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여론 문화탐방
4.19의 함성, 피의 화요일에서 승리의 화요일까지..[역사카폐] 4.19혁명(2)
지난주 19일(월요일)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길이길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순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1960년 4월 19일(화)혁명이 일어난 후 반세기가 지난 2010년 4월 19일(월). 대한민국 곳곳에서는 4.19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 되었다. TV, 신문 등 각 언론에서도 50주년을 맞은 4.19혁명을 기념해 다양한 특집기사를 내놓았다.

 1960년 4월 19일 '파의 화요일'
뿔난 국민들"이승만정권은 물러가라

 1960년 4월 19일. 그날은 화요일이다. 전날있었던 고려대 사건을 접해들은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들은 이미 계획된 절차에 따라 학내의 많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선언문을 낭독한 뒤 중앙청으로 행진하였다. 대학생들의 행렬을 지켜본 고등학생들도 행렬에 동참했다. 학생들은 국회의사당과 중앙청,경무대(지금의 청와대)들을 거치면서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학생들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시간이 흘러가자 시위행렬에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들 많은 시민들이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오전 내내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는 조용히 끝나지 않았다. 오후 1시 40분께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면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다쳤다. 경찰의 무차별 난사로 인해 생겨난 참극이다. 이밖에도 이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이날을 '피의 화요일' 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시신은 현재 4.19혁명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경찰의 총격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승만대통령은 서울시내 곳곳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민심은 이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떠나 있었고, 시민들은 보다 근본적이고 진보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밀고 당기기가 4~5일정도 계속되었다. 무분별한 지납으로 사상자는 계속 늘어갔지만 정부의 강압적인 태도는 구굽힐 줄 몰랐다. 하늘을 찌르는 정권의 오만에 시민들은 더 큰 분노를 느꼈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보수성향의 교수들마저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4월 25일. 교수들은 시국선언과 함께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27개 대학 교수 단 300여명이 국회까지 행진 시위를 벌이며 이승만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사회적 지식계층인 교수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권에 있어서 매우 큰 타격이였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60년 4월26일 10시. 혁명졸료
국민들 '승리의 화요일' 맞이해

 줅은 장미가 쓰레기 통속에서 피어났다.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은 결국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이르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대통령은 결국, 26일 오전 10시30분. 계엄사령부에서 라디오를 통해 사임을 발표했다. 이대통령은 사임사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라디오를 청취하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기뻐했다. 1945년 8월 15일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거리는 자유를쟁취한 시민들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1960년 4월 26일은 화요일이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시위를 시작하게 된 날은 정부의 과격한 진압으로 인해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는데, 4월 혁명을 성공하고 정점을 찍는 날도 화요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기억하기 위해 이날을 '승리의 화료일' 이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은 50년전 그대들이
만들어 놓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은 가족들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하야를 결정한 이승만대통령은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 죽는 순간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4월 혁명 이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민주당은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책임제 형태의 새 정권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국민이 출범시킨 민주정권은 혼란한 정국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국민이 원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질 못했다. 이는 권력을 노리던 다른 세력들에게 빈틈을 제공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의 지휘아래 진행된 구테타로 인해민주당 정부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국민이 세워 놓은 제2공화국은 무너졌다. 무너진 자리에는 군부가 들어섰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기나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4.19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민중들이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4.19를 성공했다고 보느 시각을 내보이고 있다.

 지난 4월 19일(월)과 20일(화)에는 인문대학 3층에서 3.15의거와 4.19혁명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이 열렸다. 학생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사진을 구경하면서 50년전 그날을 느꼈다. 학생들은 방명록에 "4.19 정신이 이어져야 한다.","6월 2일, 꼭 투표하자!"는 등 여러가지의 글을 남겼는데, 방명록에 쓰여진 글들 중 눈길을 끄는 글의일부분을 소개하면서 3.15에서 4.19까지 이어졌던 연재를 마치겠다. 다음호에서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하는 5.18민주화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50년 전, 그대들이 만들어 놓은 민주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현재의 부정,부패에도 아무런 저항없이 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창원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재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