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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 젖어 음악에 젖어, '비처럼 음악처럼'감대진(법 82)사장님을 만나다.
  • 강진주 수습기자
  • 승인 2012.04.1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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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남동에 있는 가게에 들어섰을 때‘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상호에 알맞게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널찍한 가게의 중심부엔 화려한 조명과 잘 정돈된 음악 기기가 놓여있어, 마치 정식 공연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게의 벽면 한 쪽에는 여러 앨범 사진이 붙어있었고, 거기엔‘감대진’이란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으신 분, 바로 LP판의 주인공인 감대진(법 82)씨이다.
앨범 속 앳된 모습에서 세월이 묻어난 얼굴로 바뀐 중년의 신사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다. 가게 간판에 ‘감대진’이란 이름이 걸려있던데 정말로 라이브 공연을 하는지 묻자,“그럼요. 매일 밤 8시 40분부터 1시까지 총 6스테이지에 걸쳐 공연을 해요. 공연을 위해서 매주 등산과 축구를 하며 몸 관리를 한답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노래가 좋았던 법학도
음반까지 냈던 가수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음악과 거리가 먼 법학을 전공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와 같은 악기를 접하면서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고, 학창시절엔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며 공부를 등한시 했어요. 그러다가 고3 말에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싹 공부했고, 검찰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법학과’에 진학하게 됐어요. 아버지께서는 법조계에서 일하길 바랐지만, 저는 음악의 길을 포기할 수가 없었고, ‘키프러스’활동을 하며 대학생활을 했지요”고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키프러스’라면 지금도 우리대학에 있는 그룹사운드인데 그렇게 오래됐냐며 놀라자, “올해로 키프러스가 30주년이 돼서, 5월에 우리 가게에서 1기부터 30기까지 모여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 당시 키프러스 활동을 하면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경남대 등 대학 축제에 초청되기도 했어요”고 답했다.
현실의 쓴 잔을 맛보다.
키프러스 활동으로 경남지역에서 실력 있는 보컬로서 경남일대에서 명성을 떨친 걸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대회에서 입상하게 되었냐고 묻자, “마산 MBC 아마추어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고, 경품으로 세탁기를 받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MBC 대학가요제와 노래자랑 연말대회의 일정이 겹치게 돼서, 대학가요제 측에서 실력이 좋아도 입상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대학가요제를 기회로 삼아 당시 조용필씨가 소속됐던‘지구레코드’에 스카우트 되며 가수의 길로 들어섰어요”고 회상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1집 땐 무슨 곡으로 어떤 활동을 했냐고 물어보자,“1집은 85년에 ‘빗방울’이란 곡으로 활동했어요. 당시 라디오 순위 7위까지 했는데, 솔직히 장르가 제 음악적 성향과 맞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활동을 중간에 접었어요. 그 이후에 이선희씨와 ‘한강의 노래’라는 곡도 부르고, ‘한지붕, 세가족’라는 드라마 음악작업에도 참여했지요. 그러다 매니저가 도망가는 등 일이 겹치고, 당시 홍보비로 부모님이 피땀 흘려 번 돈이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저 혼자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어요”고 말했다.  그렇게 홀로 선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졌냐고 묻자, “TV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하고, 주로 밤무대를 섰지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라이브 카페를 열어 그곳에서 노래를 했고, 다행히 사업은 성공했어요. 그렇게 라이브 카페에서 힘들게 동고동락했던 후배가 김건모, 박강성인데 지금은 잘 돼서 기뻐요”고 뿌듯해하며 말했다.  서울에서 하던 라이브 카페를 접고 어떻게 하다가 창원까지 내려 오게 됐냐고 묻자, “제 하늘인 아버지께서 대장암 판정을 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속만 썩여드렸는데 나중에 더 큰 후회하기 싫어서 가게고 집이고 다 정리하고 내려왔어요. 처음엔 아버지께서 6개월 판정 받으셨는데, 결국 2년 7개월동안 연명하고 돌아가셨지요. 선산에 아버지를 묻고나니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고, 고향에 머물게 됐어요”고 눈물 머금은 시선으로 대답했다. 그럼 창원에서는 무엇을 하며 생계를 꾸리셨냐고 물어보자, “창원 마산에 있으면서 감각을 살려 인테리어 업에서 일하다가, 세월이 흘러 인테리어 업이 쇠퇴하게 되면서 그 일을 그만뒀어요. 그러다 5년 전에 이 가게를 우연히 발견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상호가 맘에 들어 들어왔더니, 거의 망하기 직전의 가게였어요. 하지만 이유도 모르게 이끌렸고, 결국 가게를 인수 했어요”고 답했다.

멈출 수 없는 것
인터뷰를 시작한 시간은 밤 8시, 드문드문 앉아 있는 손님들을 제외하고는 한적한 분위기였다. 어떨 때 손님이 많이 드냐고 묻자, “5년동안 가게를 운영했는데 아직도 언제 손님이 많이 드는지 예측 할 수 없어요. 비가 오는 날, 사람들이 감성에 젖을 때 쯤 손님이 많이 와요. 창원이 공단도시라 그런지, 술집에 오면 서로 대화하려고만 하지 남의 노래를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서울만큼 가게가 잘 되지 않았어요”라며 씁쓸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손님이 드물면 수익을 내야하는 입장에서 가게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 묻자, “다른데서 얻은 수입을 5년째 쏟아 붓고 있어요. 수익이 나진 않지만 장사꾼의 모습보다는 음악하는 사람의 순수함으로 힘이 닿을 때까지 가게를 유지하고 싶어요. 후배들이 와서 노래할 수 있게 하고 싶고, 저 역시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이곳에서 노래하고 싶어요”고 답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계획에 대해 묻자, “요즘에 악덕 기획사로 인해 사기피해를 입는 후배들이 많은데, 그런 피해자가 없도록 잘 연결해 주고 싶어요. 저는 남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비겁하게 행동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해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가게를 운영하면서 수익을 위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아요. 오직 관객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살고 싶어요”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여쭈니, “저는 이틀 이상 노래를 쉬면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어요. 저를 미치게 하는것은 노래에요. 무엇이든 하나에 미쳐 파고드는 것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야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미치도록 파고들었으면 좋겠어요”고 분명한 목소리로  답했다.

법학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가수가 되었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에 부딪혀 라이브 카페로 전향했던 감대진 사장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월이 야속해 과거를 후회해보기도 하였지만, 지금의 현실 속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으며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감미로운 노래만큼이나 따뜻한 감성을 지니신 사장님의 말씀 속에서 인생 선배로서 쌓은  삶의 철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바람이 부는 날, 행복이 충만한 날 언제든지 ‘비처럼 음악처럼’을 방문하여 잔잔한 감동을 느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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