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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드라마 기황후 역사 왜곡
  • 황문영 수습기자
  • 승인 2013.11.2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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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사실대로 만들 거면 다큐를 찍지, 왜 드라마를 찍느냐?” 우리나라 공영 방송국 MBC에서 방영하는 월화드라마 ‘기황후’의 왕유 역할을 맡은 주진모 씨가 한 말이다. 총 50부작으로 구성된 드라마 기황후는 고려 시대의 실존 인물인 기황후를 소재로 하여, 제작비용만 100억 원을 들였고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 하지원, 주진모, 지창욱 등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화제가 된 것과 더불어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 또한 쏟아지고 있다. 기황후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충혜왕에 대한 180°
 다른 해석 등 실제 기록된 역사와 드라마 기황후에 나오는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 공영방송이 가져야할 자세를 잊은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기황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번 글을 통해 한 번 살펴보자.                                              
고려의 공녀로 시작한 기황후
  13세기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제국의 7차례 침입에도 항전을 했지만, 고려의 몇 배나 되는 영토와 인구를 가진 원나라를 이기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100여 년이나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는 수많은 내정 간섭을 받아야 했고, 왕자들은 인질로 끌려갔으며 정복 전쟁을 도우라는 명분으로 고려의 많은 물자와 인력을 빼앗겼다. 그 중 가장 악독했던 것 중의 하나는, 공녀라는 제도를 통해서 고려의 여인들을 공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던 일이다.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는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기황후도 이런 고려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신분이 낮은 집안은 아니었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후 그녀는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가 됐으며, 고용보는 기황후를 원나라 황제 순제의 눈에 띄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혀 기회를 노리는 것이 그 노력들에 해당한다. 남장을 하니, 복수를 하니, 활을 잘 쏘니 하는 등의 드라마 기황후와는 시작부터가 다른 것이다. 애초부터 기황후의 집안은 어렵지도 않았고, 그녀는 우여곡절이 많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지도 않았다.
원나라 순제, 원의 마지막 황제가 된 이유
 환관 고용보의 끊임없는 노력 덕인지, 아니면 순제가 어린 시절 왕실 정쟁 속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갔던 경험이 있던 덕인지 여하튼 기황후는 원나라 순제의 총애를 받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기황후는 순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1338년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를 낳고 이듬해는 제2황후로 책봉되기까지 한다. 공녀로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신데렐라 스토리가 따로 없는 것이다. 이후 기황후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앉히고 왕실 재정을 그녀의 손 안에 뒀다. 이렇게 막대한 왕실 재정을 틀어쥐게 됨으로써 그녀의 권력이 더욱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했고, 같은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황후의 권력 장악은 원나라에게 악영향으로 다가왔다. 순제 즉위 전 있었던 왕위 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체제였기 때문에 작은 혼란도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
 화려했던 날개가 부러지다, 기황후의 최후
 기황후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가 원나라의 황태자가 된 이후 기황후의 권력은 더 막강해졌고, 그 덕에 기황후의 집안이었던 기씨 집안은 고려 조정을 압박하고 휘두르기 시작한다. 고려에 내정간섭을 하며 종원 세력을 키워 그야말로 고려를 팔아먹었던 것이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나온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 결과 원나라에서는 기황후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轅)을 한림학사로 삼았다. 원나라의 압박을 받은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원나라의 요구 대로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기씨 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는 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 집안의 악행은 결국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이밖에도 드라마 기황후에는 충혜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현재 극중 인물인 충혜왕은 시청자들의 많은 비판의 영향으로 왕유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바뀌었지만, 근친상간을 서슴지 않았던 폭군을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변모시키려 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아직까지 이어지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황후의 제작진은 여전히 완강하다. 자막을 통해서 이 드라마는 ‘가상’이라고 밝힐 것이며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주장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의 뼈대에 70%만 허구로 채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가상임을 밝히고, 또 허구로 채운다고 해도 그 인물이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이라면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사실 및 평가와 혼동이 되고 역사적 사실이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이 있다. 수동적인 시청자에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인식의 중요성과 공영방송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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