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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엄마의 명절
  • 배형진/사회대·사회 17
  • 승인 2018.10.08 08:00
  • 호수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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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무사히 지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명절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된다. 나에게도 명절 증후군이 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렸던 나에게 명절은 기대되는 날이었다. 형제가 많은 아버지 탓에 나와 놀아줄 사촌들이 많았고 그들과 신나게 놀다 소쿠리 속 산처럼 쌓인 음식을 하나씩 주워 먹는 것이 좋았다. 어른들이 주시던 소소한 용돈과 무엇보다 학교를 쉴 수 있다는 사실은 철없는 꼬마아이에겐 충분히 기대될 만한 날이었다. 남달리 우애 깊은 형제들은 일 년에 두 번 밖에 없는 명절을 아쉬워하며 화기 애애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물론 우리 엄마만 빼고.

어느 때부터 이런 엄마의 모습이 눈에 보였던 거 같다. 명절 며칠 전부터 달력을 보며 한숨을 쉬던 우리 엄마. 힘겹게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나물을 다듬던 모습, 늦은 밤까지 음식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이거 밖에 안했냐며 핀잔을 주는 할머니의 모습까지, 엄마에게 명절은 결코 즐거운 날이 아니란 걸 어린 나는 몰랐다. 아니 모른 척 했다. 어린 나는 같이 놀 사촌들이 별로 없는 외갓집보단 친가가 더 좋았으니깐. 그래서 외갓집에 가자는 엄마 말에도 괜스레 짜증을 내곤 했으니깐.

요즘에는 할 말 다하는 며느리가 대세라는 이야기를 할 때 엄마가 한 말이 있다. 왜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바보처럼 할머니에게 당하고 살았을까 라는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결국 상처입는 것은 여자들이라는 것. 할머니도 며느리일 뿐이다. 남자들이 누워서 TV나 보고 여자들이 차려주는 음식이나 먹는 동안 남의 집 조상님 제사상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은 결국 여자들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놓고 전통이다 뭐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형제들 얼굴 보겠느냐 하는 말을 하는건 남자들이겠지. 이런 남자들의 모순을 볼 때 마다 참 부끄럽다.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때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자신을 그렇게 구박하던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 소리쳤다. 왜 그렇게 불쌍하게 가느냐고. 아마 당신도 시어머니 이전에 힘든 시절을 누군가의 며느리로, 여자로 살면서 어쩌면 자신보다 더 힘들었을 테니까. 미운 만큼 공감가기에 그렇게 슬퍼한 거겠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첫 명절이 왔다. 집에 어른이 안계시니 친척들이 별로 모이지 않는다. 간단히 차례를 지내고 외갓집에 갔다. 말은 안하지만 편한 것 같은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바뀌어야 했지만 아무도 바꾸지 않았던, 나조차 알고도 비겁하게 묵인했던 우리 집에 조금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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