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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박물관이 들려주는 잊혀진 이야기
  • 이지현 기자
  • 승인 2022.09.05 08:00
  • 호수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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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복 77주년이자, 하와이 이민 120주년이다. 뜻깊은 해를 맞이해 우리학교와 해군사관학교가 ‘잊혀진 이야기, 역사가 되다-하와이 이민 1세의 묘비로 본 삶의 궤적’ 특별연합전시를 준비했다. 잊혀진 이야기들이 역사가 되는 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하와이 이민 1세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2018년에 하와이대학교 힐로 캠퍼스 영어영문학과 세리 I. 루앙피닛(Seri I. Luangphinith) 교수가 우리대학에 특별 강연으로부터이다. 루앙피닛 교수는 특별 강연에서 한인 이민자 1세대의 삶에 관해 이야기 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대학 문경희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 김주용 창원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루앙피닛 교수로 조사단이 꾸려지게 됐다. 이 조사단은 2019년, 2022년 두 차례 하와이 현지를 방문해 이민 1세의 묘지를 조사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중간보고의 성격을 가지며 묘비를 중심으로 이민 1세의 삶을 조명한다. 또 하와이 동포들이 안중근 의사를 위한 성금 모금과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당시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대학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11월 30일(수)까지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매주 월~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관하니 꼭 관람해 보기를 바란다.

 

<잊혀진 이야기>

1902년 12월 인천에서 121명의 한국인이 탄 갤릭호가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향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이민이다. 1905년까지 약 7천여 명의 노동자가 추가로 더 이주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사탕수수밭에서 힘들게 일했다. 시간이 흘러 하와이 이민 1세대의 인생은 막을 내렸는데, 그들의 무덤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그들의 묘비는 파괴되고 있었다. 묘비에는 이름, 나이, 고향, 직업, 종교 등이 담겨 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알 수 있는데 묘비가 부식되면 그것들을 알기 어렵다. 특히 이민 3·4세대는 묘비의 한자와 한글을 알아보지 못해 자신의 선조 무덤이 어느 것인지, 누구인지,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니 무덤이 서서히 파괴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대학 박물관은 이민 1세대 묘비를 독해 및 탁본하여 하와이 입항 선박 명부, 여권 발급 기록과 같은 명부와 대조해 그들의 삶을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실제로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박춘하(CHOON HA PARK) 씨의 묘비를 볼 수 있는데, 이름과 탄생 및 사망 일자는 영어로 적혀 있으나 마지막에 한글로 ‘아부지’라고 적힌 것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해 울림을 준다. 또한 이명운 씨의 묘비는 조사 과정에서 이명운 씨의 손녀 한인 3세 리아 리 씨와 남편이 방문했는데, 이들은 할아버지의 묘비를 찾아와도 묘비의 한자를 알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한다. 조사과정에서 탁본을 통해 비석의 글자를 읽어주자 할아버지의 고향과 이름을 알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역사가 되다>

하와이는 지리적으로 미국 본토와 한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따라서 우리대학 박물관은 안중근 의사 의연금, 독립금 공고서 납부 기록과 하와이 이민 1세대의 기록을 대조했다. 결론적으로 약 1/3의 하와이 이민 1세가 기부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이들은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농막에 들어가 잠을 잤고, 한 달에 약 17달러를 버는 힘든 생활을 했다. 이런 돈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하와이 호놀룰루 신한국보사에서 1911년 8월 출판된 ‘대동위인 안중근전’에 따르면 총 1,595명이 의연금을 송금했고, 이를 블라디보스토크의 안중근 의사 구제공동회 등에 송금했다고 한다. 곽일선 씨는 의연금으로 무려 10달러를 냈는데, 이는 월급의 3/4에 해당한다. 곽일선 씨의 묘비에는 ‘조선인’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국권이 피탈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병준 씨의 경우 친일파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씨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이병준 씨는 1919년까지 의연금을 내며 장인환 씨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이후에도 꾸준히 대한인국민회에 혈성금을 납부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에게 전달되었고, 임시정부의 활동에 보탬이 되었다.

이 전시의 마지막 순서는 하와이 이민 1세대가 의연금을 보낸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두 보물을 공개했다. ‘임적선진 위장의무’에서 안중근 의사의 기개를, ‘청초당’에서 안중근 의사의 독립을 향한 소망을 느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멀리서 독립자금을 보태는 것만으로 함께했던 ‘하와이 이민 1세대’와 대한 독립의 주역 ‘안중근 의사’가 마침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전시가 시작되고, 익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이 “독립운동가를 찾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라며 우리대학에 1,000만 원의 대학발전기금을 기탁했다. 이와 함께 하와이 이민자 후손들이 우리대학 박물관에 방문해 “하와이 이민 1세대인 조상의 묘를 꼭 찾고 싶으며, 이에 창원대에서 관련 조사를 계속해 주길 바란다”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대학에서 뜻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는 만큼, 우리대학 학생들도 동백관에 위치한 박물관을 방문해 기자가 느낀 ‘뭉클함’을 느껴보길 추천한다. 먼 타국에서 힘든 삶을 이어오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는 마음, 그들의 이야기가 비로소 역사가 되는 이 전시는 11월 30일(수)까지이다.

끝으로 창원대신문이 전시를 담당한 창원대박물관 김주용 학예실장님과, 팸플릿 및 안내 자료에 사용된 폰트 ‘하와이 한인 묘비체’를 제작한 안수호(정보통신 17) 학생을 만났다. 두 분과의 인터뷰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주용 학예사님과의 인터뷰》

Q. 하와이 현지 조사를 두 차례 다녀오셨는데, 현지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A. 처음 하와이에서 간 묘지가 힐로 알라이 묘지입니다. 많은 무덤이 있는데 코리아 섹션에만 꽃다발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른 무덤과 비교가 돼 더욱 더 충격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비석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100년도 안 된 비석이 왜 부서질까? 생각해보니 시멘트로 비석을 만들었던 겁니다. 시멘트가 화강암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일반 상식과 맞지 않는 현실에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탁본할 때도 읽기 위한 최소한의 탁본만 했고, 비석이 손상되지 않기 위해 큰 노력을 했습니다. 이미 훼손이 많이 돼 고향을 알 수 없는 경우 등이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Q. 해당 전시에 뜨거운 호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A. 익명의 독립운동가 후손 분께서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더 찾아달라고 하시면서 발전 기금을 기탁해 주셨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하와이 이민자 후손 분들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기사를 보시고 미국, 베트남 등에서 전화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명단에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있는지 봐달라고 전화를 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니다. 이분들은 정말 간절하십니다. 이런 연락을 받으며 작업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Q. 이번 전시가 중간보고의 성격을 갖는다고 하셨는데 후속 연구에도 귀추가 주목됩니다. 후속 연구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A. 현재는 후속 연구에 대한 방향성을 세우는 중입니다. 현지에 가서 더 조사하고, 후손들을 만나 여기가 본인 조상의 무덤이라고 알려주는 작업도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전시를 통해 ‘잊혀진 이야기’를 널리 알려 함께 보존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안수호 학생과의 인터뷰》

Q. 제작하신 하와이 한인 묘비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독립운동가분들을 기리고자 묘비에 쓰여있는 글자를 초성별로 분리한 후 재조합 및 창작하여 상용한글 11,172자를 모두 제작한 폰트입니다.

 

Q. 하와이 한인 묘비체 제작을 하게 된 경로가 궁금합니다.

A. 제가 박물관에서 교내 근로를 하는데 학예실장 님께서 폰트와 관련된 작업을 해본 적이 있냐고 여쭤보셨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내 글씨체로 폰트를 만들면 귀찮은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어 그렇다고 답변드렸습니다. 실장님께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에 도움을 주지 않겠냐고 제안해주셔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Q. 폰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으셨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A. 폰트를 만들 때 묘비에 쓰여있는 글자를 초성별로 분리한 후 재조합 및 창작해 만듭니다. 그런데 묘비에 쓰인 단어는 성함, 생몰년, 사시던 지역들 정도이기 때문에, 폰트에 필요한 특정 받침(ㅌ받침이나 ㅎ받침 등)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박물관 학예사님들과 협업하여 결국 상용한글 11,172자를 모두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Q. 폰트를 만들고 난 뒤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A. 전시 팸플릿의 폰트가 바로 ‘하와이 한인 묘비체’입니다. 완성된 팸플릿을 처음 보고 너무 뿌듯했고, 감동이었습니다. 나중에 전시가 시작되고 전시를 보러 갔는데, 전시실 내부에 있는 글자들도 제가 제작한 하와이 한인 묘비체 인 것을 보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또한 총장님께 표창장도 받게 돼 더욱 기쁩니다. 제가 준비했던 자료들을 좋은 일에 쓸 수 있어 뿌듯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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