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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의거와 4.18 고려대 학생사건 그리고 4.19[역사카페] 4.19 혁명 (1)
‘김주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그는 지난 510에서 백한기 3.15의거 기념사업회 회장이 말한 4월 1일의 사건과 매우 관련이 깊다. 김주열과 연관된 이 사건은 3.15의 연장선이 됨과 동시에 4.19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1960년 4월 11일 새벽 마산 제2부두, 고기잡이를 하러 나간 한 어부가 해수면에 떠오른 변사체 한구를 발견하게 된다. 시신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었으나, 한쪽 눈에 큰 최루탄이 꽂혀있었다. 시신의 주인공은 바로 마산상고에 입학 예정이던 김주열(당시 17세)이었다. 김주열은 3월 15일,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마산의 친척집에 머무르다가 시위에 참가했는데, 당일 행방불명 되었다.


 그가 실종되자 남원의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지내던 그의 어머니는 마산 시내 곳곳을 찾아다니며 김주열의 행적을 찾았다. 백한기 회장은 “당시 관련기관의 검거열풍으로 마산시내에는 사람들이 나다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마산시내에 어느 미쳐버린 할매가 돌아다닌다더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만큼 김주열군의 어머니가 그를 애타게 찾았었다는 반증이 된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김주열의 고교선배이기도 하다(그의 사망 이후 그의 집에는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실종된 김주열은 산자가 아닌 죽은자의 모습으로 그를 애타게 찾던 어머니의 앞에 뉘여졌다. 발견당시의 시신은 부산일보 김종 기자의 특종사진으로 인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공포에 떨던 마신시민들은 김주열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시신을 이송하는 중간 중간에 시민들이 밖으로 나와서 그 모습을 기켜보았고, 마산도립병워에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분노한 몇몇 시민들은 산발적으로 기습시위를 일으켰다.


 김주열의 죽음으로 다시 불타오른 마산


 다음날, 김주열에 대한 소문은 마산시내 곳곳에 퍼졌고, 도립마산병원 앞에 3만 여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시민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자”며 병원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시민들의 거센 농성에 병원측은 김주열의 시체를 병원 밖에 안치해두었고, 많은 시민들이 참혹하게 숨진 김주열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 이후 마산시민들은 격분하기 시작했고, 다시 들고 일어났다. 제2차 마산의거가 발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일각에서는 4.11의거로 부르기도 한다). 제2차 마산의거가 3월 15일과 다른 점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주열이 소속했던 마산상고를 포함해 인근의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쳤다. 시민들은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 등 많은 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마산에서 다시 시민들이 일어나게 되자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죽음을 담보로 학생들이 외쳤던 ‘민주화’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한 사람으로 인해 마산시내 전역이 다시 들끓었듯, 우리나라 역사에는 학생들의 힘으로 일궈낸 사건들이 너무나 많다. 1960년 한해만 해도 2.28 대구 학생운동, 3.8 민주의거, 3.15의거 등이 있었는데,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있었다. 구 즁 4.18 고려대 학생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사건을 회자된다.


 1960년 3월. 당시는 대학가가 모두 봄 방학을 맞이한 때였다(당시 대학교는 4월에 1학기가 시작되고 2월에 2학기가 끝나는 구조였다). 고려대학교 정경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세기 등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은 2.28, 3.8, 3.15 등의 사회현실을 바라보며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던 중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사태를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학생들은 새로운 의거를 계획했다.


 4월 18일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거사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학생 대의원들은 약 3000여명의 학생들을 교정에 집합시킨 후 고대신보(고려대 학보사)의 박찬세 편집국장이 작성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후 고려대 학생들은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를 드높이자”는 플랜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와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이들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 사건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을 배격한다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의 해산작업으로 잠시 흩어졌던 학생들을 국회의사당 앞에 다시 1,000여 명이 집결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유진오 고려대 총장 등이 나서 시위하던 학생들을 설득했고, 오후 늦게서야 학생들은 만류를 받아들여 해산을 하고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평화적으로 시위를 끝내고 집에 가던 학생들에게 쇠망치, 몽둥이, 벽돌 등과 같은 흉기들이 날아왔다. 많은 학생들은 힘 하나 못쓰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사건을 ‘4,.18 고려대 학생사건’이라고 하는데, 약 100여명의 조직폭력배들이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던 1000여명의 고려대생을 피습한 사건이다. 고려대학교는 이 역사적 사실을 잘 보존하기 위해 매 해마다 4.18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학내에는 4.18 기념탑과 기념관을 세워 4.18 정신을 대내외에 홍보하고 있다.


 민주화의 열망은 결국 불타오르고...


 아이러니하지만, 정권의 하수인임을 자처하던 정치폭력배들의 기습폭력은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에게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 되어 버렸고, 다음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데 큰 일조를 하게 된다.


 서울 한복판에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4.19 혁명’이다. 쓰레기통 속에 살던 장미가 한송이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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