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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많은 사회일수록 불만이 넘친다

사회를 둘러보면 불쌍한 이들이 도처에 넘친다. 버스만 타 봐도 노인, 장애인, 임산부, 어린이 등 자리를 양보해야 할 사람 천지다. 오히려 몸 건강한 내가 죄송할 따름이다. 또 북녘에는 동포들이 공포정치에 죽어가고, 중동에서는 끊임없는 내전에, 아프리카는 기아로 인한 죽음 등 온 세계가 고통에 신음한다.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 ‘좋아요’도 눌러보고, 구호성금도 보내보고 하지만 계속 제자리다. 내 힘은 미약하니, 같이 하면 잘 될 것 같다.

우리 사회 지도층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돈 많은 재벌들은 돈 안내고 뭐하나. 온 세상이 고통 받는데 고급차 끌고 다니는 꼴을 보니 화가 난다. 정부는 재벌들 혼내지 않고 뭘 하고 있나, ‘여러분 저들이 저렇게 고통 받는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재벌들이 혼이 나고, 사람들은 구호성금을 더 내기 시작한다. 세상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나 하나가 바뀌니까 온 세상이 바뀌고 정의로운 세상이 곧 도래할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불쌍한 노점상을 돕자며 포장마차를 이용하다보니, 정상적인 점포들이 문을 닫고 주변에 포장마차가 늘어서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갑자기 어딘가 아프고, 사연 있는 사람들로 변해간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 보다 연기하는 것이 돈 벌기 더 쉽기 때문이다. 아뿔싸.. 멀쩡한 사람들이 병신 노릇하는 꼴을 보게 된다. 약하다거나 사회적 소수라는 것이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전에 나이키가 파키스탄에서 어린이들을 통해 축구공을 만드는 사업을 한 일이 있다. 전 세계의 마음 착한 분들은 나이키가 파키스탄 어린이를 착취하며 학교도 못 가게 만든다고 시위를 벌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나이키는 마침내 파키스탄에서 철수했고 그때 그 어린이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어린이들은 일터가 사라지면서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사람을 쓸 기업은 이제 없다. 그 어린이들은 성매매로, 마약 거래상 등의 음지로 내몰렸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다 알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들을 지옥으로 내 몬 것은 진정 나이키였나.

이천 년 전에 벌써 예수께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 말씀을 그렇게들 모른다. 내가 착한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이에게는 ‘불쌍함’이 한푼 더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조건’이 된다. 그것은 사람들을 스스로 거짓되게 만든다. 예수는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구제나 관용은 그래서 모르게 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와 선한 결과를 모두 만족시켜야 진정한 선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선의로 포장 돼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죽이게 된다. 관용이 넘치는 사회일수록 온갖 사람들이 능력이 아닌 사연으로 경쟁하게 된다. 능력은 우열의 선택이 가능하지만, 관용을 위한 사연은 선택할 수 없다. 그로 인해 관용을 차지하려는 사람들끼리 무한 투쟁이 시작된다. 아귀지옥이다. 어설픈 관용, 전시용 자선은 오히려 ‘악의’보다 훨씬 더 해롭다. 지옥은 언제나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우리의 ‘선한 의도’가 만든다.

손경모 기자 remaist@ch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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