 누구나 다 해보는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 정도가 틀리다. 거짓말로 나를 괴롭히던 반 친구 한명을 중태에 빠트려서 병원에 보내고 나는 용의자 선상에서 빠진 경험도 있으니까.

그 일에 대해서 죄책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녀석이 나를 괴롭혔던 일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인지한 채로 기억 속에 묻어 둘 수 있었다. 거짓말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진실 되게 살아가는 것 보다 쉽다는 것을.

실제로 거짓말을 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많다.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신뢰 받는 학생이 되기도 하니까.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스킬일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거짓말을 하면서 그렇게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싸늘한 꽃샘추위가 봄이 다가왔다는 것을 실감나지 않게 하지만 흩날리는 벚꽃으로 인해서 분홍빛으로 물든 교정을 보면 봄이라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입고 있던 검은색 야상을 추스르고는 흩날리는 벚꽃 한 잎을 손으로 잡아본다. 손에 닿은 듯 한 느낌도 없을 정도로 가볍고 존재감도 약하지만 이런 것들이 한 없이 쌓이면 이런 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는 것이 새삼 대단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도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 발에 밟혀서 길거리를 지저분하게 만들겠지만.

“너, 우리 과 신입생이지? 이우혁이였던가?”

얼마 전 있었던 입학식보다 빨랐던 OT때 뵀던 선배가 다가온다. 딱 봐도 체육계열이란 느낌이 드는 체격에 아직은 싸늘한 날씨에도 얇아 보이는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데 인상도 조금 험악하게 생겼기에 잠깐 봐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선배이다. OT 봤던 느낌으로는 항상 웃고 활기찬 그런 후배를 좋아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감상에 한껏 빠져있던 표정을 추스르고 웃는 얼굴을 만든다. 입으로만 만드는 거짓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 같은 눈웃음을 짓는 것은 힘들지만 여러 번 하다 보니 이젠 자연스럽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

“너같이 싹싹한 녀석은 마음에 드니까 기억해 둔거지. 우리 과 신입생들은 다 저기 모여 있으니까 빨리 가 봐라.”

선배는 장난삼아 등을 가볍게 친다고 가볍게 쳤지만 욱하는 성질의 사람 이였다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날릴만한 세기로 등을 쳤다. 이정도로 연기가 풀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가볍게 웃으며 선배가 가리킨 곳으로 빨리 움직이는 듯 느긋하게 걸어갔다.

이후로 이어진 과모임 술자리에서도 술은 적당히 마시면서 여러 사람들에 맞춰서 표정을 바꿔가며 어조를 바꿔가며 나 자신을 연기해 냈다. 아마 내일부터는 과에서 많은 집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 할 수 있을 정도로 동기나 선배의 눈빛이 바뀐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끝까지 버티며 다른 사람들을 보내고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담배 한 갑을 산 뒤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와 냄새가 싫어서 불을 붙일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물고 거리의 풍경을 바라봤다. 바람에 아직도 흩날리는 벚꽃 뒤로 펼쳐진 야경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거짓말을 하면서 보낸 하루의 끝에는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담배를 살 수 없을 때는 거울을 마주보다 잠들었지만 최근에는 이렇게 담배를 물고는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저 야경 속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매일을 보낼까. 거짓말을 하는 생활이 익숙은 하지만 안 하고 지내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다 담배를 던져버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밖으로 던져버린 담배만 3갑을 채워갈 때 쯤이였다. 인간관계 형성이라는 것은 중요하게 여겼기에 나는 과 생활뿐만 아니라 동아리 활동이나 알바까지 할 수 있는 활동은 모두 했다. 바쁘지만 이런 인간관계를 형성해서 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는다는 행동이 거짓말쟁이인 나의 유일한 낙이였으니까.

그런 나의 흥미를 끄는 대상이 생겼다. 아니 흥미라기보다는 내 인생을 통째로 부정해 버리는 대상.

변함없이 즐거운 척을 가장하고 술자리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술자리는 다름 아닌 여자 친구에게 차인 선배를 위로해주는 자리.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실연에 잠긴 선배를 위로하는 것과 새벽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버틸 만은 했지만 담배가 다른 때보다 간절하게 물고 싶어졌다. 참지 못해서 화장실을 가는 척 하고 구석에서 한 개비 물고 오려고 일어나려는 때였다.

테이블을 세게 주먹으로 내려쳐서 주목을 집중시킨 것은 여자애였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에 예쁘냐고 묻는다면 보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애였다. 그렇지만 존재감이 흐릿했기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기에 머릿속에는 그녀가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울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자신의 일 때문에 후배한테까지 민폐 끼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언제까지 술을 드실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하고 저희는 그만 보내주시죠.”

그 말을 듣고 든 생각은 한심하다는 생각이었다. 저런 말을 해서 얻는 것이 뭐가 있지? 선배에게서의 평가는 떨어질 뿐이고 피해보는 건 저런 말을 꺼낸 사람이다. 물론 술자리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좀 더 있었으면 끝날 분위기였는데.

물론 생각만을 하고 그냥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충격을 가한 것은 그 뒤에 이어진 선배의 말이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미안하다. 오래 잡아서. 오늘은 그만 해산하자. 나도 오늘은 충분히 마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을 꺼낸 선배의 표정은 억지로 끝내는 것이 아닌 조금은 후련하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내 거짓말로는 이끌어 낼 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아마 상당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찾아봤지만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강렬하게 남아있었고 그 날은 집에 들어가기 전 담배를 두 개비나 물어야 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 들였지만 어째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런 상황을 예상하고 한 행동인지 난 끝까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음 날부터 난 그녀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납득을 할 수 없기에 그녀를 관찰 하려 했었다. 평소의 그녀를 보면 어제의 그 행동을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 했기에. 그리고 그녀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성격을 가졌음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름은 강유리. 처음 본 느낌대로 존재감은 어디서나 흐릿했다. 하지만 존재감이 드러났을 때의 인상은 상당히 강렬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은 해야 하고 다가갈 때는 사람들이 서로 사이에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가볍게 넘어서 들어간다. 그 때문인지 그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호불호로 갈렸다.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들은 말이 있다.

“생각해보니까 너하고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네.”

주변과 상황의 흐름에 맞춰서 바뀌는 것이 나의 색깔이라면 그녀는 어떤 상황이든 그녀만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색깔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동은 내가 일관되게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던 거짓말쟁이가 최고라는 생각을 뭉개버렸다. 그렇기에 그녀에 대해 알아 갈수록 눈은 그녀를 더 쫓고 있었다.

“너 쟤한테 관심 있냐?”

눈치 빠른 과의 녀석들은 나한테 슬쩍 그렇게 물어봤고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살짝 웃어보였다. 물론 그 녀석들이 말하는 관심과 내가 의미하는 관심은 조금 다른 부분 이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내 행동으로 과의 녀석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잘해봐라”, 라던가 “도와 줄 테니 잘해봐.” 라는 말을 해왔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대학에 올라와서 거의 처음으로 꺼낸 내 진짜 속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며칠을 그녀를 관찰하다보니 그녀 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이고 다가왔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넉살 좋은 표정을 짓고 인사라도 하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표정이 굉장히 매섭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자판기에서 음료수라도 하나 뽑아서 건네줄까 하는 생각은 금방 머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며칠 동안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 이유가 너 때문이지?”

말투에서부터 짜증과 불쾌함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파악했지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서 이런 경우에 쓰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며칠 동안 네가 자주 보였다는 것은 사실이야.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하려던 찰나 그녀는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화를 내었다.

“경찰에 스토커로 신고하기 전에 그만 둬. 난 너 같은 녀석 매우 싫어하니까.”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약간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다시금 가던 길을 걸어갔다. 다른 말을 잇거나 거짓말로도 안 그러겠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떠나버렸다. 왠지 모를 짜증이 나긴 했지만 끝에 보였던 그 홀가분한 표정은 조금은 부러웠다.

그 일 이후로 그녀를 이전처럼 멀리서 눈으로 쫓으며 관찰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동기들의 도와주겠다는 말 덕택에 여러 모임에서 그녀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벌레 씹은 듯한 표정 이였지만 난 사람 좋아 보이는 거짓웃음으로 마주해 주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말을 거는 행동은 악담이나 들을 것이 뻔하다 여겼기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자 오늘 만난 술자리에서 그녀는 짜증난다는 표정 대신 그럼 그렇지 라는 의미를 내포한 한숨을 내쉰다. 그런 그녀의 작은 변화를 눈치 챈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최근에 자주 보네.”

“나 정말로 경찰에 스토커 때문에 어느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는 대인 기피증에 걸릴 것 같아요 라고 신고 넣고 싶은 마음이니 건들지 말아줬으면 하거든?”

전신에서 나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아우라를 풍기었지만 오늘 이후로는 진짜로 신고 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믈스믈 들었기에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지난번에는 네가 네 할 말만 하고 사라졌잖아?”

“스토커하고 오래 이야기하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몇 마디가 될 줄 알고 그렇게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럼 정정할게. 스토커하고는 몇 마디 나누는 것도 기분 나빠.”

이 정도의 반응일거라고 조금은 예상했지만 예상대로 들으니 확실히 기분이 나쁘다. 그래도 오늘 모임은 이제 막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비워가는 술병이 많아져 갔지만 난 술을 조금씩만 마시면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술에 강하지는 않은지 다른 애들에 비해서 적게 마셨지만 취기가 올랐는지 얼굴이 빨갛게 익었고 딸꾹질을 계속 한다.

조금 더 지켜볼까 생각했지만 이 이상 그녀가 술을 마신다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나지 않을거라 여겼기에 그녀가 잡은 술잔을 억지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것 같은데 데려다주고 올게.”

내가 유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동기들은 집 앞까지 배웅해주고 오라며 그녀의 가방까지 챙겨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반항을 하긴 했지만 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기에 반항다운 반항은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가게를 나선 뒤 그녀는 있는 힘껏 나를 밀쳐내고는 삿대질을 하면서 버럭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 스토커가 뭐하는 지시야!!!”

혀도 꼬였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녀를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혀 꼬여서 성 내는 것을 무시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물을 사와서 건네주었다. 이 과정에서 112를 누르던 휴대폰을 뺏은 것은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단 물 좀 마시고 정신부터 차려. 정신 차리면 휴대폰 줄 테니까.”

“범죄자의 마를 믿을 거가타!”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 후 큰 길가의 의자에 앉아서 쉰다는 조건으로 잠시나마 쉬게 되었다. 거리를 두고 앉아있지만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불안해 보인다.

“대체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뭐야.”

혀가 꼬인 것이 조금 풀리고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백기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어째서 나 같은 녀석을 싫어한다는 거야?”

따로 묻고 싶은 것이라면 어째서 직설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걸 처음부터 묻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궁금증을 먼저 물었다.

그녀는 짤막하게 한숨을 쉰 뒤 말을 꺼냈다.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척 다가와서는 남이 만들어 놓은 거리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무조건 상대방에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려는 그 행동이 짜증이 나. 알겠어?”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다가갈 뿐인데 그건 너무 억측 아닌가? 그렇게 모든 것에 의심을 한다면 호의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 않아?”

찔린다. 그녀의 말이 내 행동의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 같아서 서투르게 내 행동을 합리화 시킨다. 거짓말이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기에 다가간다고 합리화 시킨다.

그녀는 살짝 코웃음 친 뒤 말을 한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얼굴도 몇 번 안 본 사이에 그렇게 친하게 다가오는 건 무슨 속셈이 있다고 밖에 생각을 안 해서 말이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틀거리는 것을 부축한다. 부축 안 해줘도 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지만 비틀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서 부축을 안 할 수가 없다.

“만약 네가 나한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거라면 이전까지의 행동은 미안해. 스토커라고 상처 입히는 말을 한 것도 미안하고.”

“괜찮아. 이유를 알았으니까.”

“근데 말이야.”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한 번 안내는 건 마조히스트냐? 아님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진 거냐? 누가 들어도 어처구니가 없게 화가 날만한 말을 했는데 화를 안 내니까 무슨 속셈이 있나 보구나 하는 거 아냐!”

난 그저 쓴웃음만 지으면서 이마를 꾹꾹 누르는 손을 치워낸다.

“화를 낼 타이밍에 네가 가버린 건 생각을 안 하니.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했었고 나 같은 녀석이라는 데서 무슨 사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속도 편한 녀석이네.”

그 이후로 투덜대는 말을 받아주면서 가벼운 잡담을 나누면서 조금 걸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으나 도끼눈으로 매섭게 노려봐서 택시에 타는 것까지만 지켜봤다. 택시가 시야 밖에서 사라지고 나서 한 가지 사실을 눈치 챘다.

“휴대폰 안 돌려줬네.”

담배를 한 개비 물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는 순간에 알아차렸다. 분홍색 케이스인 휴대폰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 일로 유리와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 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내일도 그녀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낼 것이라는 거다. 그래도 내일은 이전보다는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 날 이후로 그녀가 나를 무시하거나 보자마자 짜증을 내는 경우는 없었다. 이상하게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가 짜증나는 듯이 대하고 내가 능글맞게 대해서 싸움이 나려는 듯한 상황이 자주 발생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이야기 나누기가 편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학기가 끝나가고 여름의 더위가 다가왔다.

두 번째로 맞이하는 시험기간은 중간고사에서 대부분의 과 동기들이 점수에서 시원하게 폭우를 맞았는지 술자리가 생기지는 않았다. 덕분에 나도 집에 빨리 가서 쉴 수 있는 시간이 늘어서 전보다는 여유로운 때이다.

공부를 하다가 도저히 집중도 안 되고 수식도 풀리지 않아서 담배를 한 대 물어보려고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바깥바람도 쐴 겸 편의점에 갔다 오는 길이였다.

“강유리.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으슥한 골목길 사이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서 혹시나해서 말을 걸어보니 진짜로 그녀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알기로 그녀의 집은 여기서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는 걸어가야 나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런 곳에는 무슨 일이냐 하는 것이다.

“우혁이 너네 집이 이 근처야?”

그녀는 날 발견하고 조금 안심한 듯한 표정을 잠깐 지어보였다가 말을 걸어왔다. 여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었지만 그녀가 다가오면서 가로등을 지나칠 때 난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빨간 것을.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눈가가 조금 부운 것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대답대신 편의점에서 담배와 같이 산 시원한 캔 맥주를 그녀의 눈에다가 가져다 대었다. 내 행동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알아차리고는 약간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캔의 시원함에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길거리에서 계속 그럴 수는 없었기에 자리를 근처의 놀이터로 옮겼다. 집에 들려서 아이스 팩이라도 가져올까 싶었지만 그녀를 여기 두고 갔다오기가 조금 그래서 캔 맥주를 그녀의 눈에 계속 대고 있게 했다.

매미 소리만 우리 사이에 가만히 머물렀다. 이럴 때는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가만히 기다렸다. 캔에 물방울이 더 이상 맺히지 않을 정도로 캔이 미지근해졌을 때 쯤 그녀가 말을 꺼냈다.

“야심한 밤에 이런 이상한 몰골 보여줬네.”

평소처럼 농담을 섞어서 말을 꺼낸 그녀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운되어 있었다. 그녀는 캔을 눈에서 뗀 뒤 따서는 쭉 들이켰다. 길게 한 모금을 마시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오늘 친하다고 여겼던 친구와 싸웠지 뭐야. 너하고 평소에 하는 그런 싸움이 아니라 진짜 절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들 정도로 크게 싸웠어.”

그녀의 목소리는 말을 할수록 점점 다운되어갔다.

“나는 평소처럼 친구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가 화를 내는 거야. 너는 네 할 말 다 하고 살아서 좋겠다. 근데 듣는 입장은 배려하지 않는구나. 그런 부분이 짜증난다고 말야.”

그녀는 어느새 캔을 다 비우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는 이제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렇게 싸우다가 끝에는 저주까지 들어버렸지 뭐야. 너는 나중에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잃게 될 거라고.”

그녀의 등이 조금씩 흔들리는 걸 보고 또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를 대신하고 있자 그녀가 말을 다시 꺼냈다.

“처음에 너한테 얼굴도 몇 번 안 봤으면서 친한 척 하는 사람이 싫다고 했잖아? 예전에 내가 그랬어. 이전에는 친구가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친구를 많이 만들고 싶어서 누구에게나 친하게 다가갔어. 그랬더니 친구는 많아졌어. 그런데 다가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나봐. 흔히 말하는 친구의 선을 넘어갔었던 거야. 남자인 친구들은 전부 다 내가 좋아해서 잘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여자 친구들은 내가 남자들한테 꼬리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남자인 친구들은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떠나갔어. 여자 친구들은 거리를 두고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어. 어느샌가 난 친구 한 명 없는 외톨이였어.”

나는 등을 토닥여주면서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툭툭 내뱉듯이 하고 누구하고든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어.”

일순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냈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 난 어떻게 지냈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를 좋아해 줄 수는 없어. 각자 사는 방법이 틀리고 좋아하는 성격이 다르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좋아해주던 사람은 있었다. 그런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괴롭힘 당할 때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괴롭히는 쪽에 가담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이든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된 거야.”

난 그런 사람이 없었기에 바뀌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겉으로라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기에 거짓말쟁이인 지금의 모습이 낫다고 여긴다.

얼마간의 침묵 후에 유리는 고개를 들고 살짝 웃어보였다.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있었기에 살짝 닦아주었다.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누가 싫다고 하더라도 말야.”

이전까지 내 이야기를 듯해서 진실을 얘기했기에 슬쩍 나는 네 편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난 무슨 이유인지 몰랐기에 그냥 웃고 있기만 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지, 지금 고, 고백한 거야?”

“그게 왜 그런 말이 되는 거야…….”

“그치만 분위기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은 고, 고백이나 마찬가지잖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이런 상황은 있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유리도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 좀 그렇지만 말야.”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고 조, 좋아해 준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그게 고백이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거짓말이긴 했지만 왠지 그걸 알아차리고 나니 급격히 더워진 듯 한 느낌이 든다.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손부채질을 하면서 다른 곳을 바라본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그녀가 말을 꺼냈다.

“고마워. 그런 말 해줘서. 난 딱히 싫은 게 아니니까. 사귀어도 좋아.”

“그럼……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게 점점 더워져 가는 여름 밤 그녀를 위로해주던 자리에서 난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감정은 없었지만 이제와서 거짓말로 네 편이라고 한거야 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연인이라는 것은 처음 생기는 것이지만 친구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난 여겼다. 실제로 그 날 이후로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맞은 긴 여름방학 동안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매일이 바빴기에 모이는 경우는 기껏해야 동기가 다 모이는 자리 정도였다. 둘이서만 만난다고 해도 연인처럼 보이기보다는 그냥 가까운 친구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사귀게 되었지만 친구와 비슷한 관계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2학기가 시작하고 여러 자리에 참석해서는 유리와 사귄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전까지는 딱히 숨기려 할 것도 없었기에 밝히지 않았었다. 그러다 술이 오가면서 우리 사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사귄다고 대답을 하면서 밝히게 되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축하한다. 부럽다. 같이 비슷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사귀는 걸로 안 보이네?”

궁금증 반, 의심 반의 어투로 물어왔기에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전부터 생각을 해왔다. 적어도 내 입장으로 보자면 좋아해서 사귀는 것이 아닌 어쩌다보니 사귀게 된 관계였기에 그들이 말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되었었다.

“사귄다고 바로 바뀌는 건 더 이상하지 않아?”

속에도 없는 말을 꺼내서 대충 둘러대고는 화제를 전환시켰다. 화제 자체는 이목이 집중되는 연애이야기였지만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다들 길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넘어갔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가 눈치 못 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쉽게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약 한 명 있었다. 그 사람, 아니 그녀는 다음날부터 반응을 보여 왔다.

“수업이 어딘데 그렇게 바쁘게 가?”

강의실을 가던 중 길거리에서 유리를 만났었다. 여기까지는 이전까지와 똑같았다. 평소보다 말투가 조금 부드러웠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서 자연스럽게 팔짱을 했다.

내가 놀라서 입을 벌리고 멍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만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그녀의 귀가 빨갛게 변한 것은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팔을 빼내면서 대답을 했다.

“수업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말야.”

팔을 빼내던 것을 알아차렸는지 내 팔을 더 꽉 끌어안는다.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팔 너머로 강렬하게 느껴져 왔다. 나는 포기했다는 듯이 빼내려는 듯한 움직임을 멈추고 팔의 힘을 뺏다.

“그런 것치고는 조금 급해 보이던데?”

내가 힘을 빼자 그녀 역시 팔에 힘을 자연스럽게 뺐고 타이밍을 재서 나는 팔을 한 번에 뺏다. 그리고는 다시 팔을 붙잡히지 않기 위해 그녀와 빠르게 거리를 뒀다.

“ppt자료 준비한 걸 강의실 컴퓨터에 옮겨놔야 하거든. 그럼 나중에 보자.”

행여라 붙잡힐까봐 강의실을 향해서 달려갔다. 왠지 뒤로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전까지는 스킨십이 없어도 괜찮았는데 오늘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나와서 반응하기가 참으로 곤란하다.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이내 이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나를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킨십을 해 왔기 때문이다. 매번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면서 왜 저러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일을 그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이주일이 지났지만 이런 행동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기에 도망만 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차가운 바람이 살을 베는 듯 한 겨울이 다가왔다.

“이야기 좀 해.”

그녀와 마주치고 또 다시 스킨십을 해올까 거리를 두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의미심장하게 꺼낸 말로 인해서 뭔가 올 것이 왔다고 여겼다. 도망쳐서 이 자리를 모면할까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순순히 그녀와 자리를 옮겼다.

따뜻한 카페 안으로 자리를 옮겨서 각자 커피를 시키고 커피가 나올 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눈치만 보는 느낌에 조금 거북한 침묵을 그녀가 먼저 깼다.

“스킨십을 피하는 이유가 뭐야?”

담담한 어조로 꺼낸 말은 평소의 그녀와 많이 달라서 나도 모르게 진실을 말할 것만 같았다.

“그냥 남들 다 보는데서 그러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뿐이야.”

“다른 사람 없을 때도 피하잖아.”

“서로 할 일이 있는데 붙어 있는 건 불편하잖아.”

“내 눈 똑바로 보고 이야기 해.”

그녀의 말에 움찔하면서 똑바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봤다. 왠지 슬픈 빛을 띠는 눈을 바라보자 숨이 턱 막혔다.

“나도 바보는 아니야. 네가 대답하기 곤란해서 거짓말을 하려는 때는 알아. 그러니까 내 눈을 보면서 이야기 해. 스킨십을 피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이윽고 깨달았다. 그녀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한계라는 것을. 나의 거짓된 모습 모두를 보여주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

언젠가는 와야 할 일이 지금 닥친 것뿐이다. 나는 천천히 거짓말을 시작하게 된 그 날 일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놨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귄 것이라는 것까지 전부.

이야기가 끝날 때 쯤 밖의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일기예보로는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날씨가 추워서 눈이 오지 않을까 싶다.

앞을 바라보자 그녀가 쥔 커피 잔이 떨리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일까. 아니면 믿었던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일까. 그리고 저 모습을 보는 난 왜 가슴이 아플까.

“거짓말을 해 왔던 것은 미안하게 됐어. 금전적인 보상 같은 것은 해 줄 수가 없고 해 줄 수 있는 건 눈앞에 안 나타나는 것 정도 일 것 같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도저히 저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건 가슴이 아파서 안 될 것 같다.

커피 잔을 정리하고 밖을 나서서 한숨을 내쉬자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가 사라진다. 후련한 느낌과 갑갑한 느낌이 동시에 느껴져서 뭔가 답답하고 어지럽다. 이 상태라면 오늘은 물기만 하던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우혁!”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정말로 전부 거짓말이였던거야?”

나는 활짝 웃음 지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까 들었잖아? 너를 관찰한 이유도.”

표정을 바꾸어서 슬픈 듯한 표정으로 바꿔서 말을 꺼낸다.

“친한 척 다가갔던 것도.”

표정을 바꾸어서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내는 표정으로 바꿔서 말을 꺼낸다.

“위로해주면서 사귀었던 것도.”

표정을 풀고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보면서 말을 꺼낸다.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씩 신체가 떨리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럼……끝까지 거짓말하지 왜. 왜 이제와서 진실을 말하는데?”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이유를 모르고 있기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는 나와 대답을 원하는 그녀 사이에 침묵만이 흐를 때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정확히는 눈과 비가 섞인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너와 나의 관계도 이런 진눈깨비였을거야. 보기에는 눈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쌓이지 않고 그저 사라질 뿐인 관계.”

손 위로 하얀 눈송이와 빗물이 같이 떨어진다. 그리고 둘 다 물방울로 변하여서 손에서 흘러내린다.

나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먼저 떴다. 도저히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거짓일 뿐인 관계를 연기해 왔을 뿐이라서 그냥 그걸 끝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다. 다른 일들을 모두 취소하고 그저 집에 누워만 있었다. 가슴이 아리고 머리가 복잡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누워만 있다가 진눈깨비가 그치고 자정이 될 무렵 담배 한 개비를 물기 위해서 밖을 나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밖을 나온 순간 또 골목길 사이로 돌아다니는 그녀를 볼 수가 있었다. 이제는 말을 걸 처지도 아니었고 또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려서 나중에 다시 나와야지 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이우혁!”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발걸음이 멈췄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발소리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쯤 나오나 한참을 돌아다녔는데. 너무 늦게 나왔잖아.”

“그게 무슨…….”

‘ 이 늦은 밤까지 집이 어딘지 몰라서 동네를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는 말이야?

놀라서 뒤를 돌아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추위로 빨갛게 변한 그녀의 손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진눈깨비 같다고 했지? 겉으로 보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사라질 뿐이라고. 하지만 말야. 진눈깨비도 하염없이 내리면 이렇게 쌓이는 법이야.”

그녀는 눈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목적을 달성했는지 손에서 눈을 털어냈다.

“우리의 관계는 너의 거짓말로 시작됐어. 그런 관계는 네 말대로 아름다워 보이고 진짜 같아 보이지만 쌓이지 않는 진눈깨비라는 게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진눈깨비도 쌓이는 법이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강한 확신과 자신감이 작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의 목소리였다.

“우리의 관계도 조금은 쌓였다고 생각해. 왜냐면 네 말을 듣고 배신감이 들긴 했지만 너를 잃는다는 사실이 슬펐고 나에게는 진심을 말해줬다는 사실이 기뻤으니까.”

“그래도 난 거짓말쟁이라고?”

“그럼 거짓말쟁이가 진심을 말한 이유는 뭐야?”

“그건…….”

“그래서 난 우리의 관계가 모두 거짓은 어니였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번에는 거짓말이 있더라도 조금은 진실 되게 시작해보지 않을래?”

나는 가슴에 시리도록 아픈 것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이유를 그녀가 찾아 내줬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의 관계는 거짓이라도 전부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그녀의 빨간 두 손을 꽉 쥐었다. 왠지 눈앞이 그렁그렁한 것이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 상당히 흉한 몰골이지 않을까.

“미안했어.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해.”

오늘은 거짓이 아닌 진실 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놨고 몇 십 년 만에 거짓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지었고 1년 동안 줄기차게 물어오던 담배를 물지 않았고 거짓말쟁이인 나와 그녀는 진짜 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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