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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한국의 민주주의' 입니다.인동초와 같은 삶, 모든이에게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어
  • 임예슬,이미현
  • 승인 2009.08.3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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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있었던 지난 28일. 늦은 밤에도 서울시청 앞 그의 분향소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시민들의 그의 분향소앞에서 묵념을 하고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돌아보다]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얼마 전 공개된 김대중 전 대통령 일기 중 올해 1월 14일자 일기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오후 1시 43분경 삶을 마감했다. 그는 일기 내용처럼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던 것이다.

정치 입문, 고난의 시작

 그는 54년부터 목포에서 3대 민의원 선거에서 입후보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게 되었다. 결과는 낙선이었지만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서 잇따라 선거에서 낙선되어 좌절을 맞보았지만 60년에 민주당 대변인으로 뽑히게 된다.

 유신시절 그는 군사독재에 맞서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70년 그가 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결과는 패였지만 수많은 비리에도 46%의 득표율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94만 표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이 선거로 인해 그는 정권의 눈엣가시거리가 된다. 71년 4월 대선 때 그의 집 앞에 폭탄이 투척되었으며 같은 해 5월 24일 그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진행하는 중이었고 그는 지원유세를 하고 오는 길에 대형 트럭이 덮쳐 대형사고가 일어 난 것이다. 죽음에 빗겨나갔지만 그는 고관절을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73년 8월경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이라는 큰 고난이 또 찾아오게 된다. 72년 유신사태를 맞아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에서 망명해 유신 반대 운동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본 교토의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양일동 통일민주당 당수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괴한 6명에게 납치 되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이었으며 그의 얼굴에 보자기를 씌우고 손발을 결박한 상태로 재갈을 물려 무거운 물체를 매달아 바다 던져 수장하려고 했으나 의문의 비행기가 방해하여 이는 중지 되었으며 이틀 뒤가 되어서야 자택으로 갈 수 있었다. 납치사건 당시 그를 도왔던 비행기는 CIA의 첩보기라는 설만 들려오고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분향소 근처 게시판,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하고 싶은 말을 남긴 메모들

정권 교체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역경

 79년 유신정권은 물러나게 되었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12월 12일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섬으로 인해 그에게 새로운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80년 5월 17일 군사정권은 계엄령 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5·17 조치를 감행하게 된다. 당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대표였던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 등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한다. 하루 뒤 군사정권에 맞서서 민중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신군부세력들은 이를 김대중 일당이 함께 정권을 잡기위해 민중들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라고 조작한다. 이것이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김대중과 그의 세력들을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한다.

 같은 해 9월 17일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다음 해 1월에는 결국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되었다. 사형 확정 후 독일, 미국 등에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서게 된다. 이로 인해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 그리고 징역 20년형으로 감형해 82년 12월에는 그를 석방하였고 강제적으로 미국에 망명을 보냈다.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지내게 된다.

시민들이 남긴 메모들을 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억하고 있는 시민

시련을 이겨내고 드디어 찾아온 봄

 이와 같은 시련들과 역시서 언급되지 않는 시련 등 다양한 역경들을 헤쳐 나갔다. 그가 유신정권, 군사정권이 지나간 뒤 복권되어 끊임없이 대권을 향해 도전을 했다. 87년, 92년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특히 3번째 대권 도전에서는 김영삼 후보와 200여 만표 차로 패배하였기에 그 뒤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서 케임브리지대 객원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여기서 마무리 지을 것만 같았던 그의 정치 인생은 95년 이를 번복하고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함으로써 다시 시작된다. 97년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 손을 잡게 되었다. 12월에 드디어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햇볕정책’이라는 남북 정책을 내세웠으며 2000년 첫 남북 정상 회담을 하게 된다. 그해 10월 13일에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얻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인동초라 불렀다. 인동초는 추운 겨울을 이기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즉, 인동초와 같이 그의 삶에 고난과 역경이 많았으며 그는 그 고난들을 꿋꿋이 헤쳐 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 일기에 남겼던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라는 구절은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글 임예슬 기자 qazpl1029@changwon.ac.kr

사진 이미현 기자 emheye@ch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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