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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LO!
  • 안보영 기자
  • 승인 2022.09.19 08:00
  • 호수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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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한테도 이쁘고 향기 나는 꽃목걸이 쪼매 걸어 줬으면 싶었다"

"엄마는 카네이션의 꽃말이 사랑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엄마가 키운 카네이션들은 예쁘고 향기 나는 레이가 돼 누군가를 환영하고, 축하하고, 위로하며 따뜻하게 안아 줄 것이다"

위는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건너가 엄마가 된 ‘버들’과 그의 딸 ‘진주(미국 이름은 ‘Pearl’, ‘펄’이라고 지었다)’의 대화다. 위 대화를 통해 우리는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대가 정착해 가정을 꾸려 이민 2세대가 탄생한 모습, 한인 이민 1세대가 생계를 이어온 모습, 조선보다는 하와이와 영어가 더 익숙한 이민 2세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우리대학 박물관에서 열린 <잊혀진 이야기, 역사가 되다-하와이 이민 1세대의 묘비로 본 삶의 궤적>은 이민 1세대의 묘비를 통해 이민자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본 기사에서는 하와이 이민의 역사와 ‘사진 신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는 미국 센서스국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외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은 24만 5천여 명이라고 전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이민자 수가 10년 내 가장 적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수치다. 미국 내에서도 하와이는 특히 아시안계 인구가 많은 편에 속하는데, 2022 WPR(World Population Review) 에 따르면 호놀룰루의 아시안계 미국인 총 인구수는 41만 7,316명이고, 전 체의 약 43%에 달한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발표한 2021 재외동포 현황에 따 르면 호놀룰루 재외동포 수는 총 7만 974명이고, 그 중 영주권자 및 시민권자는 4만 6,486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통계가 보여주듯 하와이는 절반 가까이 되는 비율의 아시안계 미국인을 포함해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는 곳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와이로 오게 됐을까?

하와이는 미국 선교사들의 첫 대 외 선교활동 지역이자 무역 및 어선의 기항지로 저명한 곳이었다. 그런 섬나라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사탕수수가 재배되면서 부터다. 사탕수수는 하와이 5개 섬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 었는데, 1825년 서인도에서 사탕수주 재배업에 종사하던 존 윌킨슨(John Wikinson)이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사탕수수 농장을 설립한 후 본격적인 사 탕수수 재배가 시작됐다고 한다. 대규모 재배가 시작된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농장주들은 하와이 왕국과 함께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하와이에 도착한 건 1852년 광둥 출신 중국인 239명이었다. 하와이왕국이 미국에 편입되기 이전까 지 총 5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하와 이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들은 동양인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76년 천연두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주류 사회는 중국 이민자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감염병에 대한 인종화된 인식은 중국인의 미국 입국을 제한하도록 했고, 1882년 연방의회는 중국인의 이 민을 금지하는 ‘중국인배척법(이민금 지법)(Chinese Exclusion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943년에 폐지됐다. 중국인 이민이 금지된 시점인 1885년, 중국인 노동자를 대신해 일본인의 이 민이 시작됐다. 1890년 초반부터 시작 된 일본인 노동이민은 1910년에 하와이 총인구의 41.5%를 차지할 만큼 큰 노동이민 집단이 됐다. 그러나 이들 역시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농장의 부당한 처우에 파업으로 대항하거나 농장을 떠났다. 엎친데 덮친 격, 1899년 선페스트(Bubonic Plague) 사태 당시 전염병 의 원인으로 또 한 번 중국인이 지목 됐다. 특히 하와이에서 선페스트가 확산되자 하와이 주정부 는 차이나타운을 근 원지로 지목하고 감염병이 발병된 건물을 소각했다. 피해는 중국계 미국인들이 고스란히 떠안게됐다. 하와이 주정부는 중국, 일본, 하와이 원주민 출신 주민들 중 의심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소독 장소로 보냈고, 남녀 가릴 것 없이 전라 상태에서 살균 샤워 및 정밀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와 같이 부당한 인종차별과 노동 처우에 화난 노동자들의 농장 이탈 및 파업 횟수가 잦아지자 대체 인력으로 한국인 노동자의 도입이 추진됐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1세대 조선 인 102명은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인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 에 도착했다. 1905년 8월 8일 몽골리 아호까지 2년간 총 56회에 걸쳐 건너간 이민자는 7,291명에 달했고,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당시 하와이는 ‘아메리 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 ‘풍요의 땅’이다 등의 소문이 있었고, 당시 조선 에서 힘겹게 살던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소문과는 달리 하와이 초기 이민 당시 한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 분산 배치돼 하루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으며, 백인 감독 하에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해야만 했다. 사탕수수 농장은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의 노동 현장이었으며, 그렇게 모은 돈은 훗날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는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 이민 1세대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건너간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들은 어떻 게 하와이로 가게 됐을까?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조선 사람들은 강도 높은 노동과 언어의 장벽 속에서도 어려움을 딛고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번 돈을 모아 조선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각자의 재산을 불려가기도 했다. 하와이로 간 이민자 대다수는 독신 남성이었고, 당시 하와이는 동양인과 현지인의 결혼은 엄격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자들은 ‘사진 결혼’을 이용해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 다. 조국으로 자신의 사진을 보내 배우자를 찾는 것인데,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신랑감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사진을 보내거나, 직업, 나이, 재산 상태 등을 속였고, 조국의 중매쟁이들은 ‘땔감이나 끼니를 걱정할 필요 없다’, ‘포와(布哇, 하와이 옛 이름)는 지상낙원이다’등 달콤한 말들로 신부들을 모았다. 조선에 있는 여성들은 가 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본의 지배로부 터 벗어나고 싶어서, 가난과 여성의 굴 레에서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이민을 택한 사진 신부 만 천여 명이었다. 대부분 십 대 후반 에서 이십 대 중반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이때 하와이로 건너간 여성들을 ‘사진 신부’라고 불렀다. 1924년 ‘동양인 배척 법안’이 통과되고 더 이상 사진신부는 미주지역에 들어올 수 없게 됐다. 결혼을 결심한 여성들은 남성의 호적에 우선 등록한 뒤, 미국 영사관에서 신체 검사를 받고 영어 공부도 틈틈이하며 이민을 준비했다. 이들은 배를 타고 부산에서 일본, 일본에서 하와이로 갔다.

소설에는 사진 신부들이 배에서 내려 ‘레이’라는 꽃 목걸이를 걸어주고 ‘알로하’를 외치는 원주민들에게 매료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곧 거짓된 예비 남편의 신상 및 하와이 노동 현장 등 상상과는 다른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일본에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오빠를 둔 ‘버들’ 은 조선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어 이민을 택했지만 남편과 시아버지를 위해 매일 상을 차리고, 공부 대신 빨랫터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조선에서 과부가 돼 손가락질 받았던 ‘홍주’는 자신보다 서른한 살이나 많은 신랑감을 만나게 되고, 조선에서 무당의 손녀라는 이유로 숨어 살았던 ‘송화’ 역시 환갑도 넘어 보이는 신랑감을 만나게 된다. 현실에 절망하고 적응할 겨를도 없이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은 아이를 키우고, 남성 못지않은 힘든 노동을 하고, 살림을 하고, 1919년 하와이에서 결성 된 대한부인구제회라는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독립기금을 모으며 힘을 보탰다. 1세대 독립운동가인 권도희-이희경 부부의 이희경 여사 또한 사진신부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점차 사탕수수 농장에서 카네이션 농장, 파인애플 농장 등으로 일자리를 옮기며 정착했다.

사진신부는 현대 국제중매결혼의 초기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결혼 이주민 여성들을 떠올려보라. 포와에서의 낙원 같은 삶을 꿈꾸며 떠난 한인 사진신부들과 겹쳐 보이지 않는가? 낯선 풍경,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환경에 적응하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소설 작가 이금이는 “버들과 홍주, 송화 이야기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작가의 말을 통해 전했다. 먼 타지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쓰고 정착하기까지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대학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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