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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실현’과 잘 살아보자‘는 의거의 밑거름[역사카페]
부정선거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마산 민주당사로 몰려들고 있다.<사진제공:(사)3.15기념사업회>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에 민중들은 이제 더 이상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민심은 결국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에 이르렀다.

1960년 2월 28일과 3월 8일에 대구와 대전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자유당은 선거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도 대한민국에서 집권당으로 계속 남기를 원하던 자유당은 결국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 사건이 바로 3·15부정선거이다. 당시 역사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본기자는 백한기(이하 백) 3·15의거 기념 사업회 회장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다음호에도 계속 될 예정이다.

3·15의거 기념 사업회는 어떤 단체인지에 대해 묻자, 그는 “우리 사업회는 3·15의거 정신인 민주·자유·정의 정신을 계승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그는 3·15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들을 발굴해내서 국가적인 보상을 이끌어 내도록 노력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말했다.

 우리 신문사가 백 회장과 인터뷰를 한 이유는 그가 3·15의거 기념사업회의 회장이면서 1960년 3월 15일 당시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희대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당시 학제가 4월에 입학하고, 2월에 졸업하는 학제였기 때문에 그는 3월에 마산에 있을 수가 있었다. 당시 나라의 형편은 어떠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당시 대학을 ‘우골탑’이라고 불렀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골탑은 ‘가난한 농가에서 소를 팔아 마련한 학생의 등록금으로 세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당시 대학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다. 언뜻 당시 학생들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백 회장은 스스로 자신이 교육을 받던 시점이 민주화 교육이 막 시작될 때라면서 민주화교육의 1세대임을 강조했다. 그는 “학교에서는 ‘민주주의는 잘 산다’라고 가르쳤어요. 그런데, 이것이 현실과는 맞지 않았어요”라고 당시를 소회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춘궁기를 넘기는 일이 매우 보편적으로 일어났던 당시는 배가 고파서 나무껍질을 캐서 죽을 해먹기도 하고 콩나물국으로 허기를 채우는 일도 허다했다. 그는 “내가 중학교 때는 ‘우리의 맹세’라는 것을 했었어요. ‘우리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라는 맹세를 매일같이 했거든요. 지금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생각 했었어요”라고 말한다.

 1960년대, 당시 사회상은 어떠했을까? “당시는 사바사바(귓속말)가 매우 공공연하게 이뤄졌어요. 부정부패가 정말 심했죠”라는 그이 말대로 당시는 부정부패가 매우 성행했던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정부가 적산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 일본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재산을 적산재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정부가 민간에게 불하하는 과정에서 부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돈을 가진 상인과 권력을 갖고 있던 관료와 정치인들이 서로 밀착해서 재산을 나눠서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들이 밀착해서 재산을 모두 가져가버리니까 힘 없는 서민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유당이 3기 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르니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던 거죠”라고 말했다.

 3·15선거 전, 마산 시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동양주정 사건인데, 이 사건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대표로 나와 당선 되었던 허윤수 의원에게 여당이 동양주정을 주는 조건으로 허 의원을 영입하게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허윤수가 여당으로 들어가게 되자 마산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백 회장은 허 의원이 여당으로 입당하게 된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좀 바꿔보려고 뽑아 놨더니 마산시민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여당으로 들어 가버렸어요”라며, “이건 결론적으로 마산 시민들에게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 되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3·15의거 이후 허 의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말에 따르면 3·15의거 당일, 마산시민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허 의원의 집에 분노한 시민들이 들어가서 집 기둥을 뿌리 채 뽑아버렸다고 한다.

 허 의원의 영입작전은 자유당 나름대로의 선거 전략이었는데, 자유당이 선거를 위해 세운 계획은 이게 전부였을까? 백 회장은 “당시에 부정선거와 금품선거가 너무 심했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지령에 의해서 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집에 가면 여당을 찍어야 우리가 잘 산다고 전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집에 가면 각 동의 반장들이 찾아와서는 흰 고무신을 나눠 주고 돈을 봉투에 넣어 주기도 했는데, 당시 검정 고무신이 대중적이었던 반면, 흰 고무신은 고급 신발이었어요. 사람들의 호응도 좋았죠. 이 때 야당 사람으로 주목받은 사람들은 선물을 못 받았구요”라고 말한다. 선거 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럼 어떠했을까? 백 회장은 “당시 사람들이 ‘선거를 하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당시 야당은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고 선거 문구를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정했다. 자유당과 민심을 겨냥한 선거 문구였는데, 자유당은 이를 감지하고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선거문고로 맞대응 했다. 서로 대립하는 두 선거문구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증거자료가 된다.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 짓고, 3월 15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3·15선거는 부정선거로 유명하다. 4할 사전투표는 물론, 3인조, 5인조, 9인조 투표도 있었다. 도심지역은 주로 3인조를 이루고, 시골로 갈수록 9인조까지 조직했다. 누가 누구를 뽑았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정 선거에 대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잖아요?”라고 반문하며 “그런데 선거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어요. 마산시민들이 분노했던 이유였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다음 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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