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김 경 희/경영학과 4년

쩡하고 길이 얼었다. 오늘부터 한파가 예상된다더니 영 빗나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꽁꽁 언 바닥을 운동화 끝으로 톡톡 치니 미끌하고 엇물린다. 하아, 하고 짧게 내뱉은 한숨에는 하얀 입김이 피어나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두꺼운 가방을 고쳐 매고 나는 오늘도 저 높은 길을 올라간다. 이 차갑고 시린 길처럼 내 길 또한 그랬다. 단 한 순간도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일 수였고, 그 때 마다 나는 칠칠치 못하다는 핀잔을 듣곤 했다. 나는 언제나 날을 세워야 했고, 주변을 의식해야만 했다.

“우리 딸은 뭐 워낙 알아서 잘 하니까.”

전화를 받는 그녀의 입술엔 언제나 미소가 걸려있었다. 거만한 자부심과 정복자의 오만함, 그 복잡다양한 감정이 어우러진 웃음소리는 내 성적이 높아질 때마다 비례하게 커졌다. 더 높고, 크고, 간드러지게. 그리고 늘 그녀는 뒤돌아서 냉랭하게 웃으며 자발적인 공부를 권유하곤 했다. 아니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명령했다.

“공부 안 하니?”

아, 추워. 옷깃을 파고드는 맹렬한 동장군의 습격에 나는 몸을 움츠리곤 종종걸음을 더 빨리했다. 겨울은 싫다. 추운 건 정말 질색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열일곱의 한 겨울에 꿈을 찾았다. 나의 꿈은 의사였다. 문과가 좋니, 이과가 좋니 하는 질문 따위로 결정된 진로사항이었다. 기실 나로써도 반대할 의사는 없었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최고의 직업, 이만하면 목표로 삼아도 될 법하다는 마음으로 나는 오히려 흔쾌히 응했다. 그녀가 내민 선택지들 중 유독 앞으로 나와 있는 그 진로에, 나는 마치 그것이 나의 꿈 인양 선택했다.

“그럼 의사가 될게.”

“좋은 생각이야. 엄마는 네가 정말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해.”

진로가 정해졌다 하여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성적’이 중심이 되었던 대화에 ‘의사’라는 직업이 추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와 나, 우리는 모든 것을 참으로 쉽게 생각했다. 나는 공부를 잘 했고, 한 만큼 성적이 나왔다. 학교에서도 의대는 무리 없이 진학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신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내가 현실에 안주해 나태해지지 않도록 채찍질을 가했다. 그것은 마치 커리큘럼처럼 짜여 져 마치 하루일과인 양 나를 맴돌았다. 참으로 무미건조한 학창시절이었다. 오로지 공부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내게 하루에 열 알 이상의 견과류를 먹게 했다. ‘두뇌 회전에 좋아.’ 그녀는 한 마디로 견과류를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언젠가, 공부에 관해선 철두철미한 그녀가 견과류가 떨어질 때까지 여유분을 챙겨놓지 않은 적이 있었다. 나는 버릇처럼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영어단어장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열여덟의 겨울, 기온이 뚝 떨어졌던 그 날 나는 너를 만났다. 마트에서 우연찮게 만난 너는 ‘안녕’하고 실없이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너를 무심히 힐끗 쳐다보곤 고개를 돌렸다. 너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였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끈덕지게 웃으며 내게 살갑게 대하곤 했다. 나는 정말로 네가 싫었다. 거친 입도 싫었고, 물들인 머리도 싫었으며, 학생답지 않은 행동거지는 더더욱 싫었다. 그럼에도 너는 변하지 않았다. 참 진득하게 나는 밀어냈고, 너 또한 끈덕지게 내게 한시도 지치지 않고 말을 걸며 웃었다. 나는 언제나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안경을 곧추세우며 너를 밀쳤지만, 너는 늘 생글거리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상한 친구가 되었다.

‘지잉, 지잉’

칠이 벗겨진 오래된 폴더 폰이 진동을 내며 울렸다. 매서운 추위에 주머니에 깊숙이 눌러 넣었던 손을 꺼내기 싫었지만, 악착스럽게 울려대는 울음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건 내 쪽이었다.

“여보세요.”

-나.

상대방은 버릇도 없고, 예의도 없었다. 하지만 그를 지적하진 않았다. 나는 녀석과 친하지 않았다. 녀석도 나를 그리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녀석도 나도, 너를 중심으로 맺은 이름뿐인 친구였다.

“왜.”

나 또한 버르장머리 없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인지라 딱히 지적할 군번이 아니기도 했다.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한숨 속에서 녀석이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챘다. 액정 위에 찍힌 숫자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차갑게 얼어 딱딱한 손을 호호 불고는 다시 귀에 가져다 대며 되물었다.

“본론.”

-여전히 별로야, 넌.

녀석은 내게 말했다. 나는 별반 대꾸하지 않았다. 녀석과 나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까불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녀석은 내가 공부만 내리 하는 모범생이라는 점이 별로였던 듯 했다. 함께 만날 때면 녀석은 내게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그런 태도가 녀석에겐 더 배알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녀석은 너의 친구였다. 나는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 친구라 했다. 이 이상한 공식 속에서 우리는 학창 시절을 함께 했다. 하지만 네가 없는 녀석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없는 우리는 서로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회피할 그런 사이였다. 너만이 우리의 연결고리였다.

“나도 알아. 피차 할 말 없는 사이잖아. 본론만 얘기해, 바빠.”

-…내일 기일이야.

“…….”

우리는 서로에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긴 침묵 속에서 나는 너를 떠올린다. 너는 언제나 이렇게 불현 듯 찾아와 강렬하게 날 휘젓곤 했다. 언젠가 너는 내게 물었다. ‘넌 뭐가 되고 싶어?’ 난 영단어를 외며 당연하게 답했다. ‘의사.’ ‘우와아아!’ 너는 과장되게 놀라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부 잘하는 애들은 꿈도 남달라, 넌 만날 공부밖에 모르잖아. 그리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허나 너는 몰랐다. 사실은 달랐다. 그녀의 대우는 성적 끝에서 판이하게 달라졌고, 나는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달려야만 했다. 쉬지 않고. 내 학창시절은 마라톤과 같았다. 골에 들어가기 전까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게 멈출 수 없는 것은 공부였다. 골은 의대였다. 그녀는 내가 혹여 잊기라도 할까 당부하듯 이르곤 했다. ‘사자는 제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트려 살아남은 자식만 키운다지. 엄마는 그래서 네게 채찍질을 하는 거야. 다 너 잘되라고.’ 나는 네게 그 이야길 했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네게 부럽다고 한 것은 생각이 난다. 뭐가? 너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답했다. 너의 자유로움이.

그 자유로움에 대한 고찰은 그 전부터 있어왔었다. 네가 다가오고 얼마나 지났던지는 모르겠지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너의 머리 모양에 한심하다는 듯 말을 툭하고 내뱉은 적이 있었다. ‘머리.’ ‘머리?’ ‘왜 그렇게 하고 다녀? 학생답지 못하잖아.’ 내 말에 너는 생글 잘도 웃었다. 그러곤 가볍지 않은 답을 흘렸다. ‘그래서야.’ ‘?’ ‘학생다워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 ‘하지만.’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혼나잖아. 선생님들 보기에도 좋지 않고. 단정치도 못하고. 마치 허세만 가득 담은 애들처럼.’ ‘그게 자유지.’ ‘대학가서 하면 되잖아.’ ‘아무나 할 수 있을 때 하는 건, 내가 선택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 틀만 사라져서 갖게 되는 자유일 뿐이잖아. 이렇게 누군가가 강하게 막아서고 있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나와서 멋대로 하는 게 자유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곤 허탈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게 뭐야.’ 너는 여느 날처럼 웃었다. ‘그러게.’ 지나와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 당시 네가 할 수 있는 ‘탈선’의 ‘최선’이었던 것 같긴 하다. 그것이 잘못된 방법일지라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 수 있기는 하니. 나는 그 때 아주 조금, 네가 부러웠다. 정말 찰나였지만.

“그런데.”

-안 올 거야?

“몰라. 바빠.”

-뭐가 그렇게 바쁜데?

“시험 기간이야. 난 너네와 달라. 이 성적 하나가 내 미래를 좌지우지 한다고. 너네처럼 그렇게 태평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야, 난.”

-여전히 공부밖에 모르는 구나, 넌.

“그래.”

-너 진짜, …하, 아니다. 됐다. 그래, 그게 너지. 그런 게 너지. 너여야지.

나는 말을 아꼈다. 녀석은 분에 찬 듯 말을 짓이기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전화를 툭 끊었다. 정적이 일었다. 조용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너와 관련된 일엔 난 항상 중심을 잃고 헤매고 만다. 그것은 네가 내게 남긴 인장과도 같은 흔적이었다. 나는 너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삶에 대한 자유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꿈은 내가 그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되돌리기엔 멀리 왔고,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빛이 나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고, 그것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를 앙다무는 내게 너는 위로하듯 말했다. ‘그것도 꿈이지.’ ‘꿈이야?’ ‘그럼 꿈이지. 남들은 하고 싶어도 도전조차 못하는 일인데.’ 너는 씁쓸히 웃었다. 나는 그런 너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찰나의 흔들림이 나를 흔들어 놓았었다. 그래,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엄마, 그러니까 그녀는 고학력자였다. 그 시절에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은 그녀 스스로가 본인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녀는 고학력자이기 이전에, 가부장적 아비 밑에서 자라난 ‘순종적이어야 하는’ 여성이었다. 아비의 말은 곧 명령이었고, 그녀는 떠밀리듯 자기의 꿈과는 상관없는, 적당한 엘리트 여성을 흉내 낼 수 있는 학과로 진학했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싫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엄마의 꿈은 ‘사’자 직업을 갖는 것이었어.’ 그녀는 제 꿈이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확실히 정해졌다 하였지만, 내 눈엔 아비라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련한 몸부림 같았다. 그녀는 기억의 편린이 불현 듯 떠오를 때면 나를 부여잡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성공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직업이야. 해서 넌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가져야 해.’ 그녀는 내게 주문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절대 잊지 못 할 각인이 되어 남도록. 그러나 너는 내게 말했다. ‘결국 꿈은 자기만족일 뿐이야. 모두가 그렇지. 의사, 변호사, 판사? 그래, 다 좋다 이거야. 헌데 그들이 왜 자살을 하겠어? 자기만족이 안 된다는 거야. 가만 보고 있으면 사람들 참 웃긴 게, 성공의 잣대는 내 기준에서 정하는 건데, 남의 기준으로 그 잣대를 세우고 있어. 가끔은 너도 그래.’ 일 년도 더 전에 결정된 진로를 너는 알량한 말 주변으로 나를 뒤흔들었었다. ‘가끔 넌 말만 뻔지르르해.’ 나는 장난스레 맞받아쳤다. 나는 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없는 웃음을 얼굴에 그리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너는 그날만큼은 끝까지 웃지 않았다.

너와 내가 단 한 번 크게 다퉜던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방긋방긋 잘만 웃던 네가 그 날은 달랐다. 나에겐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공부를 하고, 복습을 하고, 또 공부를 했다. 그러나 너에겐 다른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만큼은 너는 내게 따져 물었다. ‘이리 사는 게 행복해?’ 말없이 나는 눈을 깜빡이며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격앙되어 있었다. 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화를 내는 이유도 나는 몰랐다. 사실 너라는 존재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이게 네 삶이라고 느껴져? 기계처럼 누군가의 지시대로 사는 게?!’ 아주 드물게 언성을 높이는 네가,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이 ‘내 삶’인데. 이걸 내가 부정하면 ‘나’는 뭐가 되는 건가. 너의 질문엔 어패가 많았다. ‘넌더리나지 않아? 이렇게 순종하며 사는 게?’ 나는 답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너는 그 날 지나치게 감정적이었으며 극도로 흥분된 상태였다. 너는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며 내게 소리쳤다. ‘그리 살다 죽어!’ 너의 말이 공허하게 울렸다. ‘그렇게, 누군가가 억지로 쥐어준 삶을 살다간, 결국 죽는단 말이야!’ 너의 말이 슬프게 흘렀다. ‘-죽는다고, 죽어.’ 너의 얼굴이 종잇조각을 구기듯 무참히 일그러졌다. 나는 그런 너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걱정하는 듯하지만 책망어린 내용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네게 말했다. ‘내게서 누굴 보는 거야, 도대체.’ 그랬다. 너는 나를 투영해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분을 내게 토해내고 있었다. 너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너를 외면했다. 너는 나를 흔들곤 했지만, 나는 중심을 지켜야 했다. 나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너와 관계되기 싫어, 피했다.

그 이후로 데면데면하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건 그녀가 학교로 찾아왔던 날이었다. 그녀는 학교 선생님들이 수군거릴 정도로 극성스러운 엄마였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그녀는 해마다 온 교무실을 돌며 나를 잘 부탁한다는 명목으로 음료수를 돌리곤 했다. 격려차 내가 있던 반에 들러 어깨를 토닥여 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내게 너는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듣는 너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진다. ‘넌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가. 눈은 그녀의 뒷모습에 고정시킨 채로 대꾸하자 너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널 통해 우리 형을 봤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애만 쓰다 떠나버린 형이 너에게서 보였어. 똑같았거든, 너와. 기대를 책임이라는 말로 뒤집어 씌워서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게 딱 우리 형이었어.’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등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날 말이야. 화를 냈던 날. …나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고 미안하다며, 우리 형이 떠난 날이었어. 그래서 네 모습을 보는 순간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미안해. 화풀이를 해야 할 대상은 네가 아닌데.’ ‘알아.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반은 너에게 하는 말도 맞아. 우리 형처럼 그렇게 혼자 끙끙 앓다 훌쩍 떠나 버릴까봐 겁이 났거든.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만, 속으로는 제 울분을 삭히다 결국 병이 나고 마니까. 그게 무서웠어. 형의 모습이, 네게서 보였어.’ ‘바보구나. 사람은 같은 길을 가며 사는 듯해도 모두 다른데.’ 내 비아냥거림에도 너는 그저 웃어보였다. ‘그래, 그런 것 같아. 너는 다른 것 같아.’ 너는 말했다. ‘그래, 사람은 모두 각기 다르게 살아가니까.’ 하지만 네가 내뱉은 말은 그런 이유로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와 제 형을 동일시했다면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 말고의 다른 사유가 있을 터였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이유 또한 있겠지만 나는 부러 나와 너의 형이 다른 점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미련이 많은 그 눈부터가 다른데. 왜 같다 생각했을까.’ 너를 바라보는 내 눈을 너는 피하지 않고 올곧게 마주했다. ‘귀찮은 듯, 번거로운 듯. 짜증내고 있지만 결국은 놓지 못할 눈을 하고 있잖아. 지금 너희 어머님 바라보고 있는 눈이 딱 그래.’ ‘실없긴.’ 나는 말했다. 그리고 너도 말했다. ‘실없지.’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너는 모른다. 나는 그녀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그녀는 때론 내게 화를 냈고, 경멸했지만, 결국엔 울며불며 너밖에 없다 외치곤 했다. 그 진득한 감정이 싫었다. 그러나 안타깝고 불쌍했다. 이리 살 수밖에 없는 그녀가 슬펐다. 그래도 엄마니까. 그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그래서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애증이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해 수능 날은 아주 추웠다. 나는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고도 추워 벙어리장갑과 보온 난로, 두꺼운 양말까지 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녀는 내게 부담을 쥐어주지 않기 위해 오늘은 아무 말 않겠다고 했지만, 그녀의 이채어린 두 눈은 이중적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잘 쳐, 잘 쳐야 해. 그것은 마치 부적처럼 내게 다가와 내 가슴 언저리에 찰싹 하고 붙었다. 나는 말없이 집을 나왔다. 너는 아파트 입구에서 쭈그려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온 날은 처음이었다. ‘…시험 안 쳐?’ 웃기게도 나는 너의 진로를 알지 못했다. 네가 수능을 치는지, 꿈이 무엇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나는 시험 당일 날에야 깨달았다. 너는 빨개진 코를 비비며 입 꼬리를 쭈욱 찢었다. ‘자.’ 너의 손에 담긴 것은 네 온기에 녹은 작은 초콜릿 두 개였다. 멀뚱히 보고만 있는 내게 너는 뭐라 그랬더라. ‘시험 잘 쳐, 꼭 원하는 대학에 붙길 바랄게.’ 너는 내 손을 끌어 내가 치는 시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멍청히 네 손길에 이끌릴 뿐이었다. 익숙하지만 낯설다. 친숙하지만 생소하다. 나는 이 요상한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김이 코끝까지 차올랐다. 기억에 남는 것은 생각보다 따스했던 너의 온기와 기묘한 너의 분위기. 나는 그 이질감을 지우고자 너에게 물었다. ‘시험은?’ ‘안 쳐.’ ‘대학 안 가?’ ‘응, 안 가.’ ‘왜?’ ‘글쎄.’ 너는 대답을 피했고, 나 역시 부러 물어보진 않았었다. 짧지만 긴 침묵은 겨울비처럼 서느렇고 시리게 내려앉았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진실로 너를 몰랐다.

‘의대를 지망한다면 서울권은 힘들겠다.’ 담임은 성적표를 쥐어짜듯 쥐고 있는 내게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렇게 열심히 12년을 달렸음에도,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그 해 수능은 망쳤다. 시험을 망친 것이 아니라, 시험이 상대적으로 쉽게 나와 표준편차가 적었을 뿐이었다. 나는 입을 열지 않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는 그녀에게 이 일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담임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조금 더 내려 지방 의대로 눈을 돌려보는 게 어떻겠니? 위치만 지방일 뿐이지, 서울권 못지않게 좋아.’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요. 그 대답이 내겐 최선이었다. 시험은 내가 치렀을지 모르나, 대학 결정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패악을 부렸다. ‘한심한 것!! 네 아비를 꼭 닮아선!!’ 생각해보면 그녀는 늘 부정적인 모순에는 언제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들먹였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우리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는 그녀에게 주제를 알라 소리치며 집을 나갔다고 했다. 온전히 그녀의 주관적인 발언이었으므로 정확한 진실은 알지 못한다. 내 생각엔 고학력자라는 자부심에 찌들어있던 그녀를 아버지는 받아줄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종이 한 장으로 남남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니 그녀의 존재가 그리 애틋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울었다. 내가 못나 저의 꿈을 이뤄주지 못했다며 서럽게 울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곳곳을 내려앉았을 무렵 그녀는 매섭게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하자.’ 예전 같았으면 마지못해서라도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줬을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기가 생겼다. ‘지방에 갈래.’ ‘뭐?’ 그녀는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하지만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덤덤히 받아들이기에도 나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엄마가 원하는 의대, 간다고. 하지만 올해 가지 않을 거라면 대학 안 가.’ ‘대학에 안 가서 뭐 할 건데?’ ‘몰라.’ ‘몰라? 지금 이게 어떤 건데 그렇게 대책 없이, 그렇게 생각 없이 말해?!’ ‘몰라.’ ‘너!’ ‘모른다고, 엄마.’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힘없이 주저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모르겠어, 엄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지방 의대에 힘겹게 합격했다. 눈높이는 낮췄지만 절대 쉬운 길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물수능이 가져온 폐해였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지방 의대에 보냈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떤 방식이든 의사만 된다면 만사태평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쨌든 의대에 입학했다. 나는 꿈과 한 걸음 가까이 마주하게 되었다. 졸업식 날, 플랜카드에는 내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지만 그 윗줄에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보기 싫었는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도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신경이 쓰이는 건, 그 날 초콜릿 두 개와 함께 사라진 너의 행방이었다. 너는 졸업식이 끝나고, 석양이 학교를 물들일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였을까. 나는 모두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너를 기다렸었던 것 같다. 네가 오지 않을 것임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음에도, 나는 어둠이 내려앉아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나는 예정대로 대학에 진학했다. 입고 있는 옷과 배우는 과목만 달라진다 뿐이지, 대학은 고등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기숙사-도서관-강의실, 이외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떠나기 전날 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날 보며 한숨짓곤 했다. ‘서울’이라는 타이틀이 빠진 대학은 그녀에겐 동음이의어일 뿐, 여전히 마음에 걸려 아쉽기만 한, 내키지 않는 결과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학기 중에도 가끔 연락 와 바람을 실은 말을 전하곤 했다. ‘다시 한 번 해 볼 생각 없니?’ ‘엄마.’ 투정부리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녀는 영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이럴 거면서 대학은 어찌 허락했는지가 가장 의문스러웠지만, 난 묻지 않았고, 그녀도 그에 대해선 없던 일인 양 행동했다. 가소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지만, 그 일은 암묵적인 동조가 이루어진 비밀 안건과도 같은 일이었다. ‘됐어.’ 내 대답에도 그녀는 포기할 줄 몰랐다. ‘너, 대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야. 왜 그걸 몰라. 조금 더 하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니까?’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상향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부족한 현실성은 늘 그랬듯 허울 좋은 명언에서 근거를 찾았으며, 그것만이 참인 양 오롯이 믿음을 보이며 제 의견을 피력하는데 사용하곤 했다. 열여덟의 나는 그녀의 말이 세상의 전부였고, 진실이었다. 열아홉의 나는 그것에 대해 혼란을 느끼던 중이었고, 스물의 나는 그 변함없는 모습에 물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스물둘의 나는, 그것에 지쳐있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지금도 그런가? 진정으로? 왜?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내 미래에 관해선 늘 그랬다. 왜라는 질문에는 언제나 벙어리가 된 듯 입을 앙다물고 말았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하고 싶냐 했을 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냐는 질문에도 나는 명쾌히 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였다. 그녀와 내가 만든 ‘나’의 ‘삶’이었다.

핸드폰을 열었다. 닳아 버린 이음새 때문에 폴더는 별다른 마찰 없이 부드럽게 열린다. 나는 그 속에서 무의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문자 메시지를 눌리고, 보관함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 네가 있다. 네가 살아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존재한다. 작년 이맘 때 너는 있었겠지만, 지금 너는 없다.

[행복해?]

2년 만의 재회 문자치곤 참 추상적인 질문이다. 마지막 작별 인사로 보낸 문자치곤 참 멋없는 문장이다. 나는 그 문자에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다 결국 답을 하지 못 했다. 뭐야, 하고 무시하곤 시험공부에 다시 훌쩍 빠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왜 이런 문자를 내게 보냈을까, 너는 왜 나에게 그 절망의 끝에서 연락을 시도했을까. 나는 왜 그런 너를 가벼이 생각했을까. 쓸모없는 질문에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의 마지막 문자는 내 명치에 묵직하게 남아 너를 지우지 못하게 했다. 너는 그렇게 내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네가 진정으로 떠났을 때에야 나는 네게 한걸음 더 다가섰던 것 같다.

나는 네 영정 사진 앞에서 울지 않았다. 추억에 잠기지도 않았으며,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내게 그 자리는 그런 곳이었다. ‘네가 있는 곳’ ‘나와 함께 있는 곳’ 나는 2년 만에 네 앞에 서서 두 눈을 마주했다. ‘안녕’ 이번엔 내가 먼저 네게 인사했다. 너는 그 날의 나처럼 말이 없었다. 나는 너처럼 웃으려 해 보았지만 마비된 얼굴 근육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너처럼 웃는 대신, 나는 너처럼 말을 걸었다. 너는 그 때의 나처럼 말이 없었다. ‘나 기억나지?’ 내 입술은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을 재현이라도 하는 듯이. 그것은 너와 나만이 존재하는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에서 온갖 오열로 흐트러트리는 바람에 너와 나의 상념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하아.”

긴 입김이 꼬리를 물고 높게 피어올랐다. 그 긴 꼬리를 따라 네가 보인다. 나는 아닌 척 했지만 실은 궁금했다. 왜 너는 그 날, 그 문자를 보냈을까. 그 날은 네가 힘겹게 모은 돈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너는 진정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 경찰에선 단순한 사고라 했다. 참으로 웃겼다. 그 날, 너는 그렇게 즐겨 끌고 다니던 오토바이도 내버려둔 채로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낸 가해자는 살고, 왜 너는 죽었을까. 왜 그 시각이었을까. 왜 하필 그 때였을까. 어떤 우연의 일치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너는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처럼 행동하곤 했지만, 막상 떠나고 나니 내 가슴 속엔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함이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이렇게 날 찾아와 괴롭힌다.

나는 후에 알았다. 그녀가 네게 찾아가 행패 아닌 행패를 부리며 내 옆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나는 진실로 후에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너는 알았을까. 나는 너와 친숙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닮아있었다. 그래서였다. 자석이 같은 극을 밀어내 듯 나는 너를 밀어내고 싶었다. 우린 분명 같은 갈림길에서 나는 왼 길을 선택했고, 너는 오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나는 그 동질감이 두려웠고, 그것이 날 흔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평화가 깨지는 것이 싫었다. 해서, 나는 멀어진 너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리 너를 보내주었다. 너는 내가 원망스러웠을까. 나는 너를 여전히 알 수 없고, 너는, 그래. 너는 나를 알았을까. 모르겠다.

옷을 뚫고 들어오는 맹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나는 다시 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때가 탄 운동화 위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거북이가 등껍질로 제 얼굴을 숨기듯 움츠렸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하얀 눈 꽃송이가 세상을 수놓고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 위로 떨어진 눈은 사르르 녹아 물이 되어 적셨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이 생각나 발걸음을 돌리려다 곧 그치겠지, 하는 마음으로 우산은 반쯤 포기하고 학교로 향했다. 눈은 차가워서 싫다. 겨울바람은 매서워서 싫다. 헌데, 겨울에 떠난 너는 따스하다. 그 아이러니함에 나는 웃다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나는 겨울이 싫다.

작은 소리 하나도 크게 울리는 도서관은 삶의 치열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용함, 고요함. 나는 그것이 내 집중력을 높여준다 생각했다. 실제로 그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와 분위기가 비슷한 면학실, 그도 여의치 않다면 방음처리가 잘 되어 있는 방에서 공부했으니. 두꺼운 모의고사 문제집에서 바뀐 것은 전공 책이다. 모든 것을 보호 받던 미성년에서 성년이 됨으로 바뀐 것은 책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뀐 것은, 내 곁에 있던 네가 없다. 나는 네가 죽은 날에도 울지 않았다. 그저 전날 만난 사이인 것처럼 태연스레 행동하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 내일 너의 기일이라는 말에 나는 왜 이리 크게 반응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네가 없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은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일인데.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까맣게 칠해진 전공 서적을 뒤로 하고 지갑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휴게실에서 싸구려 커피 한 잔을 뽑아 호호 불어 마시니 마음이 따스하게 녹는다. 그러나 복잡한 머리는 여전히 꽁꽁 얼어 풀릴 생각을 않는다. 왜 그럴까. 정말이지. 답이 없는 질문은 딱 질색이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나는 한참을 휴게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따라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 시간을 보내고만 싶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지쳐서 그래.’ 너는 언젠가, 지금처럼 운동장 스텐드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는 나를 향해 그랬다. 뭐가, 공부 그깟 거 매일 하는 건데 뭐. 내 대답에도 너는 실없이 웃고만 있었다. 뭐가 지쳐. 툭 내뱉는 말에 너는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며 옆자리에 앉았다. ‘매번 반복되니까 머리는 느끼지 못하는 거야. 받아들이는 네 가슴은 이미 한계까지 치달아 벅찬데, 머리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계속 공부에 매달리게 되고. 그 괴리감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거지. 안 해, 더 이상은 못해. 그만해. 그럼 머리는 그러는 거야. 그래, 하지 말자. 잠깐 쉬자. 그럼 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무기력해지니 그냥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마는 거야.’ 너는 네 나름대로 나의 무기력함에 이유를 붙이려 애썼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실없는 소리와 매한가지였다. 캔 커피를 따고 입가에 가져다대자 싸구려 향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몸이 노곤해진다. 다시 들이키는 한 모금에 생각이 뭉친다. 달달한 향이 지나고 나면 텁텁한 향이 남는 캔 커피처럼 나는 순간의 달콤함에 모든 걸 잊었고, 다시 떠올렸다. 나는 옆자리에 팽겨 쳐 두었던 영단어집을 펼쳐 들었고, 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다만 옆에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비어버린 종이컵을 구겼다. 조금 남아 있던 커피가 손끝에 묻었지만 청바지에 스윽 닦고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너에 대한 이 감정의 찌꺼기도 쓰레기통에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떠올라 여전히 날 뒤흔드는 너를 이렇게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내 손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이 쓰레기처럼, 너도 날 떠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잉.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핸드폰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액정을 열어 바라보니 그녀였다. [보약 지어서 넣어놨으니까 잊지 말고 챙겨 먹어. 지방대니 성적관리라도 잘해야지.] 하, 하하. 간헐적인 웃음이 터진다. 모든 것이 엉겨 붙어 나를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모양새에 나는 한참을 웃었다. 열람실로 돌아가려던 발을 옥상으로 옮긴 것은 충동이었다. 아무런 제지 없이 오픈 되어 있는 길목을 걸어 차가운 철문을 열자 휑하니 뚫린 옥상이 나를 반겼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나를 가장자리로 밀었다. 이곳은 옥상이다. 아니다. 나의 형상을 한 나의 길이다. 나는 가파른 길목 위, 나라는 인생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다. 두 손을 벌리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나를 감싸오는 것을 느꼈다.

너로 인해 나는 내 길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나는 고민을 안았지만, 아닌 척 생활했다. 왜 인진 모르나 그러다보면 나는 한 번씩 극단적인,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위태로운 나를 향해 너는 말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아?’ 해서 나는 말했다. 끝나진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잡히지 못할 곳으로 도망은 칠 수 있을 거야. 너는 웃었고, 나는 울었다. 너는 울었고, 나는 웃었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나는 억지로 입매를 비틀었다. 하얀 가면에 균열이 이는 듯, 버석한 웃음이 그려졌다. 모든 것을 버리나, 그것에서 도망치나. 표현하는 방식만 다를 뿐 매한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얻는 결과는 내게, 분명, 통쾌함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여 나는 다짐했다. 내 영정 앞에서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을 그녀와 너와 경쟁자가 되어 치열하게 싸우던 친구란 존재들에게 신랄히 비웃어 주리라. 무거운 족쇄가 아래로 잡아당겼다. 시간이 되었다. 이걸로 끝이다. 나는 환히 웃었다.

콩. 알밤을 맞은 듯 한 통증에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때마침 맞춰 울리는 알람시계를 끄고 나는 익숙하게 움직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규칙적으로 아침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밥알이 모래알을 씹는 듯 까끌했지만 묵묵히 씹어 넘겼다. 아침밥은 두뇌 회전을 좋게 하니 걸러서는 안 된다. 그 날, 너는 내게 말했다. ‘너는 도망치지 못 해.’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너의 말에 나는 기분이 나빴다. 왜? 라고 되물으며 콧잔등을 찡그렸지만, 너는 그저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너는 덤덤히 말했다. ‘미련이 많아, 넌.’ 무엇이. 새된 비명처럼 따지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리지 못 해. 너는 아무것도 놓지 못해. 가족, 명예, 미래, 가지게 될 부, 그를 얻기 위해 노력한 과거. 모두.’ 나는 아니라 했고, 너는 내 마지막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떠났다. 이곳에 나를 두고, 냉정하게, 그렇게. 지루한 수업, 반복되는 일상, 누군가가 강하게 쥐어준 목표, 꿈 없는 미래. 너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여전히 그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죽었다. 목숨을 끊었다. 나는 느릿하게 박동하던 심장 소리를 기억한다. 꿈틀거리던 나의 생명을 기억한다. 꺼져가던 힘없는 촛불을 나는 기억한다. 하하,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그 모든 것을 느끼며 너의 말대로 나는 죽은 채로 살아간다. 네 말이 옳았다. 하하, 간질거리는 웃음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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