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름은 - 창원대신문

우리의 여름은

조승희

어느 한 고등학교.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여학생. 성격도 유달리 활발하다. 성적은 중·하위권 정도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에 신경조차 안 쓰는 듯. 급우 전체와 친하게 지내지만 딱히 ‘베스트 프렌드’랄 것은 없어 보인다.

반면 누가 보더라도 단정하다고 판단 할 준수한 외모, 또한 그에 걸 맞는 깔끔한 복장, 담백한 성격 등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남학생. 반장이라는 직책이 무색하지 않게 우수한 성적을 내며,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예쁨을 한 몸에 받는 학생의 유형이다.

그들의 만남.

#1.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는 어느 오후. 따뜻한 햇볕과는 다르게 바람은 꽤나 매섭다. 학생들이 모두 웅크리고 마이 끝을 여미며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느 고3 교실. 그런데 책상 하나가 비어있다.

“반장, 빈자리 뭐야.”

“…아, 보건실 갔습니다.”

“고3이 보건실 갈 여유가 있어? 허락도 안 받고. 가서 데려와.”

“네.”

약간 귀찮다 라는 표정을 숨기며 교실 문 밖으로 나가는 깔끔한 외모의 남학생.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여 가 지났지만 여태 수업시간에 제대로 집중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한 여자애를 찾으러 왔다. 그나마 아픈 기색이라도 있으면 정상참작 하여 내가 그래도 영 쓸데없는 일을 하기 위해 발품을 판 것이 아니구나 하고 여겼을 텐데. 웬걸, 아파 보이기는커녕 숙면을 취하고 있다. 억울한 기분에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입 열고 있을 땐 시끄럽기만 하던 쪼끄만 여자애가 이렇게 있으니 나름 귀엽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Rrrrrrrrrrr Rrrrrrrrrrr'

여학생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고, 그 진동이 끊겼다 다시 울리기를 세 번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부스스 눈을 뜨고는 여전히 누워서 전화를 받는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통화내용을 듣게 된 남학생.

“여보세요.”

자다 일어나서 바로 말을 해서인지 목소리가 제법 탁하네.

“아, 지금 학교야. 땡땡이 안 쳤어.”

지금 땡땡이 치고 있는 건데…

“쉬는 시간 이지. 진짜 학교 맞다니까.”

거짓말도 눈도 깜빡 안하고 잘 한다.

“알았어. 마치고 바로 갈게.”

그렇게 여학생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남학생을 발견하고는 언제부터 서 있었나 하고 약간 놀란다.

“너 누구니?”

음… 교실에서 한 번 도 본적이 없나? 한 달 동안 차렷 경례만 수차례 했는데.

“너희 반 반장.”

“아… 그건 말 안 해줘도 알아. 차렷 경례 할 때 수십 번 봤어.”

“아…”

“그러니까 내 질문이 좀 이상했네. 난 여기서 뭐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던 거야.”

“담당 선생님이 찾아오라고 하셔서.”

“아파서 보건실 갔다고 하지.”

“…….”

별로 아파보이지는 않는데 하는 표정만 말없이 짓는다.

“나 진짜 아파.”

“고3은 아플 여유도 없는 거야. 아파보이지도 않지만.”

“참 나… 고3은 사람도 아닌가….”

투덜대며 침대에서 발을 내리는 여학생.

그들이 긴 복도를 걸어 교실로 향하는 동안 여학생은 한 차례도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런데 나 양호실에서 가는 건데 아픈 척을 해야 할까? 아니면 한 번만 봐달라고 해야 할까?"

“…….”

“넌 참 말이 없구나?”

“그러는 너도 아까부터 계속 쫑알거리는 말이 그렇게 실속 있어 보이진 않아.”

“뭐?”

“너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하잖아? 쓸 데 없는 이야기뿐이지. 나 먼저 들어간다.”

속사포같이 내뱉고는 먼저 교실로 들어가 버리는 남학생. 여학생은 남학생이 던지고 간 말에 잠시 벙쪄 있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아픈 척 연기’를 하며 교실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담당 선생님은 ‘고3은 죽어도 수업 중에 죽어야 돼. 엎드려 있어.’를 내뱉고는 다시 수업을 진행하고, 남학생은 ‘쟤 진짜 아팠던 건가? 연기 한 번 잘 하네’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감탄한다.

#2.

“자, 오늘 조례는 별 다른 전달사항은 없고… 눈이 나빠서 앞자리로 옮겼으면 하는 학생이 있어서 자리를 바꿀까 한다. 제비뽑기해서 여름까지는 안 바꿀 예정이니까 앞자리 앉고 싶은 사람은 지금 손들어.”

아무도 손은 들지 않았고, 어수선하게 제비뽑기는 시작되었다. 뒷자리 번호 뽑아서 쾌재 부르는 학생들, 원하는 자리 못 뽑아서 울상 짓는 학생들 등 어수선한 풍경이 잠시 연출되었다. 제비뽑기가 모두 끝나고 자리를 옮기고 난 후 보니, 보건실에서의 인연이 있던 그 남학생과 여학생이 나란히 앉게 된 것이 아닌가.

“반장, 안녕? 우리 짝이네?”

방긋 방긋 웃으며 손 인사 까지 하는 여학생과는 달리,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남학생이다.

아침조례가 끝나고 쉬는 시간. 여학생은 남학생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 시도는 남학생이 꽂고 있는 이어폰에 막혀버렸다.

‘영어 듣기 하는 건가. 공부 되게 열심히 하네.’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자신과는 참 반대되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여학생이 보기에 자신의 짝은 더 이상 나무랄 곳 없는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수업시간마다 집중해서 수업 듣고, 쉬는 시간엔 필기 정리하고, 점심시간엔 자신의 친구들은 축구다 농구다 해서 운동장을 누비고 다니는데, 이 남자애는 영어단어를 외우는 듯 해 보였다.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인건가 궁금해질 만큼 열심히 했다.

옆에서 뭔가 열심히 보고 있는 남학생에게,

“넌 꿈이 뭐니?”

라고 묻자, 남학생은 이어폰을 뽑고는 책에만 머물러있던 시선을 여학생 쪽으로 돌렸다.

“뭐라고?”

“꿈이 뭐냐구.”

“갑자기 그건 왜.”

“넌 공부를 되게 열심히 하기에 궁금해져서. 넌 뭐가 되고 싶니?”

“…….”

잠시 대답을 못 하는 남학생을 보며 여학생은 무슨 대답이 나올까 기대해 본다. 검사? 변호사? 사자 돌림 직업은 아니려나?

“고3은 그런 꿈 꿀 여유 없어.”

조금 차갑게 대답을 내뱉고는 이어폰을 다시 꽂고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린다.

‘왜 이 기집애는 쓸데없는 걸 물어봐.’

애써 영어단어를 외우려 해보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맴돈다.

‘꿈……?’

‘내 꿈이 뭐지?’

‘난 지금까지 열심히 해 왔는데 그건 뭘 위한거지? 좋은 대학, 좋은 과에 가는 건 당연한 건데… 이 느낌은 뭐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끝나버린 쉬는 시간. 수업이 몇 개 지나가고, 점심시간까지 끝났음에도 남학생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다. 평소 때라면 ‘고3은 이런 생각할 여유도 없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공부에 집중 할 텐데 오늘따라 재고에 재고를 거듭한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 선생님들이 원하는 것 다 충실히 해내고 있는데….’

‘정작 나는 뭐가 되고 싶은지, 무슨 학교 무슨 과에 가고 싶은지 조차 모른 채 무작정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고민에 푹 빠져서 수업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수업이 시작한 줄도 모르고 있다. 그러다 문득,

「넌 어느 학교에 가고 싶은데?」

정갈한 글씨로 옆 짝에게 쪽지를 보낸다. 쪽지 내용을 읽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여학생.

「뭐가?」

「대학교 말이야」

그제야 쪽지에 담겨있는 내용을 이해를 하고는,

「난 중앙대 연극영화과」

「연극영화과?」

「응 난 배우가 되고 싶거든」

이라는 글씨를 빠르게 쓰며 계속 웃는 여학생. 자신의 장래를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보인다. 여학생의 메모를 읽고 이내 앞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는 남학생. 여학생은 대뜸 목표 학교가 어디냐고 물어보더니, 가르쳐주고 나니까 고개를 돌리는 자신의 짝을 보며 영문을 모른다.

한편 남학생은 ‘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여자애도 되고 싶은 것이 있고, 목표하는 곳이 있구나. 그래도 그럼 뭘 해. 얘는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데. 얘보단 내가 나아. 그래.’ 라는 자기합리화로 기나긴 고뇌를 끝마쳤다.

#3.

그 날 밤. 또 한 번 진로 문제로 부모님과 싸우는 여학생.

“너 또 어디서 뺀질거리다가 지금 들어오는 거야!!”

“아 친구랑 놀다 왔어. 왜!”

“너 고3이야! 공부 안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뭐 신경 꺼? 너 이번 중간고사 때 반에서 10등 안에 안 들기만 해봐! 휴대폰이고 뭐고 다 없애 버릴 테니까!”

“왜!!! 난 공부하기 싫다고!!!”

무조건 공부하기를 강요하는 엄마를 향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외치는 여학생.

“너 공부 안 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

“엄마, 나는… 나는 배우가…”

“그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직도 안 뜯어고쳤니?! 넌 지금 TV보면서 화려한 모습에 취해서 그러는 거야. 그딴 생각 버리라고 했어 안 했어!!”

여학생은 자신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으며 자신에게 상처 주는 엄마를 보며 눈물만을 뚝뚝 흘린다.

“빨리 들어가서 공부해!!”

눈물을 그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오는 여학생. 방문이 닫힌 뒤에도 여전히 혼잣말을 하시는 여학생의 엄마.

“아니 쟤가 뭐가 되려고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려. 고3인데. 아유, 내가 진짜 미쳐.”

방문을 넘어 들려오는 그 말에 여학생은 더 서러워지고, 삐뚤어진 생각을 하고 만다. 가출을 해버리겠다고.

결국 여학생은 수중에 이는 돈 전부를 챙겨서 부모님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쪽지 한 장만 간단히 책상위에 놔두고는 밖으로 나온다. 그러데 정작 갈 곳이 없어 친구들에게 하루만 재워 달라 전화 해 보지만 그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겨우 잘 곳을 생각해 낸 곳이 PC방. 담배연기 자욱한 곳에서 인터넷 쇼핑, 게임, 웹 서핑 등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고는 학교로 향한다. 어제 여학생의 부탁을 거절한 친구들은 모두 멋쩍은 듯 웃으며 어제 어디서 잤느냐 물어본다. 그에 환하게 웃으며 다른 애 집에서 잤다고 말하며 자리에 앉는 여학생.

그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오고, 여학생을 바깥으로 부른다.

“너 임마 나이가 몇인데 가출을 하고 난리야, 어!? 정신이 있어, 없어.”

“네?”

“교무실로 가. 어머니 오셨어.”

‘가출소동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긴 가출했는데 꼬박꼬박 학교 나오는 멍청이도 없지. 엄마가 벌써 학교에 왔나, 빠르기도 하네.’라는 생각을 하며 교무실로 향하는 여학생.

담임선생님 책상으로 다가가자 그 곳에 서 있던 여학생의 엄마가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대뜸 당신 딸의 뺨을 때린다. 당황하여 여학생의 엄마를 말리는 선생님.

“너 따라 나와.”

한마디만을 던지고는 교무실 밖으로 나가는 여학생의 엄마. 고개를 숙인 채 엄마를 따라서 밖으로 나가는 여학생.

“건방지게 가출을 해? 너 정신이 있니 없니?”

“…….”

“도대체 너를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릴는지, 정말.”

“…….”

묵묵히 아무 말도 않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학생.

“너 적어놓은 쪽지에 뭐라고 써놨어.”

“…….”

“대답해.”

“배우 되는 거 허락하면 찾으라고….”

“난 아직 그거 허락 못 해.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시기에 말을 끊는 걸까 계속 듣고 있자,

“가출까지 감행했으면 배우 하겠다는 게 한낱 불장난이 아닌 건 알겠어.”

“…….”

“서울에 있는 대학교 들어갈 성적까지 올리면… 그때 다시 생각해볼게.”

“엄마.”

“아직 허락한 거 아냐. 내가 진지하게 고려해 볼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자신 있어?”

“응 엄마 자신 있어!”

너무나 기쁘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는 여학생. 그 모습을 보고는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서 나가는 여학생의 엄마.

“엄마! 나중에 집에서 봐~!”

교실로 돌아온 여자. 생각을 해보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단기간에 성적을 올려야 하는데….

“저기….”

결국 자신의 짝에게 도움을 구해볼까 말을 건다. 그에 고개 돌려 얘기해 보라는 듯 쳐다보는 남학생.

“너 학원 다니니?”

“왜?”

“나도 다닐까 싶어서….”

의외라는 듯 쳐다보는 남학생. 그 눈빛은 마치 ‘세상에서 너랑 학원은 자장면이랑 마요네즈만큼 이나 안 어울려.’를 나타내는 것 같다.

“아니 그게… 그렇게 쳐다보진 말고, 난 그냥 뭐… 하하.”

“난 학교 주변에 다녀.”

“아 그래? 알았어… 음, 근데 내가 혹시 뭐 물어보면 대답해줄래?”

“뭘 또 물어 볼 건데.”

“아니 그냥 앞으로 뭘 물어보면 말이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할 수 있을 거야! 넌 공부를 되게 잘하니까.”

‘뭔 소리야.’라는 표정을 한 번 짓고는 이내 영어단어장으로 고개를 돌리는 남학생.

이 여자애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건 방금 전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수업시간부터 행동이 이상하다. 아니, 이게 이상한 건 아닌가…? 왜 이렇게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아닌가, 필기만 미친 듯이 하고 있으니 듣긴 듣는 것 같긴 하지만 제대로 듣는건… 아 뭐야, 무슨 말이야 이게. 여학생이 갑자기 수업시간에 딴 짓을 안 하는 모습에 당황스러운 남학생. 심지어 수업시간이 끝나자 필기한 내용을 모두 물어보는 여학생이 당황을 넘어서 살짝 무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이 지문에서 나타내는 주제랑 동일한 걸 보기에서 고르면 돼…….”

“아, 그럼 보기에 나오는 작품 주제도 다 알아야 하나? 이런 건 어떻게 다 알아?”

“네가 미리 공부한 게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아니면 읽어보고 혼자서 파악하는 거지……….”

“어렵네….”

남학생은 계속 빤히 쳐다본다, 여학생의 얼굴을. 그 시선을 느낀 여학생은,

“왜? 뭐 묻었어?”

“너 왜 이래.”

“뭐가?”

“갑자기 안 하던 공부는 왜….”

“아~ 공부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라고 대답하며 웃는다.

예전의 그 웃음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언제였더라. 아 맞다. 자신의 꿈은 배우라고 했을 때의 표정. 이 여자애가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뭔가 이상하다…… 위기의식인가? 이 애가 내 성적을 따라잡을 일은 없는데…….

#4.

학원수업까지 모두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며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데스크에 낯익은 여자애가… 쟤가 여긴 왜 있지?

남학생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그 새 여학생도 남학생을 발견했나보다.

“어? 안녕~”

“네가 여긴 왜 있어?”

“나 여기 다니려고. 방금 등록 다 했어.”

“…….”

“나 오늘 좀 다르지?”

“뭐… 좀.”

“오늘 다른 게 아니라 오늘부터 다를 거야. 열심히 해야 돼.”

“…….”

“음….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나란히 길을 가다 발걸음을 멈추며 물어보는 여학생. 도와달라는 여학생의 부탁에 남학생은,

“귀찮게 하지 마.”

“…….”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도와는 줄 테니까.”

다정하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래도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학생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 말한다. 그 날 이후 여학생은 자신의 장래를 위해 이루어야 하는 것에 대한 도움을 남학생에게 무척 많이 받는다.

“이 문법 공식을 외우라니까. 멍청하냐?”

“아니 영어에 무슨 공식이 있어, 수학도 아니고. 아… 짜증나.”

“사회복지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차이점.”

“아… 그거……”

“빨리.”

“아 그거 아까 외웠는데… 잠시만 있어봐!”

‘콩!’

“다시 외워.”

“등차수열의 합 공식.”

“이분의 엔, 괄호열고 에이 플러스 일. 또… 어…… 이분의 엔 괄호열고 이에이 플러스 또 괄호열고 엔 마이너스 일 괄호 닫고 거기에 곱하기 디!!”

“그럼 등비수열의 합 공식은.”

“어…… 그건 다르잖아, 있어봐. …알이 일이 아닐 때는, 알 마이너스 일 분의 에이… 괄호 열고 알에 엔승 마이너스 일! 또…… 일 마이너스 알 분의 에이… 괄호열고! 일 마이너스 알에 엔승!!”

“하나 더 있잖아. 알이 일 일 때.”

“그냥 엔 곱하기 에이!”

“맞았어, 다 외웠네. 수학은 하기 싫다더니.”

“하기 싫은데 기말고사에 나온다며. 아 범위가 왜 이따위여가지고 사람 귀찮게 해.”

“2학년 때 다 한 건데 네가 수업을 안 들어서 다시 공부해야 하는 거야.”

“쳇… 아 맞다! 너 그 소리 들었어?”

“무슨 소리.”

“너랑 나랑 사귄다고 소문이 났나봐.”

“뭐?”

“그런데 그럴 만도 하지 뭐. 학교에서도 계속 같이 있고, 학원도 같이 다니고, 독서실도 같은 곳 다니고…”

“네가 나 따라다닌 거잖아.”

“내가 뭘 너를 따라다녀!!”

“시끄러 단어 외우는데 방해 돼.”

“난 너 따라다닌 적 없거든!!”

“귀찮게 하지 마.”

“잘난 척은.”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 거야.”

“뭐?”

“내신 1등급에 모의고사 전국 58등이 뭐 쉬운 줄 아냐?”

“그런 얘기,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하면 좀 그렇지 않니?”

“사실인데 뭐.”

“아 그러셔? 그래서 그 잘난 성적으로 어디 갈 건지나 한 번 말해보시지?”

“…뭐?”

“뭘 그리 정색을 해. 어디 학교 갈 거냐고.”

“…….”

“또 말 안 해주네. 뭔 놈의 비밀이 그렇게 많아.”

“…….”

“하긴. 너는 지원하는 족족 다 붙긴 하겠다. 대학 자유이용권이네.”

“시끄러. 쪼끄만 게 말이 많아.”

“뭐? 쪼끄매? 이게…!”

아직도, 여전히 목표는 정하지 못한 듯 해 보인다. 또 한 번 대답을 다음으로 미뤄버리는 남학생.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그들은 더 열심히 수업을 듣고, 특히 여학생 쪽은 온갖 질문들로 남학생에게 민폐를 끼친다.

“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문장 해석 못 하겠어.”

“여기서 have가 ‘가지다’가 아니라 사역동사로 쓰였어. 다시 해석 해 봐.”

“사역동사? 그건 let아냐?”

“…수업시간에 필기했잖아. 그거 찾아봐. 다시 외워.”

“아 필기 돼 있구나, 미안. 근데 너 여름방학 때 뭐 할 거야?”

“하긴 뭘 해.”

“다만 며칠만 이라도 놀고 싶지 않아?”

“놀 생각만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알았어!! 넌 가끔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무슨 마귀할멈 같아.”

매일 매일을 이렇게 질문하고, 또 구박으로 받아치고, 그렇게 함께 공부를 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흐르고, 기말고사도 끝나고, 성적표가 나왔다.

“너 잘 쳤어?”

“당연하지.”

“난 별로 많이 안 올랐는데… 하아…….”

“네가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여름방학이 내일부턴데.”

“여름방학 하면 뭐 해. 또 코피 터지게 공부나 해야 되는데… 보충수업에 자율학습에… 어휴…….”

여학생이 말하는 것이 흥미롭다는 듯 아무 대답 없이 옅은 미소와 함께 쳐다보기만 하는 남학생이다.

19세 피 끓는 청춘의 한 여름을 교실에서 수업이나 듣고, 자율이 아닌 자율학습을 하는 이 학생들 중에서도 유독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한 명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얼마 전까지 죽어라 공부 안 했던 사람이 더위도 잠시 잊은 채 문제집을 풀어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너무나도 신기할 따름.

“뭐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응?”

열심히 문제 지문을 읽어 내려가던 눈을 내 쪽으로 돌린다.

“원래 너 공부하는 애 아니었잖아. 가출이나 하고.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고, 공부.”

“아 공부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라고 말했잖아, 그 때.”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건 좀 개인적인 건데… 뭐, 너한테는 괜찮겠다. 사실 엄마가 서울에 있는 대학 갈 성적까지 올리면 배우 되는 거 허락해 준다고 했거든.”

웃는다. 또 저 웃음이다.

“그럼 넌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야…”

“어차피 너나 나나, 목표하는 게 있으니까 열심히 하는 거잖아. 어차피 쟤들이야 뭐, 지들 알아서 하겠지.”

이 여자애가 쳐다보는 곳으로 나 역시 고개를 돌려보니 미니쿠션까지 챙겨 와서 잠을 자고 있는 어떤 애가 보인다.

“쟤넨 나중에 성적 맞춰서 아무데나 가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못 하고. 아니 하고 싶은 게 있긴 한 걸까.”

굉장히 뭐랄까… 저 자고 있는 애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 말투… 굉장히 거슬린다. 내가 가만히 수면 중인 애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이내 다시 문제집을 풀어내려가는 이 여자애. 쪼끄만 게 알지도 못 하면서 저 편한 대로 지껄이는 꼴이라니…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졌다. 더 이상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야 너 어디가?! 야!!”

그래서 그대로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학교를 벗어나긴 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네. 하긴 내가 가는 코스는 항상 학교-학원-집-독서실 이었으니까.

“젠장.”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지금까지 이렇게 나를 압박해 오는 건 없었는데. 단 한 번도 선생님들 눈 밖에 나 본 적 없었고, 한 번도 부모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적 없었는데… 왜 그 따위 여자애 말 한마디에 내 규칙을 깨뜨리고 이렇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왜……!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길거리를, 그리고 집 주위를 한량처럼 떠돌다 집으로 들어왔다.

“어, 아들, 오늘 일찍 들어왔네. 독서실 안 갔어?”

“아, 응.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갈게.”

“그래. 체력관리 잘 해. 그래야 공부할 힘이 나지.”

“…….”

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샤워를 하는 동안,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 이 순간… 계속해서 생각해 봤는데 모르겠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목표가 뭔지… 텅 빈 우주에 나 혼자 던져져 있는 기분이다. 빌어먹을. 고3은 이딴 생각 할 여유가 없어야 하는 건데…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여보세요?

“어, 나야.”

-네가 왠일이냐?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야, 너 오늘 자습 중간에 나갔다며?

“아 그거, 뭐 그냥. 뭐하냐?”

-지금 편의점에서 라면 먹고 독서실 가려고. 죽겠다, 아주 그냥.

“그래? 넌 학교 어디 가고 싶은데?”

-나? 나는 성균관대.

“성대? 무슨 과?”

-그건 모르지. 성적 맞춰서 가야지.

“왜 성대 가고 싶은데?”

-송중기가 거기 다니잖아.

“임마, 너는 송중기 때문에 진로를 결정하냐?”

-나는 지금까지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으니까. 성적 맞춰 가는 거지, 뭐. 그런데 갑자기 전화해서는 왜 이렇게 캐물어.

“그냥. 수시 쓸 때 다 돼가니까.”

-수시는 무슨, 내신 망했는데. 너는 공부 잘 돼 가냐?

“난 똑같지, 뭐.”

-너는 좋겠다. 골라서 갈 수 있고.

“너도 열심히 해, 임마.”

-독서실 가려는데 전화해서 방해하고 있는 건 너거든!

“아 그러냐? 담에 또 통화하자.”

-알았어.

그래. 나만 목표 없는 게 아니야. 이 자식도 성적 맞춰서 간다잖아. 전부다 이럴 거야. 나만 이런 게 아니라구…. 그런데 왜… 이 고민을 수능 때까지 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D-1.

“내일이 수능이라서 그런가. 문제집이 하나도 손에 안 잡혀.”

“그래?”

“응. 우리 밥이나 사 먹으러 갈래?”

“뭐 먹게.”

“맛있는 거!! 가자, 가자!!”

식사 후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는 두 사람.

“밤 돼서 추워 죽겠는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야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거든?!”

“웃기고 있네.”

“근데 넌 안 떨려?”

“뭐가.”

“하긴 너는 되게 열심히 했으니까 긴장하고 그런 것도 없겠다.”

“…….”

“내가 정말 서울에 있는 학교 갈 수 있을까?”

“되겠지. 모의고사 성적도 예전보다 많이 괜찮아 졌잖아.”

“넌 아마 최고 명문대만 갈 테니까 대학교 가서 나랑 만날 일은 없겠다, 그치?”

“…….”

“오늘따라 말이 더 없네.”

“글쎄….”

“응?”

“최고 명문대…… 안 갈지도 모르지.”

“뭐라고?”

“난 참 네가 부러워.”

“왜?”

“넌 너 자신의 존재자체를 잘 아는 것 같아서.”

“무슨 뜻이야, 그게.”

“나는 참… 수동적인 사람이야.”

“…….”

“꼭두각시 같아. 시키는 대로 하는.”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은 하는 거야?”

“갑자기가 아냐… 난 항상…….”

“……! 아니, 너 왜 울고…”

“난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 놈이야. 세상에서 제일 한심해.”

괴로운 듯 허리를 숙여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그 상태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계속해서 흘리는 남학생. 여학생은 남학생의 상체를 세워서 눈물을 닦아준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얼굴을 계속 잡고 눈을 마주치는 여학생.

“한심하지 않아.”

“…….”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

“…….”

위로에도 남학생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그에 여학생은 자신의 입술을 남학생의 입술에 잠시 갖다 댔다가 뗀다. 그래도 남학생은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눈물만 흘릴 뿐.

“나는……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

“가.”

“응?”

“가라고.”

“난…”

“가. 나는 알아서 갈 테니까.”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뜨는 여학생. 그리고 서로 아무런 연락 없이 각자 수능을 쳤다.

수능이 끝나고 남학생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여학생도 수능 성적이 나온 후 연기학원에를 다닌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는 잊은 채 연락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고… 2년.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난 이들. 서로를 발견하고 거리를 조금 둔 채,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다. 거리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갈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반면… 이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서서 잠시 바라보고 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넌 더 잘생겨졌다.”

“고마워.”

“…….”

“학교… 어디 갔니?”

“……서울대.”

“아….”

“너는?”

“난 세종대.”

“서울에 있는 학교 갔네.”

“너 덕분이지.”