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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우리 한옥, 그 뒤편의 영웅 정세권
  • 정주영 기자
  • 승인 2023.03.13 08:00
  • 호수 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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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역사가 물씬 담긴 우리 한옥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약속 장소이자 데이트 명소로 자리 잡았다. 쉬는 날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북촌 한옥마을에 다녀온 기자는 한옥의 정적이고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독보적인 분위기에 압도됐다. 그렇게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거닐던 중 우연히 ‘북촌 한옥 역사관’을 발견해 한옥의 역사를 듣게 됐고, 대단한 업적을 가졌으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알게 됐다. 오랜 시간 여전히 사랑받는 한옥 뒤편에는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정세권의 노고가 있다. 민족을 위한 한옥 설계와 임대 사업을 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문화를 개척해 나간 건축왕 정세권의 A to Z를 알아보자.


위기의 조선과 북촌
보통 한옥을 떠올리면 옛날 중에도 먼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북쪽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북촌의 한옥마을도 조선시대 즈음에 만들어진 건축물일까? 사실 북촌 한옥마을은 구축된지 거의 100년밖에 되지 않은 장소다. 북촌 한옥마을은 1930년대 북촌을 재개발하며 생겼는데, 재개발 전 북촌은 궁궐이 북촌 일대에 있어 왕족과 권세 높은 양반이 주로 살던 동네였다. 서쪽은 경복궁, 동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이 있고, 청계천의 남쪽부터 남산까지를 남촌이라고 불렀는데 주로 가난한 선비가 거주했다.

이후 북촌과 남촌의 모습은 곧 달라진다. 일제강점기가 찾아오면서 일본인이 남촌 일부에 정착하게 되고, 1880년 후반부터는 남촌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왜 그들은 남촌에 정착했을까? 바로 조선에 궁궐이 있으니 북촌 진입까지 장벽이 있어 상대적으로 정착이 쉬운 남촌에 자리 잡은 것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국권피탈(또는 경술국치)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내에 일본 세력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이후 북촌은 조선인 주거지, 남촌은 일제의 주거지로 나눠지면서 서로의 주거지를 침범해선 안 된다는 암묵적 규칙까지 생긴다.

그러나 10여 년 만에 이 규칙은 깨지게 된다. 일제강점기가 길어짐과 동시에 일본인이 경성에 대거 들어오면서 북촌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조선의 임금이 낮은 걸 눈독 들인 일본인 사업가들이 조선에 일본 사업체를 많이 세우면서 일본인 거주지였던 남촌 인구가 폭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제는 본격적으로 북촌을 점령하고자 남쪽의 관공서 일부를 북촌으로 옮긴다. 심지어 사유지를 쉽게 건들지 못하니 경복궁을 훼손한 후 식민 통치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통치 기구를 여러 곳에 짓기 시작한다.

일제가 북촌까지 점령한 후 북촌의 땅값은 하늘을 치솟고,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조선인은 결국 북촌에서 밀려나게 된다. 당대 조선 인구 약 17만 명 중 4만 명가량이 집을 잃은 채 살게 된다.

 

터전을 잃은 조선인, 그리고 영웅의 등장
그 당시 경성에는 땅을 개발하고 집을 만들어 파는, 소위 말해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건축가인 ‘정세권’이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재력가이자 ‘건축왕 정세권’이라고 불렸다.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정세권은 고향을 떠나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는 경성으로 올라간다. 정세권은 경성에 무엇보다 필요한 건 집이라고 생각했고, 곧 집이 돈이 된다는 판단이 서자 북촌에 집을 짓기로 다짐한다. 이후 ‘건양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세우고 건축업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뛰어난 사업적 수완으로 첫 시작부터 성공적인 행보를 보인다.

정세권은 일제가 경성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게 거슬려 종로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북촌 진출을 막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종로는 북촌 지역에 포함된 청계천 윗동네로, ‘민족의 거리’로 불릴 만큼 조선인이 똘똘 뭉친 곳이었다. 정세권은 조선인 한 사람이라도 더 북촌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에 북촌에 땅을 사 조선인들을 위한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1920년대 후반 정세권에게 북촌 땅이 매물로 나오는 기적이 일어난다. 오늘날 명소로 발이 끊이질 않는 익선동은 당대에 왕실 종친이 대대로 살던 누동궁의 터가 있는 곳이었다. 누동궁 터는 무려 2,500평 규모였고, 정세권은 이 땅을 사 <익선동 조선인 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익선동 조선인 마을 프로젝트>
1920년대 조선의 주거지 양식으로 일본식 주택, 우리의 한옥, 서양 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진 문화주택이 있었다. 이중 문화주택은 전통 주택 건축의 비 기능성, 비 경제성, 비위생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에 따라 만들어져 편리성이 높아 가장 선호된 주거 형태였다. 그러나 정세권은 조선의 양식인 한옥으로만 집을 짓겠다며 다짐했다. 대신 기존 한옥이 아닌 도시형 한옥을 지어 편리성을 높였다.

전통 한옥은 마당이 넓고 규모가 커 많은 한옥을 지을 수 없었다. 이에 정세권은 누동궁 터를 잘게 나눠 전통 한옥을 개량했다. 마당을 축소하고 각 방과 화장실, 주방 등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동선을 대폭 줄여 편리성을 키웠다. 그렇게 총 68채의 한옥 단지가 세워졌고, 지금의 익선동 166번지 한옥마을(북촌 한옥마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세권은 한옥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했으나 경제적 상황이 좋은 조선인이 적어 주택 보급을 받지 못하는 인구가 많았다. 집을 사기 위해 목돈이 필요하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은 신용도가 낮아 목돈 대출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이에 정세권은 중류 이하 계층을 구제하기 위해 연부, 월부 판매 제도를 선보였다. 즉, 집을 할부로 살 수 있게 해 형편이 좋지 않은 조선인도 집을 살 수 있도록 획기적인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위기의 정세권
정세권은 조선을 위한 행보를 끊임없이 선보였다. 평소 정세권은 한복을 주로 입었는데 무조건 조선 사람이 생산한 광목으로 만든 한복만 입고 다녔다. 이뿐만이 아니다. 1920년대 초 국권 상실 후 일제 경제침략으로 인해 조선의 생활권이 잠식되는 가운데, 일본이 경복궁에서 일제 제품을 홍보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에 일본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고자 민족 사이에 ‘조선물산장려운동’이 한창이었다. 이에 정세권은 직접 물산 장려 회사 ‘장산사’까지 설립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1년 조선물산회는 조선 물건을 홍보할 회관이 필요했다. 이후 건축 시 쓰일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부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정세권에게 건축을 맡겼다. 그러나 건물이 이미 지어지는 와중 기부금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조선물산장려회는 정세권에게 건축 대금을 못 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세권은 4층 규모의 건물을 끝까지 지어 조선물산장려회관을 기증한다. 이에 더해 기관지 《조선물산장려회보》(1931년 《장산》으로 개칭) 발행 비용을 포함한 연간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지원했다.

이런 정세권의 행보를 지켜본 일제 경찰은 정세권을 소환해 조선 물산을 장려하는 건 실상 ‘독립운동’이라는 이유로 정세권을 탄압하려 든다. 독립운동가로 인식되면 건축 사업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 위기를 불러옴에도 불구하고 정세권은 “오사카 사람이 오사카 물건을 장려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냐”며 “조선인으로서 낙오된 조선 물산을 장려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어떻게 이것이 독립운동이냐”고 주장했다. 당당한 정세권의 태도에 일제 경찰도 물러났다. 이후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도 정세권의 거침없는 행보는 끝나지 않았다.


<가회동 한옥마을 프로젝트>
북촌 중심가인 종로구 가회동 33번지 일대의 땅(1,535평 규모)이 나왔다는 소식이 정세권에게 전해졌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세권이 매입한 땅의 원래 주인이 친일파 또는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가회동 33번지 일대 땅 역시 친일파 또는 일본인의 땅이었다. 33번지뿐만 아닌 그 옆 땅인 친일파 ‘민대식’ 소유의 31번지 땅도 개발할 기회를 얻게 돼 약 23,500제곱으로 7,100여 평, 즉 축구장 3개 정도 크기의 땅을 재개발하게 된다.

가회동 땅 역시 대규모 한옥을 짓는 데 썼고, 매일 수많은 도시형 한옥이 지어졌다. 일제로부터 조선을 지키고 조선인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정세권은 그렇게 조선의 독보적인 부동산 개발업자가 됐다. 정세권은 20여 년간 북촌 이외 경성 지역에도 도시형 한옥을 건축했다. 당시 풍경은 <반도의 봄>이라는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한옥을 지었을까? ▲익선동 ▲안국동 ▲삼청동 ▲가회동 ▲소격동 ▲명륜동 외에도 무려 18개 도시에 한옥을 지었다. 정세권이 지은 한옥의 수는 6천여 채다. 정세권의 노고 덕에 현세대도 북촌 한옥마을 일대를 거닐며 추억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또다시 찾아온 시련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을 불법 체포해 고문하고 재판에 회부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는데, 조선어학회 후원자 명단에 정세권이 포착됐고, 일제는 평소 예의 주시하던 정세권의 이름을 발견해 바로 체포한다. 그렇게 1942년 11월 정세권은 함경도(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홍원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다. 바로 ‘이극로’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인데,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통해 이극로를 처음 만난 정세권은 젊은 유학파 지식인인 이극로를 아꼈다. 조선어학회를 통해 한글 사전을 만들던 중 자금난에 부딪힌 사실을 알게 된 정세권은 한옥을 지어 번 돈을 조선어학회에 큰 단위로 후원했다. 이뿐만 아니라, 2층으로 된 양옥집을 기증해 조선어학회의 터를 만들어주면서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

체포 이후 정세권은 지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당시 정세권은 쉰다섯으로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결국 옥에서 지병을 얻게 돼 풀려났으나, 일제는 갖가지 이유로 서슴없이 협박하며 정세권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고작 1년 뒤인 1943년 6월 정세권은 다시 경찰서에 붙잡히는데, 이때 무려 3만 5,279평의 정세권 사유지를 조선인을 친일파로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인 ‘대화숙’에 조공하라는 말도 안 되는 강요를 받는다. 결국 정세권은 대화숙에 땅을 뺏기게 되고 역사적 건축 회사인 건양사의 건설 면허 또한 일제에 의해 취소당하고 만다.


건축왕의 마지막 생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2년이 지나서야 일제의 핍박과 감시에서 벗어나게 된다. 광복 이후 예순을 넘긴 정세권은 조선어학회와 굵고 긴 친분을 지내며 1957년 한글 큰사전 편찬을 끝까지 지켜보다 1965년 9월14일 78세 나이를 끝으로 사망한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정세권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다.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정세권은 당대 민족 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나, 민족 운동을 주도한 주요 인물은 아니었다. 또한 유명한 건축물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독립운동가만큼 알려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재산 손해를 흔쾌히 감수하며 수많은 한옥을 지어 조선인의 생계를 책임지고, 빼앗긴 땅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자 한 정세권의 노고는 꼭 알아야 한다. 그는 당대에도 조선을 일으켜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으나, 귀중 유산인 북촌 일대를 남겨 오늘날에 들어서도 한국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한옥이 줄지은 종로 일대를 가보면 한옥 양식과 분위기에 맞춘 국내외 프랜차이즈와 더불어 볼거리, 먹을거리, 거닐 거리가 정말 많다. 과거 조선인들뿐만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 세대에게도 선물이 된 것이다. 혹여 서울에 방문하는 일이 생긴다면 시간을 내 북촌 한옥마을에 들러 정세권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거리를 거닐어보길 바란다. 아름다운 한옥 길을 따라 걷다 ‘북촌 한옥 역사관’을 발견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방문해 한옥의 역사와 정세권의 업적을 알아가길 바란다. 그가 얼마나 조선의 날 것을 그대로 지키고자 했는지, 민족의 애환에 뼈 저리게 공감했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정세권뿐만 아닌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노고가 여러 방면으로 다수에게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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