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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만든 학교에게 전하다소설 속 학교의 모습
  • 김유정 수습기자
  • 승인 2016.10.24 08:00
  • 호수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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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생각’이 만들어낸 세계로 작가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나 정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현실과는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세상의 학교와 조금 다른 소설 속의 학교는 어떤 체제와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해리포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벤야멘타 하인학교' 이 소설 속에 나오는 특별한 학교를 알아보도록 하자. 

당신이 상상하지 못한 꿈의 공간, 
해리포터-호그와트 마법학교

호그와트 마법학교(이하 호그와트)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법 학교로, 기숙사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호그와트는 마법 학교이기 때문에, 머글(마법사나 마녀들 사이에 사용되는 단어로 이른바 “보통 인간”) 학교와는 다른 과목을 가르친다. 약초학, 마법의 약, 변신술, 마법, 비행 등의 수업을 배우며, 100점 만점의 정규시험을 통과하고 표준 마법사 시험, 고난도 마법사 시험, 순간이동 시험을 통해 마법사로 거듭날 수 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현실이 담겨있는 판타지, 호그와트

가상세계의 가상공간이지만, 호그와트는 영국 교육 체계를 핵심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호그와트는 학생들을 그리핀도르, 슬리데린, 후플푸프, 래번클로 이렇게 4곳의 기숙사에 배정해 그룹별로 공동체 생활을 시킨다. 빗자루를 타고 스니치(작은 공)를 쫓는 퀴디치 경기(해리포터에 등장하는 가상의 스포츠. 빗자루를 이용하며, 마법사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가 시작되면 네 그룹은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치열한 각축을 벌인다. 영국 교육의 전통적 강점인 ‘경쟁’을 통한 실력 향상이 영국 출신 작가의 소설 속에도 투영되는 것이다. 무분별한 경쟁 대신 선의의 경쟁을 도모하여 경쟁의 긍정적 효과를 최대한 살린다.
또한, 호그와트 학생들을 4가지 타입으로 나뉘어 교육을 하는 것은 영국의 교육 이념을 반영한다. 영국의 교육 이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인의 재능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이다. 재능 있는 학생을 학업 성취도가 느린 학생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특수 능력에 맞는 교육을 시행하기 때문에 학업 성취도가 빠른 학생을 그대로 장려한다.


호그와트를 믿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믿는 것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우주의 순리와 과학의 법칙에 절대적으로 어긋나는, 그래서 절대 있을 수 없는 판타지의 끝으로 취급되는 해리포터. 그러나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해리포터가 다니는 호그와트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우리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이유 하나가 아닐 것이다. 마법사가 되고 싶고, 될 수 있다는 꿈을 그 누구보다 존중하고 실현시켜줄 수 있는 학교가 얼마나 있겠는가. 약초학이나 마법처럼 흥미로운 학문은 고사하고 지극히 대입과 시험을 위한 학문을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호그와트는 사람들이 학교에서 이제껏 배우지 못했던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호그와트는 실존되야 한다

인간이 모두 똑같은 능력과 역량을 타고났다면 세상은 진보할 수 없고, 미래는 만들어질 수 없다. 공장의 부속품처럼 일정한 크기로 깎고 다듬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이 잠재하고 있는 재능을 발굴하여 나라의 인재로 육성시키는 것, 그것이 학교에서 마땅히 시행되어야 한다. 교육은 천부적으로 지닌 가능성의 원석을 보석으로 제련하는 것이다. 그 보석이 세상을 빛낼 수 있는 미래다.
 

무력(武力)에 무력(無力)해지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엄석대의 학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작가 이문열의 소설로 정치, 권력의 흥망성쇠를 초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4·19 혁명 전 시골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 간 한병태는 독재자 엄석대의 권력에 저항하다 학급에서 소외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한병태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마는데, 새 담임 선생님이 부임한 후 엄석대가 부정행위로 전교 1등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의 비행이 속속들이 드러남으로써 기존 질서가 무너진다. 그는 학교에서 도망치게 되고, 훗날 어른이 된 병태는 어느 날 경찰에 붙들려 가는 엄석대를 우연히 만난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학교라는 소집단에서 벌어지는 독재의 군상

정치적 의식이 형성되지도 않은 초등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독재 체계. 신기한 것은 엄석대의 독재를 아무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에 동조하는 하수인을 자처한다. 오히려 저항을 시도하는 자에 대해 방관하거나 소외를 시키는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왜 이러한 정치적 이야기를 학교로 접목시킨 것일까. 바로 학교는 사회화된 인간으로 길러지기 위한 기초 교육 기관인 동시에 그 또한 일종의 작은 ‘사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이라 불릴 만큼 집단의 소속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 그 곳에서 요구하는 여러 규칙을 설정하고 준수한다. 그리고 때때로 그 사회가 불합리를 요구해도 동의를 표하는 경우도 있다.
그 시작은 사상이나 신념, 정치적 성향 등 개인의 의식이 만들어지기 전인 학교에서 출발한다. 사회에 배출되는 여러 군상이 학교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유형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든, 불의를 추구하는 것이든 아니면 방관하는 것이든.


아직도 군림하고 있는 엄석대, 몰락하지 않는 이유

뉴스를 보면 엄석대처럼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사람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휘두르는 이른바 ‘갑의 횡포’를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엄석대는 탄생하지만, 그를 몰락시킬 ‘새 담임 선생님’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왜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세상에 있는 엄석대들은 사라지지 않는가. 독재자의 곁에는 그를 따르며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우매한 군중이 있기 마련이다. 그 군중은 수가 많아질수록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마저 동참하게 만든다. 사람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집단이 도리어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한병태는 한 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여야만 한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참하거나 묵인하는 것은 무지보다 나쁜 행위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부조리를 합리화시키는 순간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가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의에 맞서는 의식을 확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병태가 그러했듯 의식은 있지만 한 개인이 항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설에서는 독재의 몰락을 민중들의 계몽이 아니라 더 강한 권력에 의해 뭉그러뜨리는 전개로 그려내는 다소 아쉬운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불합리를 타파시킬 새 담임 선생님이 올 때 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가장 낮고 가장 작은 목소리라도 백 개의, 천 개의 외침은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순종과 순응만이 유일한 가르침 

벤야멘타 하인 학교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독일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대표작. 귀족 출신 소년 야콥이 ‘가장 작은 존재이자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을 양성하는 벤야멘타 하인 학교에 스스로 찾아가는 모순적인 이야기이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유에서 무로 향하는 아이러니

보통 소설들, 특히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소설을 읽어보면 주인공이 ‘무엇’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벤야멘타 하인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는 다소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주인공 야콥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끼니 걱정, 돈 걱정, 취업 걱정 따위는 생각에 담아보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세상이 흔히 성공했다고 표현하는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삶을 사는 건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미미하고 낮은 자리에서 살아갈 노예를 길러내는 ‘벤야멘타 하인 학교’로 떠났는가? 사회가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은 수많은 원칙과 규범에 평생 지배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로 간 그는 그동안 그를 둘러싸 왔던 모든 이해관계를 벗어나 자신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는 끝내 돌아가지 않고 사막으로 떠난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아마 그는 그때야 비로소 행복함을 느꼈을 것이다.


‘받아들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

그러나 ‘학교’라는 교육기관에서 순응과 복종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세상을 발전시킬 아이들에게 ‘퇴화’하는 법을 가르치는 셈과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학교의 순기능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 있는 학교 역시 별반 다른 것은 없어 보인다.
벤야멘타 하인 학교에서의 주입적이고 수동적인 가르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많은 배움을 수용하고 있는 우리를 한번 되돌아보자.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본 적이 있는가? 설령 학문이 아닌 규칙이나 관습과 같은 제도에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타당한지 따져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귀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노트에 받아적고 당연하다는 듯 수용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할 때가 왔다. 
배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떤 것을 배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배움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따져가며 받아들여야 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당연해하지 말자. 그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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