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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으로 얽힌 대한민국
  • 황태영 기자
  • 승인 2017.11.27 08:00
  • 호수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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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많은 연(緣) 속에서 살아간다. 인연, 악연, 필연…. 그리고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묶여있는 세 가지 연이 또 있다. 바로 혈연, 지연, 학연이다. 이 세 가지 연을 통해 많은 이들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작게는 취미 생활에서부터 크게는 취업까지 얽혀있는 게 연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주된 키워드를 ‘초연결’이라고들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연은 아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단단히 얽혀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연들은 어떻게 연결되어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지연 : 연을 쥐고 세상에 나오다

지연(地緣)에 대해 논할 때 빼놓지 않는 개념이 바로 ‘지역주의’다. 지역주의란 같은 지방 출신자끼리 동아리를 지어 다른 지방 출신자를 배척, 비난하는 사회 병리현상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지역주의를 지역 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써 일종의 ‘집합 의식’이라는 긍정적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우리나라는 대개 부정적 의미로 사용한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지역주의가 어김없이 화두로 등장하곤 한다. 지방 일간지에서 대선이나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지역 연고 후보자 및 관련 정당에 대해 편파적 보도를 해 온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러한 지연에 대해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자기가 속한 붕당(朋黨)이 어느 파냐라든가, 자기가 태어난 고장이 어느 지방이냐 등으로 지연이 나뉜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권·백제권·신라권이 나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처럼 과거의 지연은 자연적 환경에 의한 사회적 연결망 단절로 나뉘었다. 지역마다 자연적·사회적 생활 조건의 차이에 따라 독특한 생활양식을 형성하여 일종의 제노포비아현상(xenophobia)을 형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일명 ‘토박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본인이 태어난 지역에 평생 사는 일은 드물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이유로 지연이 나뉘지 않는다. 최근 많이 쓰이는 용어로 ‘지역 패권주의’가 있다. 이는 한 국가에서 특정 지역 출신 집단이 국가의 경영에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정치 권력을 획득·유지·강화하려는 정치적 이념이다. 즉, 특정 지역 사람들이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지연을 이용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주의가 지배 집단의 연고지 위주 엘리트 충원이나 지역 개발 정책 수행 등의 과정에서 집단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결과 취업 시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 혹은 특정 지역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지원자를 차별하는 폐단이 발생한다. 지원자의 출신지는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혈연 :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연(血緣). 같은 핏줄로 연결된 인간관계로, 가족이나 친척 같은 관계를 뜻한다. 우리나라는 유교 중심의 사회를 구축해 오면서 혈연은 대개 민족 통합의 이유로 늘 강조돼 왔다. 조선 시대만 해도 혈연이 다른 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중요했지만, 지금은 혈연이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말이다. 일상에서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부모는 뭘 하는가?”라는 질문은 끊이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혈연은 내 마음대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혈연 중심 사회에서 유대감 구축과 사회적 혼란 방지를 가장 큰 장점으로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가장 큰 장애물로 꼽히는 것 또한 혈연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정치에서는 세습의 원인을 제공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러한 세습은 오늘날 사회적으로도 이어지는데, 기업에서는 일명 ‘낙하산’이라는 이름으로 혈연이 발휘된다.

또한, 혈연은 가족 중 한 명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알게 모르게 사회 활동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과거에는 친·외가 쪽에서 월북, 공산당 의혹 인사가 있으면 공무원 등의 직업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 했으며, 그 집안 자체가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치안 당국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특히 혈연은 타고난 것으로, 어떠한 연보다도 질기며 극복하기 쉽지 않다. 이는 곧 어떠한 연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혈연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생겨도 자력으로는 끊을 수 없다. 최근에는 이러한 혈연을 이용해 각종 보상금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 때도 그랬고, 2014년 4ㆍ16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일절 교류도 없이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지내던 부모가 보상금을 받기 위해 그제야 혈연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참상이 펼쳐졌다.

 

학연 : 입시라는 이름의 시장에서

연의 사회에서 지연과 혈연은 나날이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이들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으며, 개인의 노력 여부에 따라 달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타고나는 것이다. 따라서 천부적인 요소를 잣대로 개인의 역량을 판단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다. 오늘날 우리는 더 넓은 범위에 더 빠른 속도로 서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즉, 세계화, 그리고 제4차산업혁명하에서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이자 ‘개인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학연(學緣)은 대개 스무 살 무렵 ‘입시’라는 이름의 시장에서 구매한다. 그때 결정된 학연은 이후에는 바꾸기 쉽지 않다. 이미 판가름 난 뒤다. 취업 시장에서는 최종학력을 토대로 개인을 평가한다. 어디에서 마지막으로 공부했는지가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많은 학생이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한다. 남들보다 튼튼한 학연을 거머쥐기 위해서 말이다.
때로 학연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주는 순수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반면 ‘학벌주의’는 학벌을 중요하게 여기는 입장이나 태도로,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어느 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차별을 받는 사회현상이다.

학연, 그리고 학벌주의를 바라보는 견해는 극명하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학벌주의의 사전적 의미처럼, 이를 부조리한 것이라 보는 입장과 학벌도 능력이라 보는 견해다. 다른 갈래는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를 취한다. 분명 입시라는 거대한 관문을 통과해 우위를 차지하는 데는 개인의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이를 종합해보면 학연은 필요악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다. 대학 입학까지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필요한 만큼, 대학 입학 후의 노력에 대해서도 과소평가 돼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즉, 두 갈래의 노력 모두 경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미래 발전 가능성 자체를 무시하는 위험한 시각이다.

 

그리고 연을 좇는 사람들

우리는 저마다의 연을 쥐고 살아간다. 혹자는 연을 좇으며 살아가고, 혹자는 연과 얽혀 살아간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연으로 얽힌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을 중요시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연을 좇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사회학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을 남겼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이고, 동물은 자연에 포함된다. 이는 곧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 귀속됨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자연에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를 적용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어 버리고,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 따라서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해버린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사회에도 여실히 적용된다.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속된 말로 남을 짓밟아야 한다. 이에는 ‘집단’이라는 형체가 ‘연’이라는 이름으로 작용한다. 이를 이용해 집단이 우위를 점하고, 연에 단단히 얽히게 된다. 집단의 구성원은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개별적인 인간이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자 사람들은 이전에 없던 큰 힘을 갖게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따라서 내집단에 대해 우호적 편향을, 외집단에 대해 부정적 편향을 가지게 된다. 이를 통해 연은 더 튼튼해진다.

그렇다면 ‘연’은 악한 것일까? 박경목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이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연구>에서 1919년~1944년 작성된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 카드 6,259장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수감자들이 연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지역 사람이 5명 이상 동시에 수감되기도 했고, 가족이 함께 수감되기도 했으며, 같은 학교 학생이 수감되기도 했다. 즉, 독립운동이 지연과 혈연, 학연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로 우리대학에서는 버스를 대절해 광장 시위를 가기도 했으며, 학내에서 자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를 미루어 보아 분명 모든 사회적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연도 그러하다. 이러한 달콤씁쓸한 ‘연’이라는 것과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개인의 노력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저 씁쓸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을까?

결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어려우면서도 쉬운 게 바로 ‘의식’이다. 이러한 양면성에 대해 인식하고, 한 쪽을 경시하지 않는 비판적 의식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사회적으로 최고가 아닐까? 그저 연을 쥐고, 혹은 연에 얽혀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것과 뚜렷한 의식을 가지는 건 분명 확연한 차이가 있다. 즉, 연에 얽힌 게 아닌, 연으로 엮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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