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회
돌아온 시월, 그날의 기억
  • 이은주 기자
  • 승인 2019.10.21 08:00
  • 호수 650
  • 댓글 0

 

지난달 17일(화) 국무회의를 통해‘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령안’이 심의·의결됐다. 이로써 1979년에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이 40년만에 공식적인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유신철폐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의 큰 발화점이 된 부마민주항쟁. 긴 시간을 지나, 오늘날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걸린 40년. 돌아온 시월을 맞이하며, 지나간 그날의 기억들과 오늘을 되짚어 보자.

 

1979년, 한국은?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사상계>1960년 5월호)” 이를 반증하듯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4·19혁명, 박정희 18년 장기 집권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된 부마민주항쟁, 신군부에 짓밟힌 민주주의를 되찾으려 일어선 5·18민주화운동,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민주주의는 수많은 희생을 밑거름 삼아 성장해왔다. 그렇다면, 부마민주항쟁 당시 1979년은 대체 어떤 시기였기에, 이토록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을까?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에 앞서 1970년의 대한민국은 노동 탄압, 학도호국단, 장발 단속 등 유신 체제라는 이름하에 여러 사회적 탄압이 만연해 있었다. 동시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수출 100억불 탑, 제2의 석유 파동 등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던 시대였다.

백두진 사건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돼, 유신헌법이 극에 달한 혼돈의 1979년.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제1 야당 총제로 선출된 김영삼으로 인해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보다 더 거세졌다. 이렇듯,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며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갔다. 하지만, 오원춘사건과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등이 뒤이어 일어나며 박정희 정권의 탄압 또한 더욱 거세졌다. 결국, 김영삼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인해 유신 정권은 갈등의 정점을 찍게 된다.

더불어 당시 중화학공업에 몰두하던 한국경제는 세계자본주의의 큰 위기였던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1979년 4월 정부는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한다.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이 부과됐다. 모순적이게도, 이 안정화정책은 경제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소기업들의 도산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기업은 줄줄이 부도를 냈으며, 도시하층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반(反)유신 시위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시민운동으로 꼽히는 것이, 부마민주항쟁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나? 부도율이 전국의 2.4배, 서울에 3배에 달하는 등, 당시 부산지역의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당시 전국 7대 도시였던 마산은 도시빈민층과 정·재계인들의 빈부격차가 적나라하게 벌어져 있었다. 따라서,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돼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시월은 어땠나?

1979년 9월, 신재식을 비롯한 부산대학교 법정대학 학생들이 반(反)유신 시위를 논의했다. 그 결과, 한 달이 지난 10월 15일 본격적인 항쟁에 앞서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됐다. 또한, 부산은 당시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로 당대 정권에 반하는 뜻을 잘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가온 결전의 날,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 5천여 명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합세한 거리시위를 시작으로 역사를 뒤흔든 항쟁의 여정이 열렸다. 17일에는 정치 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세무서, 방송국 등을 파괴했다. 이틀이 지난, 18일 경남 마산 일대로까지 그 영향력이 확대됐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마산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또한, 1,500여 명을 연행하고 100여 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며 압박을 이어나갔다.

한 달여가 지난,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10·26의거를 통해 박정희를 암살하면서 대한민국에 군림하던 유신 체제는 종말을 맞게 됐다. 이후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과도내각이 출범했다.

한편, 당대의 언론 탄압 등으로 인해 당시 시위 순서나 준비 및 전개과정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보도된 국제신문에 따르면, 당시 경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갑순, 옥정애, 정인권 씨 등의 준비로 시위가 창원과 마산 일대로 확산됐다고 전해진다. 1979년 초부터 시위를 준비했으나, 10월 18일 부산대학교의 시위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졌다. 부산에서의 시위가 아니더라도 마산을 필두로 한 경남에서도 이런 항쟁이 일어났으리란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날의 의미

앞서 언급한 대로, 부마항쟁은 18년 간 존속했던 박정희체제를 붕괴시키는 촉발요인으로서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박정희 하야, 유신 헌법 철폐, 노동 3권 보장, 긴급 조치 철폐, 국민의 자유와 인권의 보장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힘을 모아 거리로 나섰다.

또한,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4대 민주항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의의에 비해 오랜 시간동안 저평가 돼왔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6·10민주항쟁 기념일은 진작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40년을 역사의 그늘 속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듬해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에 가려 저평가된 면도 없지 않아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항쟁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한 까닭은 따로 있다. 바로 당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제 때문이다. 항쟁 당시 육군의 상황일지에 따르면,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떨어졌고 그 후 8시간 만에 언론통제가 실행됐다. 시 공보실을 통해 계엄군의 보도 검열단이 언론사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이로 인해 투쟁이 진행되는 내내 그와 관련된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40년이 지나서야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만큼 이번 공식기념일 제정이 더욱 뜻 깊게 다가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당일, 페이스북 계정에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은 올해, 국민의 힘으로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위대한 역사를 마침내 모두 함께 기릴 수 있게 되어 매우 뜻 깊다”며 항쟁의 의의를 기리는 글을 게시했다. 또한, 그는 “부산과 창원, 경남의 시민들은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자부심으로 하나가 되어 국가기념일 제정 서명운동을 펼쳤고, 60만 명의 국민이 함께 해줬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을 비롯해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해 애써 오신 시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는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오늘의 노력

그렇다면, 40년을 맞아 국가기념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어떤 노력들이 있었을까?

국무총리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9월부터 최초 발생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이 과정에서 관련 지자체와 단체,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후 각 지자체의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범국민 추진위원회 발족 및 전국적 서명운동 실시했다. 또한, 지방의회 촉구결의안 채택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달 14일(토)부터 29일(일)까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과 시민들이 함께 대형걸개그림을 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마민주항쟁 부활도’는 부마민주항쟁을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뜻을 담았다. 또한, 서포터즈들을 모집해 관련 글이나, 동영상 등 자료를 게시하는 등 부마민주항쟁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기억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지난해에는 국가기념일 날짜 지정을 두고 부산과 창원시민들 사이에 의견이 차이나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부산시민은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첫 거리시위를 한 10월 16일을, 창원시민은 마산으로 항쟁이 번진 10월18일을 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에 협의를 통해, 현재 지정된 10월 16일로 결정됐다.

 

그리고, 내일로

한편, 국가기념일이 되면 정부가 주관하는 전국 단위의 행사를 열게 된다. 다가오는 내일, 어떤 변화가 우리를 맞아줄까?

지난 10월 16일(수)에는 ‘부마1979, 위대한 민주여정의 시작’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가기념식이 치러졌다. 국가기념일로 치르는 첫 번째 기념식인 만큼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범국민적 행사로 성대하게 개최됐다.

또한, 40주년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반영하고 부마항쟁에 대한 전 국민의 인지도를 제고할 방침이다. 이에 대해 행정안정부는 “부마민주항쟁이 가진 역사적 아픔을 치유·위로하고, 잊혀진 부마항쟁을 재평가함으로써 항쟁이 가진 민주적 가치를 전 국민과 공감할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기념식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요일 저녁 7시 경남대학교 운동장에서는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음학회인 ‘10월의 바람 1979’가 진행됐다. 경남대학교에는 전인권밴드, 웅산, 서선영 등이, 부산대학교에는 안치환, 벤, 우주소녀 등의 출연진들이 나와 음악회를 채웠다.

또한, 부산 민주공원에서 오는 31일(목)까지 <부마1979 유신의 심장을 쏘다!>라는 순회전이 열린다. 부마민주항쟁 40주년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과 3·15아트센터에 이어 진행되는 아카이브 순회전이다. 당시 항쟁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 기사 자료, 작가들의 그림 10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전사부터 항쟁사, 후사,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두루 담았다. 시위 전개와 당시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언론 및 설명 자료들을 준비해, 시간 순서대로 항쟁을 되짚어볼 수 있도록 기획됐다.

한편, MBC경남은 오는 11월 1일(금)까지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라디오 드라마 <79년 마산>을 경남전역에 방송한다. 매일 오전 8시 30분부터 8시 57분까지 27분 동안 표준FM(창원 98.9MHZ, 진주 91.1MHZ)을 통해 청취할 수 있다.

<79년 마산>은 유신시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억압들, 노동 탄압, 학도호국단, 장발 단속 등을 다루며, 당시 뉴스 오디오를 통해 70년대 대한민국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또 지역어와 지역 지명을 통해 당시 7대 도시였던 마산의 명성을 조명한다. 이와 동시에 당시 큰 사회적 문제였던 빈부격차에 대해서도 고발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매회 실제 항쟁 주역들의 육성 인터뷰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당시 참여 학생이, 진압 경찰이나 헌병 등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된 만큼, 생동하는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보인다.

<저작권자 © 창원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은주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