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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창원대문학상 소설부문 장려 - 애상(哀傷)
  • 창원대신문
  • 승인 2022.05.02 09:00
  • 호수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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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상(哀傷)

이수진(경제학트랙 3학년)

 

엄마가 세상을 떠난지 햇수로 3년째다. 눈을 뜨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온종일 머리에서 엄마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2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아직 엄마의 체온과 향기, 목소리를 기억하며 그곳에 여전히 살고 있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수영아, 엄마 죽는대.”

 

건강검진 결과지가 담긴 서류봉투를 손에 들고 와 나를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부짖는 엄마의 목소리다. 울고 있는 엄마를 뒤로 한 채 나는 이러한 상황에 너무 놀라 어떠한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목이 턱 끝까지 메여온다. 하지만 질문을 해야겠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에 했었던 건강검진에서 종양으로 의심된다는 소견을 듣고 조직검사를 했더니 암 말기래. 의사가 나보고 죽는다더라.”

 

‘드라마에서나 보던 암이라니... 우리 엄마가 죽는다고?’

 

머리로는 이해를 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이 상황이 정말 사실인지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가슴이 조이고 심장이 가빨라지는 증상을 보니 정말인 거 같아 마른 침만 삼켰다.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는 이모의 말을 듣고 엄마와 아빠는 곧장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다. 서울과 지방의 의료기술의 차이가 10년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검사결과는 암 3기, 항암과 수술을 한다면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망설임과 주저할 틈도 없이 바로 치료를 선택했고 6개월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말이 치료지 내가 옆에서 지켜봤던 항암은 어쩌면 암이라는 질병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여보, 나 자꾸 머리카락이 빠져”

 

단발머리였던 엄마가 울먹이며 아빠에게 말했다.

 

“항암치료를 받는 중이니 당연히 머리카락이 다 빠질거야. 이참에 머리카락을 다 밀고 깔끔하게 치료를 받는게 어때?”

 

라는 아빠의 말에 머리카락이 갈수록 빠져 속상했던 엄마는 한참을 고민한 후 욕실에서 아빠와 함께 이발을 했다. 위이잉-하는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그제서야 거울 속 비춰진 자기 모습을 보며 엄마는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밀려 속상한 마음보다는 어쩌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애달프고 구슬퍼 눈물이 났을 것이다. 머리카락 전체를 밀고 두상이 훤히 보이는, 다시 말해 스킨헤드의 모습을 한 엄마를 본 나는 충격을 받아 턱이 떨려오며 애써 울음을 삼켰다. 나는 머리카락이 없는 엄마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건강했던 엄마가 힘겨운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며 암세포와의 싸움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속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았고 수술까지 잘 끝냈다. 그야말로 암세포와 싸워 이긴 것이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전과 다름없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매번 전국 곳곳을 누비며 다니던 가족여행도 다시 다니며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여전히 사소한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며 지냈고 우리 가족의 걱정거리는 해산이 되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엄마는 나와 동생을 학교에 보낸 후 꾸준히 운동을 다녔으며 암에 좋다는 음식과 다양한 약재들을 접하고 먹었다.

유치원 선생님이였던 엄마는 수술 후 1년 동안 일상을 되찾았으며, 항암치료 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던 직장에 다시 가고 싶어 하셨다.

 

“수영아, 엄마 다시 일할까? 엄마 몸도 이제 괜찮고, 반 아이들 생각이 나네.”

“아니, 나는 엄마가 지금처럼 집에 있으면서 운동도 다니고 자기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어.”

 

누구보다 자기 직업에 사명감을 느끼며 열정적으로 원생들을 돌보며 일을 하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엄마가 다시 일하는 것을 반대했다. 일을 하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것이 휴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학교에 다녀오고 아빠가 퇴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온전히 엄마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 시간 동안은 엄마의 시간이기에, 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볼 수가 없었기에, 집에서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라고 섣부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엄마는 항상 가족들의 저녁을 위해 몇 시간 동안 서서 준비를 하고, 빨래와 설거지, 집안 청소 등 많은 집안일에 시간을 투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하게된다. 어쩌면 엄마는 잊고지냈던 활력을 느끼기 위해 직장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상을 지내던 중 수술 후 6개월마다 주기적으로 받아야 했던 정기검진도 나름 잘 관리해왔다고 믿었기에 엄마는 아무런 걱정 없이 검사를 받고 집에서 가족들끼리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다시 심장이 뛰는 일이 생겼다. 병원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엄마가 왈칵 눈물을 쏟는 것이다. 2년 전 그날처럼.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암의 재발이였다.

 

“수영아, 암이 다시 재발한 것 같다고 조직검사를 하러 급히 병원에 오라네?”

 

엄마는 참을 수 없었던 눈물을 왈칵 쏟아 흐느끼며 나에게 말했다. 심장이 쿵. 지하로 내려감과 동시에 항암치료를 받던 엄마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가족의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다시 그때의 고통이 반복되는 것일까..’

 

불안함에 사로잡혀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학교에 가서도 집에서도 어떠한 일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 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검사결과만 기다리며 숨죽였던 일주일이 흘렀다. 당일 나는 대학교 원서 접수가 있던 날이였다. 엄마와 아빠는 검사결과를 들으러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나의 친구들이 대학교 원서 접수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던 중. 나는 대학 원서보다 엄마의 검사결과에 더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집에 가면서도 엄마가 걱정이 돼 아빠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 결과 어떻게 됐어?”

 

“집에와서 들어..”

 

나는 그때의 수화기 너머 속 아빠의 목소리에서 결과를 이미 알았지만 듣고 싶었던 답변이 아니였기에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스쿨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아무 생각없이 뛰었다. 숨 가쁘게 집으로 들어와 울고 있는 아빠와 엄마를 마주한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암세포가 다른 곳에 전이가 된 상태라 수술이 불가능하며 항암치료를 해도 남은 시간이 6개월에서 1년이며, 항암치료를 하지않아도 남은 시간이 6개월에서 1년이라고 했다. 나는 비통하고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려왔다. 엄마가 너무 애처롭고 안쓰러워, 그날 밤 소리 없이 숨죽여서 한참을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아마 가족들 모두가 같은 심정이였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나보다 더 힘겨웠을 하루였을 것이다. 엄마는 항암치료를 포기했고 남은 시간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분명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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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주 후, 수능날이 되었다. 인생에 한 번 뿐인 중요한 시험이였지만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 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수능날 당일, 잠에서 깬 내가 눈을 떴고 엄마와 아빠가 새벽부터 일어나 나의 도시락을 싸기위해 주방에서 준비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을 하고 있는 엄마의 컨디션이 어제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의 기분은 엄마의 컨디션에 좌지우지 됐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자식들이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아빠가 챙겨준 도시락과 보온병을 챙겨 수험장으로 갔고 시험을 칠때는 최대한 엄마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수능이 끝난 후 많은 학부모들이 수험장 앞으로 자녀들을 마중나왔다. 나는 친구들과 같이 교문 앞으로 나왔고 내 친구들 역시 자기 부모님께 달려가 안겼다. 혼자가 된 나는 갑자기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려지더니 자꾸만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시험을 망쳐서 우는 것도 아니였다. 부모님이 마중나온 친구들이 부러워서도 아니였다.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다.

 

‘우리 엄마도 아프지만 않았어도 날 마중나왔을텐데.. 왜 나만 이런 상황인거야...’

 

라는 생각이 자꾸 들며 내 상황이 너무 원망스럽고 내가 너무 안쓰러워 눈물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며 집 앞에 도착했고 거울 속 볼과 눈이 빨개진 나를 확인 한 후 집 앞 공원을 서성이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집으로 들어갔다. 울었던 티를 내고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삑 삑 삑 삑 도르륵...”

 

도어락을 열고 현관문을 지나니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있던 엄마가 소파에 누워서 나를 반겼다. 엄마의 상태가 아침보다 더 안좋아진거 같았다.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을 준비했던 탓인가.. 하며 가방을 풀고 책을 정리했다. 그동안 공부했던 책들을 정리하면서 또 왈칵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려진다. 공원에서 마음을 잘 정리하고 집에 들어왔건만 엄마의 아픈 모습을 다시 보니 자꾸만 명치가 탁 막히며 눈물이 수도꼭지 마냥 흘렀다. 나도 모르게 이 상황이 너무 힘들어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거실에서 엄마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아 왜 울어..?”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 했다.

 

“으응.. 시험을 못친거 같아서..”

 

거짓말이다. 시험은 평소대로 쳤고 대학 입시 결과도 내일이면 나오고 수능은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시험이 아니였지만 시험을 못쳐서 우는 것이라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엄마 때문에 우는 것이다. 엄마가 쇠약해지고, 목소리에 힘도 없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그런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면서 느끼니 마음이 자꾸 약해지고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또 평소에 마음이 약하고 눈물이 많던 엄마에게 엄마가 아파서 우는 것이라고 하면 엄마는 또 엉엉 울게 뻔하다. 그럼 또 힘이 빠질 것이니 대충 둘러댄 것이다.

 

수능이 끝난 후, 엄마와 종종 공기 좋은 산으로 갔다.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는 나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도 너희들 저렇게 어렸을 때로 너무 돌아가고 싶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눈물을 억누르며 내 나름대로 엄마를 위하는 말을 전했다.

 

“2년 전에 항암치료 받고 수술했던 일들이 지나고 나니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억이 되는 것처럼, 지금도 분명 나중에 보면 아무 일도 아닐거야. 이렇게 산 다니면서 운동하고 식습관 잘 지키면 유지할 수 있을거야.”

 

이때가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제일 건강한 모습이였다.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 뿐이였지만 아마도 이 말을 듣고 엄마는 나에게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 스스로 암과 싸우며 4개월째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는 점점 쇠약해졌고 암세포가 더 퍼져 마약성 진통제로만 버틸 수 있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를 보살피기 위해 우리 가족은 번갈아가며 엄마 곁을 지켰다. 하지만 아빠는 출근을 해야했고 동생은 학교를 가야했으므로 입시가 끝난 내가 주로 엄마 곁에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안방 침대에서 항상 잤지만 아빠의 뒤척임 때문에 잠에서 깬다며 거동이 힘든 후부터 항상 거실 쇼파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몸이 전과 달리 더 힘들어지고 예민해져있기 때문에 아빠가 자면서 움직이던 행동들이 신경쓰였을 것이다.

 

나는 대학 입시와 수능이 끝났기 때문에 학교에서 항상 오후 1시가 되면 하교를 했다. 수능이 끝난 친구들은 지금이 대학 가기 전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놀러다니기 바빴고 친구들의 제안에 나는 혼자 집에 있는 엄마가 생각이나 차마 그들과 동행 할 수 없었다.

하교 후 항상 집으로 와 엄마의 상태를 확인하고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주는 것이 내 하루의 일과였다. 학교에서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엄마 곁에 앉아서 들려주면 엄마가 미소를 씨익 띄며 소리내어 웃어준다. 아픈 이후로 웃음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이 시간 만큼은 엄마가 웃는 모습이 좋았다. 엄마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지만 웃는 얼굴은 여전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상태가 더 안좋아졌다는 것을 인지한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기 위해서는 암 환자인 본인이 있어야 한다. 진통제가 다 떨어져 아빠와 엄마, 나와 셋이서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엄마의 상태를 본 후 일주일 입원을 제안했고 호스피스 병동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말로만 듣던 호스피스라니.. 우리엄마가 정말 호스피스 병동에 가야한단 말이야...?’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등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동이라고 하지만 막상 엄마를 호스피스 병동에 보낸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우리가족도 마찬가지였고 엄마 또한 본인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는 것 보다 지금처럼 내가 엄마를 옆에서 챙겨주며 화장실에 데려다 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할 수 있는 집에 있는 것이 가족들도 더 편안했다. 엄마는 그냥 일반 병실에 일주일 정도 입원을 했고 엄마를 병원에 남겨두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막상 엄마가 없는 집을 보니 뭔가모르게 허전했지만 깊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늘은 잠에서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어서 좋다’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생각이 드는 내 자신이 미워지며 병원에 엄마를 버리고 온 거만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병원과 집을 왔다갔다하며 엄마의 상태를 확인했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엄마의 상태는 급격히 안좋아졌다. 엄마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영화처럼 나에게 남은 시간 일부분을 엄마에게 줄 수 있다면 절반을 엄마에게 주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러던 중 엄마가 훌쩍이며 나에게 다이아반지를 건네줬다.

 

“엄마가 더 이상 못버틸거 같아서... 수영아 미안해”

 

나는 울부짖으며 엄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니야 엄마, 할 수 있어. 아직 아니야.”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고 애달팠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들을 주나 싶어 하늘이 정말 밉고 미웠다. 어쩌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찡해왔다.

 

‘정말 엄마가 이대로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어떻게 다시 살아가지.’

 

두려움이 몰려왔다. 일주일 뒤, 그렇게 엄마는 끝까지 힘겨워 하다 가족들 곁에서 숨이 멎었다. 이 날의 날씨는 몹시 추웠다. 우리 가족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적을 바랬던 나에게 기적은 없다며 하늘이 내게 주는 벌 같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엄마의 장례식을 준비했고 나는 엄마의 폰으로 부고 문자를 돌렸다. 엄마 지인들의 울음은 나에게 위로가 됐었다. 엄마가 그들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였음을 확인받는 것 같았고 그들도 나 만큼은 아닐지언정 엄마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위로가 됐었던 것이다. 영정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은 너무 젊다. 이렇게 젊은 사람을 일찍 데려가야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엄마가 왜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지.. 복합적인 생각들이 나의 머리 속에서 요동친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마음을 굳게먹고 입관에 참여했지만 온 몸이 차가워진 엄마를 만지며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내게 너무 가혹한 일이였다. 나는 소리내어 엉엉 통곡을 하다 손이 떨려오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화장장으로 이동해 화장을 마치고 한 줌의 재가 된 엄마의 유골을 안고, 유골함을 감싼 하얀 보자기 위로 나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의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시킨 후

 

‘한 사람의 생과 사가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장례식이 끝나면 나는 이제 대학교에 입학을 해야하는데 엄마 없이 홀로 대학 생활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들뜨게도 한 없이 두렵게도 만든다. 나에게 추억을 만들어 준 사람이 추억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창문에 기대어 울고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장례지도사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냈다.

 

“엄마가 하늘에서 보고 계실거니까 대학교가서 누구보다 많이 웃고 열심히 살아야해”

 

라고 말씀해 주시는 장례지도사 분의 말씀은 너무 감사했지만 나의 마음을 더욱더 저리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나의 심경과 달리 하늘은 너무나 맑고 화창했다.

 

그날 밤 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아주 긴 계단의 끝에 엄마가 서 있었고 손을 흔들며 나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수영아, 엄마 이제 갈게!”

 

정말 엄마가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만 같아 자꾸 눈물이 흘렀다. 이제 더는 엄마를 실제로 보지 못하고 꿈속에서나 엄마를 그리워하며 떠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엄마의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정리하고 며칠 뒤 사망신고를 하러간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 엄마의 이름이 기재 된 주민등록등본을 여러장 뽑아 놓았다. 엄마의 이름이 서류상에서 사라졌지만 엄마의 이름 석자는 나의 기억 속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옷장의 옷들과 가방, 화장대의 화장품, 신발을 꺼내왔다. 옷과 신발, 가방은 정리했지만 화장품은 도저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항상 들고다니던 파우치에 화장품을 넣어 내 방 서랍에 넣어뒀다. 엄마의 물건이 하나도 없으면 엄마의 흔적이 없어지는 것 같아 화장품은 남겨뒀다. 엄마가 생각 날때마다 파우치를 열어 냄새를 맡는다.

이승에 없는 사람을 마음에 계속 담고 있으면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를 잊고 사는 것은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다들 나에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한다. 다들 겪어보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지기는커녕 엄마에 대한 기억이 더 뚜렷해지며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는 것을. 그립다. 사무치게 그립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어쩌면 속을 썩였던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에 빠져 눈물이 난다. 3년째가 되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프다. 이 글을 쓰며 과거를 회상할 때 만큼은 엄마가 잠시 살아있다고 느낀다. 사진 속 엄마가 오늘은 웃고 있는 것 같다. 엄마는 내 가슴 속 영원히 살아 숨 쉰다. 아직 나는 그곳에 살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슬픔에 빠져 울지 않을 것이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보면서 나는 늘 혼자 말하곤 한다.

 

“어쩌면.. 어쩌면 저 별들이 나의 슬픔을 다 가져갈지도 몰라.”

 

라고 속삭이며 오늘도 남몰래 눈물을 훔친다. 괜찮은 척 그렇게 슬픔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나를 위로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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