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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창원대문학상 소설부문 당선 - 대체할 수 없는 것
  • 창원대신문
  • 승인 2022.05.02 09:03
  • 호수 685
  • 댓글 0

대체할 수 없는 것

 이새봄 (문화테크노학과 20190677)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조금 연하게.”

“네, 알겠습니다. 늘 드시던 산미 있는 원두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친절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대답했다.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읽히는 손가락은 매끈하고 광택이 감돌았다. 능숙하게 결제를 마치고 카드를 건네받으면서 살짝 닿은 은색 손가락은 등골이 살짝 서늘해질 만큼 차가웠다.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군.’

수없이 많은 쇠 손가락에 결제를 맡겼지만 가끔 닿는 감촉은 여전히 생소했다. 자연스럽게 자주 앉았던 구석 테이블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 멈칫했다. 누군가 앉아있었다. 흰색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회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 자리는 늘 사람들이 선점했지만, 어둡고 좁은 이 자리는 인기가 많지 않았기에 늘 고정석처럼 앉아왔다. 카페를 거의 매일 왔기 때문에 이 시간대에 오는 단골손님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동네 카페에, 애매한 오전 10시에 새로운 사람을 마주친 게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본 모양이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두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태블릿을 켜고 강의 들을 준비를 하는데 유니폼을 입은 로봇 직원이 커피를 자리로 가져다주었다. 강의를 들은 지도 벌써 1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점이 자꾸 자존감을 하락시켰다. 이 지긋지긋한 걸 4년 동안 했는데 한 달을 더 못할까 싶어 시작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더 끔찍한 회사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참아내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가 정확히 원하던 농도와 산미였다. 로봇이 제조한 커피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맛있다는 사실이 괜히 짜증스러워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 종종 상상했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환상적이고 아름다웠으며 호화로웠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하늘을 나는 자동차, 로봇과 친구가 된 사람들, 다른 행성으로 여행을 보내주는 우주선 등을 그리며 한껏 설레곤 했다. 과학이나 기술보다는 마법에 가까운 상상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여전히 자동차는 날아다니지 않았지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날아다니는 자동차까지 상용화되었다면 인간은 아마 쇳덩어리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인간은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한 로봇 직원에 밀려 더 이상 카운터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전 세계를 마비시킨 바이러스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 바뀌었다고 한다.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에 대해 논하기에 너무 어렸다. 3년 동안 마스크를 쓴 채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중학생이 되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더 이상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TV 뉴스 채널에서는 양복을 차려입은 어른들이 어려운 말로 연신 떠들었다. 전문가들이 앞으로 일상이 어떻게 바뀔지, 급변하는 시대가 어떤 문제를 내포하는지 침을 튀기며 토론하는 동안 나는 그저 길거리에서 간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할 뿐이었다. 그때 얼핏 들었던 ‘언택트 시대’, ‘디지털 전환’과 같은 단어들은 머리가 조금 더 크고 나서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술 발전과 삶의 질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체감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구석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다. 모자를 눌러쓴 그 사람이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자리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 계속 그를 마주치다보니 특이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도 저런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네.’

테이블에는 종이로 된 드로잉 북과 투박하게 깎인 연필이 놓여있었다. 종이 위에 거칠게 그어진 연필 선을 보자 신기하면서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산책 나온 리트리버처럼 꼬리를 흔들며 새로운 사람을 궁금해 하던 시절이었다면 내가 먼저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치가 말라붙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카페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드실래요?”

짧고 건조한 한 마디였다. 처음 들어보는 그의 음성은 낮고 독특했다. 갑작스레 귀에 들어온 낯선 음성에 내 뇌는 상황파악을 빠르게 하지 못했다.

“이거, 입이 심심해서 시킨 건데 생각보다 너무 달아서요. 혹시 좋아하시면 드세요.”

그제서야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웃는 듯 무표정인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디저트 접시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 손을 멍하니 응시하는 내 얼굴이 꽤나 바보처럼 보였을 것이다.

“새 포크로 한 입 먹었어요. 깨끗하니 안심하세요.”

싱긋 웃으며 덧붙인 그의 말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마침 달달한 디저트를 먹고 싶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 호의를 거절하지 말고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카운터에서 새 포크를 가져와 접시와 함께 내 테이블로 직접 가져다주었다. 청포도가 예쁘게 올라간 타르트였다.

“정말 맛있어요. 잘 먹을게요.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새콤한 청포도와 달고 고소한 크림치즈가 어우러진 타르트는 굉장히 맛있었다.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안 좋아한다며 짧게 답했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데 타르트를 왜 샀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강의를 일시정지 해두고 타르트를 먹으며 쉬는 동안 그의 파란색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 째 매일 카페에 와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늘 단정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면서 이 사람의 옷차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짧은 대답을 끝으로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드로잉북 과 한 몸이 된 것처럼 한껏 그림에 심취해있었다. 다음 날은 답례 차원에서 스콘을 그의 테이블에 건네주었다. 달지 않고 고소한 버터 향을 머금은 스콘이 입맛에 맞길 바랐다.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잠깐 놀라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는 스콘 접시를 깨끗이 비웠고 맛있다며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그날부터 우리는 서로의 디저트를 번갈아가며 사주게 되었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고맙다, 맛있다 정도의 가벼운 인사말이 대부분이었다. 한 테이블에서 같이 먹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접시를 건네주러 올 때를 제외하곤 가까워지는 일도 없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고 흔히 한국인들이 친해지기 위해 하는 신상조사도 일절 하지 않았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 이상하고 단조로운 관계가 싫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했다.

 

그렇게 디저트 나누기를 시작한 지 이 주가 지났을 무렵, 그가 늘 앉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디저트 없이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일이 새삼스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날씨가 흐린 탓인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아 금방 카페를 나왔다.

 

“어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다음 날 그를 보고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아 최대한 담담한 어투를 흉내 냈다.

“아뇨, 준비할 게 좀 있어서 바빴어요.”

“그래요? 안 오셔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준비하시는 게 뭔지 물어봐도 돼요?”

안도감과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적인 질문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나 선을 넘은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달리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그가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치 장난감을 처음 선물 받은 아이처럼 천진하고 순수했다. 그 웃음이 너무 티 없이 맑아서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와! 전시회라니 대단하세요. 그럼 지금까지 전시할 그림 작업 하셨던 거예요?”

“네. 갑작스럽게 기획한 전시라 시간이 촉박했어요. 집에서 느긋하게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데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야 해서 카페에서 한 거예요.”

그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실래요? 그림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라곤 날씨가 참 좋다, 맛있다는 말밖에 없는데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는–엄밀히 말하면 좋아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한 질문이었다.

“요즘도 종이 티켓이 있네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반응이었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나서야 이 질문이 무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거의 없죠. 요즘은 다들 전자 티켓을 쓰니까요. 그래도 전 종이의 분위기가 좋더라구요.”

종이의 분위기가 좋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한때 내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장수진이에요.”

그는 티켓에 연필로 무언가를 쓰더니 내게 건넸다. 티켓에는 휘갈겨 쓴 글씨체로 내 이름과 함께 다른 이름 하나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하태주, 010-XXXX-XXXX

 

태주,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수진 씨, 전시장에서 꼭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태주가 카운터에 유리잔을 반납하고 카페 문을 열다가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전시회 끝날 때까지는 못 올 거예요. 할 얘기 있으시면 그 번호로 연락해줘요.”

그의 발걸음은 쾌활해보였고, 뒷모습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듯 리듬감이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그가 준 티켓을 오래 바라보았다. ‘하태주 작가 개인전’이라는 글자가 정갈하게 인쇄된 작은 종이의 빳빳한 촉감이 손가락 끝에 감겼다.

 

아직 사람들이 종이에 그림을 그리던 시절, 그러니까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나도 종이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크레파스를 쥐고 온 집안 벽을 도화지로 만들던 나는 당연히 미대에 가겠다는 꿈을 품었다. 예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무렵, 종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컴퓨터나 태블릿을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술계에서만큼은 종이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했고, 더 이상 사람들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ㅇ시대 흐름에 발 빠르게 대처한 예술가들은 디지털 아트로 전향했고 그렇지 못한 예술가들은 도태되었다. 부모님은 딸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시며 예술 고등학교 진학을 강경하게 반대하셨고 결국 나는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후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었다. 어린 시절의 취미 혹은 기분 좋은 추억 정도로 남겨놓고 싶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티켓을 보는 순간 속이 뒤틀리고 눈앞이 울렁거렸다. 글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2033년 10월 15일 ~ 18일, OO갤러리

 

*

일주일은 예상보다 느리게 지나갔다. 태주는 카페에 오지 않았고 나는 태주가 앉던 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자격증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집중해야 했지만 머릿속이 시끄러워 쉽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휴식을 취하는 도중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우리 딸, 밥은 먹었어?”

“먹었어요. 엄마는?”

“먹었지. 공부하느라 고생하네. 시험이 언제라고?”

“다음 달 말일이요.”

“그래, 중요한 시험이니까 컨디션 관리 잘 하고. 별일 없지?”

“...”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말이었다. 평소에 엄마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늘 별일 없다며 대답하곤 했지만, 다른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내일 친구 전시회 보러 가요.”

“전시회? 무슨 전시회?”

“그림이요. 아날로그 그림 전시.”

“요즘도 그런 걸 하니? 뭐, 괴짜로 유명한 작가야?”

“그건 아니고 그냥-”

“그런 거 해서 밥이나 벌어먹겠니. 친구도 참 현실을 모르네.”

“...그렇게 말하지 마요. 그 사람한테는 제일 중요한 일인데.”

왜 그렇게 울분이 치밀었는지, 이름조차 일주일 전에 알게 된 사람을 왜 그렇게 변호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하지만 그를 한심하게 여기는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엄마는 예상치 못한 내 반응에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요즘 같은 세상에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지에 대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알았어요. 나 이제 공부해야 돼요.”

더 이상 언쟁하기 싫어 공부를 핑계로 전화를 끊고, 애꿎은 모니터를 지긋이 노려봤다. 울렁, 위장에서 파도가 요동쳤다. 문득 태주의 웃음이 생각났다. 티켓을 전해주는 날 보였던 티 없이 맑은 웃음. 눈꼬리를 접으며 잇몸을 훤히 드러내고 행복해했던 태주. 울렁, 한 번 더 파도가 일렁였다.

 

*

-전시회 진심으로 축하해요!

-고마워요, 수진 씨. 오실 때 꼭 연락주세요.

친절하면서도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이모티콘을 덧붙이지 않은 간결한 문체. 태주의 이미지와 사뭇 잘 어울리는 메시지였다. 일주일 새 제법 차가워진 공기에는 미세하게 가을 냄새가 배어있었다. 오랜만에 카페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기분은 꽤 좋았다. 선물을 사기 위해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꽃집을 찾아갔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흔했던 꽃집이 요즘은 검색을 해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어서오세요. 어떤 꽃 찾으세요?”

“축하해주고 싶은 사람한테 줄 꽃인데,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카탈리나 장미는 어때요? 노랗고 예쁘죠. 꽃말은 ‘완벽한 성취’예요.”

부드럽고 예쁜 꽃이었지만, ‘완벽한’이라는 단어가 태주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고민하며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풍성한 주홍색 꽃에 시선이 머물렀다. 내 눈길을 알아차린 사장님이 곧바로 말했다.

“아, 그건 메리골드인데 너무 예쁘죠.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말 행복’이에요.”

“이걸로 할게요. 포장해주세요.”

생생한 주홍빛이 뚜렷한 자신만의 색채를 지닌 태주와 닮아있었다.

“애인분인가 봐요?”

꽃을 포장하고 결제를 하는 중에 사장님이 웃으며 물었다.

“아뇨, 친구예요.”

“그래요? 신중하게 고르시는 눈빛이 너무 반짝거려서 남자친구한테 줄 꽃인가 했어요.”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

태주의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는 구석진 골목 1층에 위치한 작은 전시회장이었다. 입구에는 아담한 배너가 전시회를 알리고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 벽면에 포스터가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붙어있었다. 낡은 건물 외관과 달리 내부는 나름대로 깔끔하고 감각적이었다.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있었고 태주는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내표시를 따라 천천히 감상을 시작했다. 대부분이 종이에 연필 혹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작품이었고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작품도 있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하는 순간, 어깨에 어떤 손 하나가 올려졌다.

 

“수진 씨, 연락하고 오시지 그랬어요. 기다리다가 잠깐 나갔다 왔는데.”

태주가 아쉬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머리를 질끈 묶은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짧은 단발머리를 한 쪽으로 가르마를 타 늘어뜨리고 파란색 정장을 입은 태주는 화려하면서도 정갈하고 전문적이었다. 언제 봐도 특이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 꽃 제 거예요?”

“당연하죠. 전시회 너무 멋있어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정말 고마워요. 와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마운데 언제 꽃까지 사왔어요.”

태주가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채도 높은 파란색 정장과 주홍빛 메리골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그는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었다. 투박한 성격이 묻어나는 선은 거침없었지만 동시에 섬세했고, 파란색 물감이 그런 선을 차갑고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문득 작품 옆에 쓰인 어떤 문구가 눈에 띄었다.

 

마음껏 손으로 만지셔도 괜찮습니다.

 

‘눈으로만 봐주세요’와 같은 경고문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기를 권유하는 안내문이라니, 이질감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시된 작품은 액자가 따로 없었고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전시회에서는 액자에 고이 포장된 그림을 정해진 거리 내에서 감상하는 게 당연했는데, 태주의 그림들은 어떠한 포장도 없이 날 것 그대로 벽에 걸려있었다. 정말이지, 태주다웠다. 종이에 그어진 선을 조심스럽게 만지니 선의 경계가 조금 흐려지면서 손가락에 흑연이 묻어나왔다. 거의 10년 만에 느껴보는 촉감에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이 툭 쏟아졌다. 정신없이 그림에 몰두하고 나면 어김없이 새까매졌던 손날, 비누로 흑연 자국을 씻어낼 때 느꼈던 뿌듯한 감정, 살짝 번져 흐릿한 부분마저 가슴 뛰게 하던 완성작, 디지털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 나도 이런 것들을 참으로 사랑했었다. 울렁, 뱃속에서 파도가 다시 요동쳤다.

 

*

저녁 6시 5분, 전시회장 근처 고깃집 문을 열고 내부를 둘러봤다.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 찬 식당 안쪽 자리에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모여앉아 있었다. 파란색 정장 차림의 태주는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수진 씨, 여기 앉아요.”

태주가 벌떡 일어나 옆자리에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두 명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고 나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앉았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태주의 제안을 받아 온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수진 씨?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저는 이서영이라고 해요.”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걸었다. 서영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자신을 김유현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막 고기를 시켰는지 불판 위에는 아직 익지 않은 생삼겹살 네 줄이 가지런히 올라가있었다.

“몇 살이에요?”

유현이 대뜸 물었다.

“스물다섯이에요.”

“스물다섯이요? 어쩐지 어려보이더라. 직장인이에요? 아님 학생?”

“회사 다니다가 지금은 그만두고 자격증 공부하고 있어요.”

“무슨 자격증인데요? 취업난도 심각한데 그냥 잘 다니지 왜.”

“음, 그냥 잘 안 맞았어요. 로봇 프로그래머 자격증 준비하고 있어요.”

유현은 학교, 전공 등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정성껏 답하려 애썼다. 그제서야 태주와의 대화가 오래된 친구처럼 편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민감한 신상정보와 과거에 대한 호기심보다 오직 현재에 대한 관심만을 가진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과한 친절 없이 담백한 관계가 주는 안정감은 쉽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유현아, 수진 씨 체하겠다.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

옆에서 말없이 고기를 굽던 태주가 다 익은 고기를 가장자리로 밀어주며 말했다. 이후 대화는 식사를 하며 간간이 이어졌다. 대화에서 알게 된 정보는 서영과 유현이 태주의 대학교 동기라는 것, 서영은 인지도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며 유현은 VR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것, 서영은 서른두 살이며 태주와 유현은 서른한 살이라는 것 등이었다. 같이 주문한 맥주를 한잔씩 마시자 어색하던 분위기가 점차 편해졌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오랜만이기도 했고, 예술계 종사자들과 나누는 대화라서 더욱 흥미로웠다.

 

“그런데 말이야, 태주야.”

된장찌개와 냉면까지 먹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맥주를 들이키던 유현이 말했다. 태주는 대답 대신 유현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앞에는 빈 맥주병 두 개가 놓여있었지만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 없이 평소와 똑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그렇게 원하던 전시회도 해봤으니까 우리 회사 들어와. 내가 대표님께 잘 말해놓을게.”

태주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남은 맥주를 들이키며 살짝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래, 우리 태주 능력도 많은데 언제까지 고집부리고 있을 거야. 이제 편하게 살아야지.”

서영이 거들었고,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달리 태주는 이런 상황이 굉장히 익숙해보였다.

“이제 시작인데 뭐. 생각해줘서 고마워.”

“야, 언제까지 재능 썩히고 있을래? 사람들 아날로그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 그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현실을 봐야할 것 아니야.”

서영의 말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점점 크게 뛰었다. 초조하게 태주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유현과 서영은 태주를 걱정하는 비슷한 내용의 말을 열심히 토해냈다. 내게 하는 말도 아닌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중학생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잊었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너 그거 해서 어떻게 먹고 살래?

 

“너희 어머니도-”

“유현아.”

술기운 때문인지 한층 텐션이 높아진 유현의 말을 태주가 가로막았다. 웃으며 듣고 있던 태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고, 유현도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네 재능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지. 하태주 고집을 누가 말리냐. 잔소리해서 미안하다.”

“괜찮아. 나 진짜 좋아서 하는 일이야. 걱정 안 해줘도 돼.”

태주는 다시 온화한 표정을 되찾았고 두 사람도 그 주제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술자리는 9시가 넘어서 마무리되었고, 다음에 또 모이자는 인사를 끝으로 식당을 나왔다.

“데려다줄게요.”

태주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시선을 내게 옮기며 말했다.

“가까워서 괜찮아요. 태주 씨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제가 아쉬워서 그래요. 같이 가요.”

슬쩍 팔을 잡으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 태주는 내가 알던 모습과 미묘하게 달랐다. 술에 취한 기색은 전혀 없었지만 어딘가 지쳐보였다. 태주는 말없이 내 옆에서 걸었다. 저녁 공기는 제법 쌀쌀했고 건조한 바람에 눈이 시려왔다.

 

“괜찮아요?”

“뭐가요?”

“친구 분들이 하신 말, 상처받았을 것 같아서요.”

“익숙해요. 상처주려고 하는 말 아닌 것도 알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괜히 수진 씨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

다정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술기운 때문인지 답답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뭐가 그렇게 고맙고 미안한 걸까.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을 부정당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익숙하고 괜찮을까.

“왜 익숙해요? 그런 말을 왜 가만히 듣고 있냐구요. 아무리 친구들이라도 그렇지.”

그에게 따져 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멋대로 터져나오는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맥주 한 잔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태주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선한 웃음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왜 그렇게 웃고만 있냐구요. 태주 씨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 아니잖아요. 태주 씨가 사랑하는 일을 구닥다리 취급 하는데 화나지도 않아요?”

이 사람한테 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건 태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화낼 필요가 뭐 있어요. 제가 사랑하고 지키면 그만인데. 사람들이 하는 말 일일이 신경 썼으면 이 일 못했어요.”

“그래도 태주 씨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날로그 예술이 유지되고 있는 건데, 큰일하고 있는 사람을 너무 무시하잖아요. 얼마나 귀한 인재인데-”

“수진 씨, 저 무슨 사명감이나 책임의식 때문에 하는 거 아니에요.”

태주가 발걸음을 멈췄다. 웃음기가 사라진 태주의 눈은 한없이 차가웠다.

“디지털이 주류가 된 예술계에 반항하려고 하는 일도 아니고, 남들한테 애써 인정받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이에요. 제가 괜찮다는데 왜 수진 씨가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요.”

태주를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늘 담담하고 온화했던 그가 이렇게 격앙되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지치고 슬퍼보였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요.”

태주는 먼저 앞으로 걸어갔고 우리는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용히 걸었다. 숨이 막힐 듯 무거운 공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집 다 왔어요. 정말 미안해요. 괜히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요.”

사과하는 나를 보며 태주는 괜찮다는 말 대신 놀이터에 있는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앉을까요?”

나는 그가 사과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했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대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실직하셨어요.”

태주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태주는 딱히 내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바이러스가 종식되고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시기였어요. 아버지가 생산직으로 일하시던 공장이 자동화되면서 극소수를 제외하고 생산직 직원들 대부분이 권고사직 당했어요. 수십 년 동안 같은 일만 하셨던 아버지가 다른 일을 구하기도 힘드셨어요. 퇴직금에 대출을 끌어 모아 작은 가게를 냈는데 얼마 안 가서 망했죠.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결국 대학교도 중퇴하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보탰어요.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빚더미가 감당이 안 되는 지경이었고...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세상을 뜨셨어요.”

태주가 한없이 담담하게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무 말 없이 태주의 손을 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죠? 아무튼 수진 씨 걱정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고, 그 일 이후에 제 가치관이 완전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미대를 나와서 그림을 그리던 작가였는데, 생계유지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공장 생산직으로 일하신 거였어요. 어머니 꿈은 가수였는데 집안 반대가 심해서 평범한 회사 사무직으로 일하셨고요. 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혼자 가족을 책임지려 밤낮 없이 일하시다가 몸이 망가지셔서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세요.”

“너무 허무하시겠어요.”

“맞아요, 허무하죠. 인생 참 덧없더라구요. 열심히 일하고 돈 벌다보면 언젠가 여유도 생기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 ‘언젠가’라는 말처럼 허황된 말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굶어 죽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죽어서라도 한이 남지 않게.”

태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도 무모한 거 알아요. 현실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그래도 저는 제 말을 듣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 말 말고 나를 믿고 싶었어요.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서른 넘게 먹고 애처럼 뜬구름이나 잡는다고 한심하게 보더라도,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전혀 한심하지 않아요. 태주 씨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알아요?”

필터를 거치지 않은 진심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말을 뱉은 나도, 태주도 놀라 크게 뜬 눈이 마주쳤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그가 울음을 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태주가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웃지 않았고, 훨씬 편안해 보였다.

“시험 꼭 합격하시길 바랄게요. 진심으로 응원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간 태주를 그 이후로 볼 수 없었다.

 

*

-합격했어요.

모니터에 띄워진 창을 확인한 후 엄마에게 짤막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후 지원한 회사에서 최종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름 있는 회사 취업에 성공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갈 곳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하나였다. 습관적으로 카페 카운터를 힐끔 쳐다봤지만 앞치마를 두른 바리스타 로봇이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짐을 챙겨 나온 거리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녔고, 앙상해진 나무와 차가운 공기가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두 달 전 집 앞에서 태주와 헤어진 이후로 그는 카페에 오지 않았다. 두어 번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취업에 성공하고 나면 태주에게 같이 그림을 그리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한숨을 푹 몰아쉬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달리 맥박이 멋대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뒤로 질끈 묶은 단발머리, 파란색 코트에 단정한 회색 셔츠, 평범한 듯 특이한 존재감이 드러나는 아우라, 태주였다. 그동안 아무런 언급도 없이 연락이 두절된 것에 대한 서운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오직 반가운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서운했어요?”

“당연하죠. 저 때문에 화났거나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별일 없는 거죠?”

“그런 건 아니고, 이런 저런 고민이 좀 많았어요. 공부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무슨 고민이었는데요?”

“저 대학 다시 가기로 했어요. 디지털 미디어 아트 전공으로 원서 넣었고 합격했어요.”

“정말요?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축하해요! 어떤 생각으로 결심한 거예요?”

태주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종이와 캔버스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숨어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지털이라고 해서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힘 있게 말하는 태주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후련해 보였다.

“원서를 낼 때만 해도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합격하고 나니까 제일 먼저 수진 씨가 생각났어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저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전에 준비한다던 자격증 시험 합격했고, 오늘 가고 싶었던 회사 최종합격했다는 연락 받았어요.”

“진짜요? 너무 축하해요. 수진 씨는 잘할 줄 알았어요.”

태주는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진심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축하를 전했다.

“그리고 저 태주 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저랑 같이 그림 그리러 갈래요? 어디든, 종이랑 연필만 들고 가요.”

태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것처럼 잠깐 얼어붙었다.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가, 이내 눈을 접고 웃었다. 두 달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웃음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맑고 새파란 웃음. 평범한 집 앞 놀이터가 어느 고급스러운 전시회장보다 화려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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