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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설원에 피는 꽃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연아 선수의 쇼트프로그램 경기가 그날 밤으로 훌쩍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우리 여왕님을 영접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TV 화면을 응시했지만 하필이면 그날따라 왜 이리 눈꺼풀이 무거웠던지. 중계 시작 2시간을 남겨두고 이 처자는 우리 여왕님을 배신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었다. ‘분명히 1등 하시겠지’라는 안온한 생각과 함께.
일찍 잠이 들었던 터라 아버지가 출근하시기 전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간에 방문 너머로 ‘김연아가 현재 1위다’, ‘역시 김연아다’, ‘근데 점수가 왜 이리 짜노’ 등등 어머니와 두런두런 대화하시는 걸 들었다. 그리고 ‘역시 연느. 당신은 최고예요. 그럼 다시 자겠습니다’라는 생각을 끝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N포털싸이트에서 지난밤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검색하다 세계 유명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아사다 마오나 카롤리나 코스트너, 그레이시 골드도 아닌 웬 처음 보는 숙녀분의 이름을 보게 됐다.
‘다음날 프리스케이팅은 꼭 생방으로 보고 말리.’ 그렇게 다짐했건만 여왕님 2차 영접도 실패로 돌아갔고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언뜻 잠에서 빠져나왔다. ‘은메달이라카네.’ 그 한마디에 아직 꿈속인 줄 알았었다.
쇼트트랙 경기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빅토르 안도 그렇고 이상화, 심석희 등등 대한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이번 올림픽에서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조막만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인재들이 나오는 걸까?
소치올림픽이 개최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느 일간지의 사설을 인터넷으로 본 적 있다. 한국인의 억센 어머니 유전자가 후대까지 흐른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땐 재밌다고 넘어갔지만, 이게 시간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그럴싸한 말이라 생각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크고 작은 분쟁이 많았는데 전쟁 후 피폐한 나라에서 우리 어머니들은 전사한 남편 대신 밭을 일구고, 물질하며 아들딸들을 키워냈다. 이런 강인한 유전자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타국의 선수들과 달리 매우 열악한 우리나라 스포츠환경에서 김동성, 빅토르 안, 김연아, 이상화, 박태환 등의 재인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유전자가 우리 몸에 아직 흐르고 있어서 아닐까.
시린 칼바람과 뼛속까지 사무치는 냉기가 온몸을 돌아도 움은 트고 꽃이 핀다. 추우면 추울수록 꽃은 눈 속에서 더 빛나고 그 어떤 가치보다 값진 생명을 품는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도 우리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다시 살아간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러운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 가치가 온실에서 큰 꽃에 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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