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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하여 교육은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해 교육이 있으며, 누구를 위해 교육이 존재하는가. ‘사람이 되라.’ 각양각색의 사람 여럿이 어우러져 살기위해선 꼭 그 말을 명심해야 했다. 이웃의 것이 탐나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하면 그를 저지른 자는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을 받고 공동체에서 쫓겨나거나 노역을 했다. 사람끼리 조화롭지 못한 사회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돼 있었고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현인들은 사람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바로 이 과정이 교육이다. 즉, 교육의 본질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인들의 시간은 흘러가 이젠 21세기가 됐다. 그동안 교육이란 것은 부유한 자들만의 특권으로 변했다가 누구나 받아야 되는 것으로 바뀌었고, 나라별로 민족별로 교육에 대한 이념과 그 방식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종래엔 교육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등수를 매기는 웃기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들 중, 학업성취도가 2위다’, ‘근소한 차이로 핀란드에게 1위를 내줬다.’ 국내에서 떠도는 말을 듣고 핀란드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근소하다’란 말은 그네들을 아주 격하시키는 말이었다. 교육의 본질을 모르면서 그저 답을 맞춘다는 의미에만 세상의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수준 낮은 행위와 비슷한 취급을 당하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핀란드의 교육철학은 누구나 사회에 도움이 될 재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특정 과목의 학습능력이 부진한 학생들을 낙오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진단할 수 있다.
첫 번째, 누구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재능을 가진다. 사람은 공산품 같은 존재가 아니다. 개개인의 역량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존엄하다. 우리나라의 교육 철학 역시 이와 다르지 않으나 좀 더 현실적으로 파고들면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영어를 잘하고, 수학과 과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야 한다. 모든 인재상이 그렇게 천편일률이다.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배양하기보단 남들과 똑같은 과목을 그들보다 더 우수한 성적을 받아 더 좋은 고등교육기관에 들어가야 사람이 되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고 말한다.
두 번째, 낙오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들어간 고등교육기관도 누군가로부터 잣대가 드밀어진다. 그의 기준보다 높거나 낮다면 아이는 함부로 재단돼 ‘될 성 부른 떡잎’, ‘노란 싹수’로 불린다. 그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는 본디 여러 집단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함께 어우러져야만 공동체는 건강하고 사회가 밝아진다. 하지만 이 사회는 노란싹수들을 일찌감치 덜떨어진 놈들로 분류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강요한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성체가 된 떡잎들과 싹수들은 그 과정을 거쳐서 알고 있기 때문에 제 자식들이 사회에서 찬밥신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후 쏟아지는 공부, 공부, 공부. 남의 자식들보다 더 뛰어나길 바라며 제 핏줄을 위해 끊어놓은 학원 수강권이 얼마고 레슨이 몇 개인지 셀 수조차 없다. 이 땅에서 제 본성을 갈고 닦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이가 몇이나 될까. 이미 죽은 지 오래된 교육을 찾으려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하다.
2014년 9월부터 시작될 선행학습금지법이 과연 눈앞을 밝혀줄 수 있을까. 오로지 입시만을 쫓아 교육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교육의 뒤를 쫓는 공교육에게 따끔하게 야단이라도 쳐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학원 강사를 교육자라고 하지 않는다. 교육자마저 제 본분을 잊고 날뛰는 이때, 현실적으로는 실행돼선 안 되는 법이라 하더라도 이 같은 소리가 나오게끔 변해버린 교육에게 쓴소리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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